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를 읽고
내가 기억하기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를 읽어본 것은 이번이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어진다. 상당히 엉뚱하고 독특하면서도 재치 있는 말을 많이 할 것이라 기대하고 읽어봤지만, 유감스럽게도 별로 그렇게 톡톡 튀는 얘기는 없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동물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3년간 인도에서 350명의 인간을 먹어치운 표범과 그 표범을 잡기 위해 초대되어서 8년간 125마리의 표범과 호랑이를 잡아 죽인 영국인 사냥꾼의 얘기를 늘어놓는다든지, 하와이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1년 동안 35번의 강의를 하고 53번의 섹스를 하고 6921개의 담배를 피우며 살았노라는 얘기를 진짜 남의 얘기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 식으로 인터뷰를 했을텐데, 생각보다 밋밋하고 무난한 얘기만 하다가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래도 뒤로 갈수록 점점 더 무라카미 하루키다운 얘기가 많이 나오니, 독일어를 하실 수 있는 분들께서는 기사를 직접 한번 읽어보시기 바라겠다.)
좀 웃긴다 싶은 얘기는 대충 이런 것이다: ① 자기에게 있어서 글 쓰는 책상이란 클라크 켄트에게 있어서 공중전화박스와도 같은 것이라는 얘기. (그곳에서 자신은 슈퍼맨으로 변신한다나?) ② 자기가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달리기, 수영 등의 운동을 즐기는 이유는 절대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며, 자기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 ③ 자기는 의외로 도덕주의자이며, 독자들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얘기. ④ 자기 소설 속 주인공이 모두 30세 전후인 이유는 아마도 자신에게 아이가 전혀 없기 때문일 거라는 얘기. ⑤ 자기는 강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얘기. ⑥ 자기는 소설 속에 섹스장면을 대단히 실용적으로 삽입하며, 좀 심할 정도로 리얼하게 묘사하지만, 결코 포르노그래피처럼 자극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는 얘기. ⑦ 소설 속에 섹스장면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자기는 섹스 묘사를 즐기지도 않고, 워낙 수줍음을 많이 타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쓸 때에는 속으로 많이 부끄러워 한다는 얘기 등등.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갖는 매력은 그 특유의 심드렁함과 자기모순성에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사파 경기동부 군졸들을 방불케 하는, 일본 운동권 내에서도 최악의 개어거지 개막장 테러리스트, 전혀 개념도 없고 답도 없는 하드코어 폭력투쟁 일변도의 과격파 맹동주의 빨갱이 출신이었으면서도, 미국의 고급 재즈문화와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를 보란 듯이 즐기는 어이없는 모습이 그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한다는 게 일단 그러하다.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내면서도, 도시 중산층의 여유로운 삶을 향유하며, 한때는 자기 신념과 사상에 자기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면서도, 이제는 주체의 허무를 노래하고 “그럼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라는 여자 친구의 질문에 “없지.”라고 간단히 대답해버리는 그 극한의 무덤덤함이 그의 상반되는 매력인 것이다.
자기 20대 시절을 송두리째 쏟아 부었던 그 무엇에 대해 뭔가 대단한 과장과 미화를 해가면서 영웅적 투쟁담을 늘어놓고, 그러면서 심금을 울리고 눈물을 짜내고 결의를 다지고 그런 식의 글을 쓸 법도 한데,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는 절대로 그렇게 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엉뚱하게도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나 언어적 고립감이나 존재의 허무 같은 주제를 슬쩍슬쩍 건드리면서 시종일관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개인적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뿐이다. 그런데 그 소재들이 가만 들여다보면 대단한 사회경제적 함의를 갖고 있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애초부터 전혀 관심이 없었던 척하고 있지만.
궁금한 것은 그러한 그의 문학이 지금과 같은 사회양극화, 경제양극화의 시대에 과연 얼마나 큰 울림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문학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대 구소련의 붕괴 이후부터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는 명명백백해졌고, 정치적 에너지는 봉인되었으며,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커다란 이념문제나 사회문제는 더 이상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소소한 개인의 문제야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하던 시절. 풍요로운 물질문명의 욕망이 모든 것을 먹어 삼키고, 고도소비사회 속에서 반(反)엘리트적 지성인들은 지독한 공허감과 소외의식에 시달리면서, 사적인 환상의 세계 속에서나 구원과 도피를 갈망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런데 그때처럼 모든 것이 다 결딴나버린 것 같이 생각되던 시절의 나른하고 우울한 정서가 지금까지도 유효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의 소설을 워낙 많이 읽어서 그런지, 그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보내고 있는 평화로운 일상에 관한 얘기들은 뭔가 키들키들 웃음이 나오게도 하고, 바로 눈앞에 보이듯 선명한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뭐 그런 것 같다. 그의 노모가 벌써 90대의 나이인데 여전히 아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뭔가 당연하게 여겨지고, 교사 부모 밑에서 외아들로 자란 그가 여전히 외로움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도 뭐 늘상 그렇듯이 여전한 모습이구나 싶어진다. 65세의 나이이지만, 남방 안에 티셔츠를 받쳐 입고 반바지에 조깅화를 신고 다니는 30대의 패션을 고집한다는 것 역시 그답다고 생각된다. 아 물론, 다음번 소설에서는 이례적으로 50대 나이의 주인공을 드디어 등장시킬 것이라고 하니, 그의 패션 역시 50대의 패션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http://www.zeit.de/2014/03/haruki-murakami
솔직히 말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다 똑같지 않나요? 소설 가운데 아무거나 골라서 전반부 후반부를 결합시켜도 저언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던데...
허세와 겉멋이 가득한 문장도 그렇고, 병적인 나르시즘에다가 그럴싸한 해외 고유명사나 브랜드로 떡칠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여성을 바라보는 성차별적인 인식도 그렇고, 음담패설로 일관하는 것도 그렇고, 읽을수록 거부감만 생겨나고 여성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변혁에 대해 냉소적인 거라든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백치미스럽고 주인공과 너무 쉽게 잠자리를 같이 하는 거라든가...
이건 문학도 아니고 거의 겉멋들린 아마츄어 글장사꾼이 써갈긴 쓰레기급의 된장남 소설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신다는 분들도 전부 허세와 겉멋으로 살아가는 된장남들처럼 보이구요.
여대 교수님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홈페이지에 소개하시는 것이 과연 적절한 행위인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민족문학과 노동문학의 힘은 약해지긴커녕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 훌륭한 작품들도 점점 더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다만 주인장님과 같은 부르주아 기득권 교수들이 이를 무시하고 있을 뿐이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쓰레기 작가들의 소설 수십 권을 읽는 것보다 김하경 작가님의 '속된 인생'이나 안재성 작가님의 소설 '파업' '황금이삭' '경성 트로이카' 같은 소설을 단 한 줄이라도 읽어보는 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 학생들에게 도움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 진보문학에 독자들이 예전만큼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독자들의 보수성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혹시 좌파문학이 문학 본연의 아름다움인 세련된 문체와 면밀한 구성, 그리고 신선한 주제의식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것때문은 아닌지에 대해서 뒤돌아보셨으면 합니다. 하루키 문학이 당도(糖度)가 너무 높다고 비난하시기 이전에, 오늘날 민족문학과 노동문학이 왜 자꾸 천편일률적인 '쉰 막걸리' 맛으로 변해가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민족문학과 노동문학 계통의 작품들을 거의 읽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깊이 반성합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바쁜 이 세상에 시종일관 자본과 외세에 대해서 적개심과 증오심만 고취하는 문학작품들을, 과연 일반대중이 나이 먹어서까지 계속 읽고 싶어하게 될런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내면의 가치를 부정하며 특정의 이데올로기만이 절대선인 양 강요하고 특정한 개인을 인민재판식으로 몰아가는 태도야말로 님들께서 그토록 비판하시는 파시즘적 태도입니다. 그러한 지적 확신과 도덕적 오만이 님들을 더욱 더 고립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저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몇 편 읽어봤지만 모든 소설들 속에서 여성주인공이 전부 대상화된 존재로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소설이 평범한 존재들의 비범한 얘기라고 늘상 주장하는데요. 제가 읽기에는 전부 명문대 출신 도시중산계급 출신 남성의 자기 잘났다는 이야기, 주변의 여성들에 비해 지적으로 훨씬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면서도 남성으로서 갖는 본인의 사회경제적 기득권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고학력 지식인 남성들의 흔해빠진 자뻑 넋두리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어요.
존재론적 화두, 치밀한 상징장치, 세련된 어조, 예민한 감수성... 그런 것이 대체 어디서 발견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일단은 남성적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주인장님과 여성 네티즌들 간에 비로소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네요.
근데 그렇게 모든 게 헛된 거라면 자기 소설 써서 벌어들인 천문학적 인세 모두 가엾은 중생들을 위해 나눠줄 것이지 왜 쌓아두고 있답니까? 이렇게 추운 계절이면 산골 암자 같은 데 들어가서 추위에 떨며 살 것이지, 왜 따뜻한 하와이에 가서 웰빙 즐기고 산답니까?
존재론적 화두를 던진다고 하면서 자기 존재 자체가 이율배반임을 과시하겠다는 건지. 어차피 모두가 자기 이익 챙기면서 사는 법이라는 현실을 몸소 보여주겠다는 건지.
오늘날 민중문학은 민중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게 문학 본연의 아름다움(?)인 세련된 문체와 면밀한 구성, 그리고 신선한 주제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전혀 실리지도 않고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이기영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고향'이라는 소설을 써서 이광수의 '흙'보다 더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해방 후에는 월북을 한 뒤에 '두만강'이라는 소설을 써서 북한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로부터 위대한 작가로 각광 받았습니다.
이기영의 '두만강'이 1970년대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끊임없이 오르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이런 훌륭한 소설들이 아직도 우리 민중들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말로 문학성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두만강'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했던 전 세계의 그 수많은 문인들이 아마 배를 잡고 웃을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바쁜 이 세상에 시종일관 자본과 외세에 대해서 적개심과 증오심만 고취하는 문학작품을 읽는 건 이제 싫다고 하셨군요. 하긴 주인장님은 기득권을 즐기는 부르주아 교수니까 그저 이 세상을 안락하게만 살고 싶겠지요. 당연합니다. 이해합니다. 일제시대에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딴 식의 말을 했었지요.
이기영의 '두만강'이요? 그 작품은 저도 독일에서 읽어봤는데, 소설 맨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김일성 장군의 항일무장투쟁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백두산으로 결연히 떠나더군요. 이기영 작가가 북한에서 호의호식하고 잘 살았던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용비어천가스러운 소설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렸다는 것은 노벨문학상의 수치이고 흑역사입니다. 도대체 그런 관제소설이 왜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렸을지,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먼저 곰곰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_-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한 비참한 현실에서 멀리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에 파묻혀 산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배반입니다. 마치 병든 부모를 두고 저 혼자 게임만 하고 다니는 불효자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민족의 현실이 벼랑 끝에 몰려 있고, 노동자의 현실이 죽음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골방에서 웅크리며 존재가 어떠니 허무가 어떠니 하면서 퇴폐적 정신상태로 몽롱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사랑만 하면서 살기에도 바쁜 세상이니 아무런 적개심도 증오심도 없이 나 혼자 즐기면서 쾌락만 추구하고 살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노벨문학상의 수치이고 흑역사라구요? 서구 문인들의 나눠먹기 잔치에 불과한 노벨문학상이 과연 그렇게까지 대단한 상인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기영 작가의 '두만강'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지 않았다는 자체가 오히려 노벨문학상의 수치이고 흑역사입니다. '두만강'을 직접 읽어보신 분이라면 박경리의 '토지' 따위보다 훨씬 더 나은 대하소설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텐데요. 한국전쟁 전후를 그린 대하소설로서 '태백산맥'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면, 일제시대를 그린 대하소설로서는 '두만강'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 아닐까요?
아직도 항일독립투사 김일성의 무장투쟁경력은 가짜라고 믿으시는 모양이죠? 그렇다면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분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평생 그렇게 반공반북의 이데올로그로서 사시기 바라겠습니다.
한연주님은 민족문학, 노동문학, 진보문학을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민족문학, 노동문학, 진보문학입니까? 김일성 3대 세습체제에 충성하기 위한 민족문학, 노동문학, 진보문학입니까? 한연주님께서 읽어봤냐고 하신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들도 한연주님의 성향을 감안하면 대략 알만하다 싶어지네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한연주님 같은 분이야말로 진보진영을 위해 도움이 되긴커녕 오히려 해악만 끼치는 분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지네요. ㅠ </font></bod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