약 속
초등학교 2~3학년때쯤이었던 것 같다. 여간해서는 어머니께 뭘 사달라고 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건캐논 장난감이 너무 갖고 싶어 어머니께 "만약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실 것이면 건캐논 장난감으로 꼭 사주시라"고 어렵게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어차피 크리스마스에는 아들들한테 선물을 사주시는 게 보통이었으므로, 이왕 선물을 하실 것이면 내가 원하는 것으로 선물을 받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당시 경제적 사정이 몹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아들의 부탁에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는데, 그 승낙의 말씀을 듣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정도로 그 물건이 탐났고, 어머니께서는 일단 아들에게 약속을 하시기만 하면 꼭 지키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크리스마스 아침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자 나는 내 머리맡에 놓인 선물을 보았는데, 그 선물이 내가 기다리던 건캐논 장난감이 아니라 싸구려 목각인형 두 개와 사탕 등인 것을 보며 난 크게 실망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 집이 그만큼 가난했다는 것에 대해 눈치를 챌 만큼 나는 그리 성숙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몹시 화를 내면서 그때 어머니께 "약속과 다르다"고 거칠게 항의를 해댔고 어머니를 드세게 몰아세웠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나도 그렇게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어머니께 정말 심하게 대들었던 기억이 난다.
법학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그때 나는 이미 '약속으로부터 권리가 나온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가의 유무나 상황의 변동 여부와 상관 없이, 뭔가 약속이 있었으면 그 약속으로부터 법적인 권리와 의무가 발생한다는 그런 관념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 뭔가 어머니께 내가 특별히 유익한 것을 해드린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어머니께 권리를 행사함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정도로 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옷장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돈 삼천원을 꺼내서 내게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한테 약속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너에 대한 내 최대한의 선의를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그걸 약속이라고 생각했으니, 나는 어쨌든 그 약속을 지키겠다. 너도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하면 그걸 꼭 지키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삼천원이란 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오육만원은 될 정도의 큰 돈이었다. 그 돈으로 나는 문방구에 가서 건캐논 장난감을 샀다는 것인데, 그때 어머니께서 힘들어하시던 얼굴표정은 아직도 내 기억에 뚜렷하다.
그 뒤로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약속을 하고, 또 그 약속을 어기면서 살아갔다. 그런데, 그때마다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서 들었던 그 말씀이 생각나 얼마나 속으로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옳고 그름을 칼같이 가르는 성격이었던 어머니께서는 약속을 신중히 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아주 철두철미하셨던 데 반해,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성격이 아니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번 실망을 안겨주는 인간, 신뢰성 별로 없는 인간이 돼버렸음을 점점 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 한두달 동안 나는 내 일생에 걸쳐서 거의 전무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약속을 한꺼번에 어겨야 했으니 이는 실로 낭패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 한 두달 동안 내가 어긴 약속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숙명여대 수강생들에게 각자 중간고사 시험 본 것 피드백을 다 해주기로 해놓고서, 결국 못해주고 말았다. 답안작성방법에 있어서 뭐가 잘못되었고 뭐가 문제가 있었던 건지 각 학생별로 맞춤형 통지문을 일일이 발송해주겠노라고 수강생들에게 호기롭게 큰 소리를 쳐댄 것까지는 좋았으나, 결국 그를 위한 시간을 단 한시간도 마련하지 못하고 한 학기를 마치고 말았다.
2. 내 지도학생들과 간담회를 갖기로 해놓고서, 결국 간담회를 못하고 한 학기를 넘겨버렸다. 지금까지 지도학생들과의 간담회를 거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매번 지도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간담회를 꼭 열겠다고 재삼재사 약속해놓고 결국 약속을 못 지킨 채 한 학기를 마쳐버렸다. 지도학생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생들과 면담약속을 잡아놓고 그 중 상당수를 연기하다가 흐지부지해버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메일로 면담을 신청해오거나 수업내용에 대해 질문을 해오거나 하면 칼같이 답변을 해주었는데, 요즘은 수면시간 부족으로 인해 메일을 읽기만 하고 답장을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3. 이번 학기에는 온라인 강의를 병행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과목당 1주일에 세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 다섯 시간... 무한정으로 강의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래서 모든 과목의 진도를 충실히 나가고, 단 한 과목도 강의교재에서 건너뛰는 부분이 없도록 하겠다고 학기초에 수강생들에게 공언하였으나 결국 그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물권법의 경우 명의신탁, 전질, 비전형담보 등을 건너뛰었고, 계약법의 경우 임치, 조합, 종신정기금 등을 대충대충 강의하고 넘어갔으며, 법정채권법의 경우 오신사무관리와 무단관리의 강의를 부실하게 때우고서 급하게 마무리지었다. 종강시간에는 학생들이 내게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야유를 퍼부어댔다. 물론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으므로, 학생들이 내게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두, 케이스문제 1문제에 객관식 40문제로 시험을 보겠다고 수강생들에게 공언을 하였으나, 결국 그 약속도 완전히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계약법과 법정채권법 기말고사의 경우 문제중복으로 객관식 40문제를 다 채우지 못하였고, 물권법 기말고사의 경우 막판 이틀 동안 밤을 꼬박 새워가며 문제를 만들었으나 수면부족으로 인한 컨디션난조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객관식을 30문제밖에 출제하지 못한 채로 시험을 치르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시험과 관련된 약속은 내 일생동안 절대 어긴 적이 없었는데, 이것도 내가 올해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5. 고시실 지도교수를 하면서 고시실원들 하나하나와 개별면담을 하고 각 실원 한 사람 한 사람씩을 위한 상담카드를 작성하여 비치하겠노라고 약속하였으나, 이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고시실원들의 수많은 민원사항들을 본부 측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몇몇 개를 누락시키는 잘못도 저질렀고, 사시 합격자들과의 면담도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결국 학장님께 사시합격자들과 관련한 대부분의 업무를 떠넘겨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사시합격자들과 총장님과의 간담회 등이 생각만큼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고시실 발전계획도 원래는 학기초에 작성하여 제출하기로 하였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11월 하순에야 겨우 제출하였고 그만큼 고시실 개혁의 김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6. 수많은 학회행사에 참석하기로 해놓고 불참했다. 재산법학회의 경우 내가 이사를 맡고 있어서 모든 행사에 필참해야 했으나, 올해 단 한 번도 재산법학회 학술대회에 참석을 못하는 진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국제매매법학회도 필참하기로 약속해놓고 결국 3월달 한번만 참석하고 그 뒤로 줄줄이 불참해버렸다. 약관규제법학회도 참석해서 발표까지 하기로 약속해놓고 결국 발표약속을 펑크내버렸다. 민사법학회도 매번 참석을 하기로 약속해놓고 결국 정규대회는 단 한번도 참석을 못한 채로 1년을 보내버리고 말았다.
7. 거의 모든 학술논문심사의 마감을 제대로 지킨다고 약속해놓고 결국 다 못 지키고 말았다. 수십편의 학술논문 심사를 했는데 심사보고서 제출이 하루 이틀 늦어지는 것은 다반사요, 사흘씩 마감을 넘긴 적도 수두룩했다. 나의 그러한 업무태만으로 인해 수많은 논문투고자들이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채로 논문수정을 하게 되었다.
8. 최근에는 유난히 학술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거의 모든 학술논문의 제출마감을 꼭 지킨다고 약속만 하고서 끝내 다 못 지키고 말았다. 민사법학회 발표문도 마감시간까지 완성을 못한 채로 제출했고, 특히 청파법학 제9호의 경우 마감이 8월 30일이었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곧 완성해서 보내겠다고 계속 시간을 질질 끌기만 하다가 결국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완성된 논문을 제출하고 말았다. 비교사법학회 발표문도 마감시간까지 제출을 못해서 발표 당일에야 파일을 들고 가 인쇄를 하는 대소동을 벌였다. DAAD 국제학술대회 발표문과 국제매매법학회 발표문도 마감시간까지 제출을 못해서 발표 당일에야 제출을 하는 촌극을 벌여야 했다. 안암법학회 발표문도 당일에 임박해서 몇시간 벼락치기로 작성해 제출하는 코미디를 연출했고, 우리 학교 법학연구소 학술대회 발표문도 마감을 며칠 넘겨서 몇시간 벼락치기로 작성해 초안을 제출한 후 발표시간 몇 시간 전까지 분초를 다투어가며 교정 및 마무리작업을 하는 아슬아슬한 광경을 보여주어 수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9. 가을 내내 주말마다 아들녀석과 여행을 가기로 약속해놓고 줄줄이 약속을 펑크내고 말았다. 저녁마다 아들녀석을 유치원에서 데려와야 했는데, 유치원에 보내고 유치원에서 데려오는 모든 일을 내가 다 하기로 약속해놓고 수없이 펑크를 내고 또 내어 아내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주말여행 약속도 여러번 취소했고, 3박 4일 일정으로 가기로 한 가을여행도 결국 못 가는 것으로 낙착을 보고 말았다. 1년 내내 여행이라곤 거의 못해본 채로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10. 이번 학기 내내, 아니 2013년 1년 내내, 수많은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서 그 모든 약속을 다 취소해버리고 말았다. 단 한번도 친구들과 만나서 저녁 한 끼, 술 한 잔 마셔보지 못한 채 2013년 한 해를 보내게 된 상황이다. 연말에 수많은 송년회 일정이 있었으나, 전부 참석하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막상 시간이 임박하면 밀린 일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다가 갈 시간을 다 놓쳐버렸다. 언제나처럼 올해도 단 한 군데의 송년회도 참석하지 못한 채 연말을 보내버리고 있는 상황이다.
대략 이런 식으로 요즘에 수많은 약속을 어기면서 살았다는 것인데, 이러고보니 내가 도대체 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이 세상에 무슨 신뢰를 쌓고, 무슨 인덕을 쌓으며, 무슨 좋은 관계를 맺고 살 것이란 말인가? 요즘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부터 시작해서 무상보육, 경제민주화, 철도민영화보류 등의 약속을 모두 어겼다고 욕을 먹던데, 적어도 나는 그러한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 욕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말인데 내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나한테 하셨던 말씀이 지금 다시 떠오른다: "나는 너한테 약속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너에 대한 내 최대한의 선의를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그걸 약속이라고 생각했으니, 나는 어쨌든 그 약속을 지키겠다. 너도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하면 그걸 꼭 지키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앞으론 나도 내 능력과 체력, 시간 등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지간하면 약속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약속을 하면 꼭 지키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겠다. 밤잠을 더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끼니를 더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프로정신이 별로 없으신 것 같다는... (-_-)
그런데 저 연봉 그렇게 많지 않아요.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의 절반 정도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저는 조교도 없어요. -_-;
http://www.unn.net/news/detail.asp?nsCode=57218
덧붙여서... 주인장님께서 꼭 읽어보셨으면 하는 기사 하나 링크해드리네요. 꼭 읽어보시고 본인이 지금 위치에서 뭘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보셨으면 하네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630203812
아무래도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이제는 방학도 되었으니까 부디 몸조리 잘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위에 글 쓰신 분께 한 말씀 드리자면 교수 평균연봉이 1억 원이 넘는다는 건 잘못 알려진 얘기입니다.
신문기사에 교수평균연봉 1억 원 운운하는 것은 1년에 2~3억씩 연봉을 받는 의대교수들과 1년에 수억원에서 수십억 원씩 하는 프로젝트를 몇 개씩 수주하는 공대교수들까지 모두 합쳐서 평균 매긴 값이란 걸 알아주시길.
로스쿨교수들과 법대교수들은 전체 교수들 가운데서도 연봉이 거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수들은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백수로 지내다가 아주 늦게서야 돈을 벌기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아주시길...
교수들이 확실히 철밥통인 건 맞는 듯... 철밥통이 아니라면 감히 이딴 식으로 업무를 태만히 하지느 ㄴ못하겠죠.
Ciracuser님께/ 우리나라 대학교수 가운데 건강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제 정신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어쨌든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etty님께/ 업무를 태만히 한 데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주인장님은 본인의 위치에서 지금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