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선회 (Circular Mill)
20세기 초 William Beebe라는 미국의 학자는 남미 가이아나 정글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무리의 병정개미들army ants이 둘레가 365미터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개미들은 이틀 동안 그 원을 돌고 돌고 또 돌다가 결국 굶주리고 지쳐서 전부 다 죽고 말았다. 그렇게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길을 못 찾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
사실 그 개미들은 군체를 이루어 ‘앞에 가는 개미를 따르라’는 규칙만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살던, 아주 착하고 부지런한 개미들이었다. 그런데 그 앞에 가는 개미가 길을 찾지 못하자, 나머지 개미들은 감히 다른 대안을 제시하거나 독자적으로 자기 길을 가버리지 못하고, 모두 비참한 떼죽음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과학자들은 ‘원형선회Circular Mill’라고 이름 붙인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인간사회 가운데서도 집단주의 문화가 매우 강한 사회에서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급격히 군국주의 일당독재와 세계대전으로 치닫은 독일과 일본사회가 그와 같다. 집단노동과 집단분배체제의 우월함을 강변하다가 1990년대 이후 한꺼번에 몰락해버린 공산국가들도 그와 같고, 비록 멸망하진 않았지만 아직도 세계 최악의 빈곤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북한사회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집단주의로 똘똘 뭉친 이들은 얼핏 가장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 같은데도 왜 이렇게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러한 ‘집단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기집단이 천하무적이라는 착각과 극단적인 낙관주의를 품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의 도덕성을 확신한 나머지 어떤 목표를 이루는 수단의 부도덕성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며, 경쟁 집단이나 적대 집단을 약해빠진 겁쟁이나 사악한 무리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갖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런 사회에서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효율적 집행을 위해 리더에게 지나치게 큰 권력을 몰아주는 시스템이 작동하게 돼있다. 그 리더는 독재자 특유의 낙관적 패권주의와 주관적 독선 및 소명감에 매몰되어 오로지 하나의 모험적 경로를 향해 폭주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폭주에 속도를 더하기 위해서는 반대자의 비판과 견제를 없앨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집단의 권력구조는, 그 리더에 충성하는, 목소리가 큰 일부의 측근들 중심으로 재편된다. 따라서 다른 구성원들이 제기하는 반론은 쉽게 묵살되고, 심지어는 반대자들이 가혹하게 탄압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물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끔찍한 결과는, 그 독재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집단 전체가 공멸의 위기에 처하고 지옥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는 점에 있다. 만약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단아를 포용하며 갈등과 논쟁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지배한다면, 그러한 동조화 압력을 분쇄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다양성의 존중, 이단아의 포용, 갈등과 논쟁의 당연시와 같은 가치가 인정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집단주의의 문화 대신 개인주의의 문화가 정착될 것이 요구된다. 자신과 상대방을 전체의 일원이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는 한, 절박한 동조화의 압력을 거스르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개인플레이의 가능성이 봉쇄된 채, 오로지 집체적 행동만 허용될 뿐이라면, 결국 그 사회에서는 모든 의사결정이 집단 내의 권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대등한 의견교환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어려워질 것이며, 남들 눈치 보지 않는, 황당한 사유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엉뚱하고 기발한 대안의 창출은 거의 힘들어진다고 보아야만 한다.
물론 개인주의는 개인의 고립과 소외를 불러오고 이기심을 조장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 돕고 나누고 함께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집단이나 공동체의 압력에 의한 강제적 협동과 봉사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협동과 봉사가 윤리적으로도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개인주의는 비단 윤리적 요청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집단적 오류의 교정 및 독창적 대안의 형성 가능성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요청으로 인하여 발전하여온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아야만 할 것이다.
개인주의는 결국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도생하자는 차원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차원의 이데올로기가 공동체주의보다 진리발견에 오히려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냥 역설적 가능성에 불과하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얼마전에 맥킨타이어를 인용하셨는데, 맥킨타이어는 주인장님과 같은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손꼽히는 공동체주의 철학자인 건 인정하시죠? 맥킨타이어가 주인장님의 글을 읽었으면 뭐라고 그랬을까요? 어느 싸구려 학자가 이따위 반공 글짓기 수준의 글을 썼느냐고 웃지는 않았을까요ㅕ?
병정개미를 예로 드셨는데, 병정개미가 지구상에 인간보다 더 번성한 동물개체라는 건 알고 계시는지 모르고 계시는 건지...
원형선회를 예로 드셨지만, 그것은 정말 희귀한 예에 불과하고요. 병정개미가 그토록 번성하며 잘 사는 것은 그들 특유의 집단주의, 공동체주의 문화 덕분이란 것도 잘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