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민법상 ‘nichtig’와 ‘unwirksam’의 차이


최근에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독일 민법상 ‘nichtig’와 ‘unwirksam’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둘 다 ‘무효’라는 뜻으로 번역되는데, 독일 사람들이 ‘nichtig’와 ‘unwirksam’을 무차별적으로 섞어서 쓸 리는 없고, 뭔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용어를 두고 있는 거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nichtig’와 ‘unwirksam’이 우리나라 말로 ‘본래적 무효’와 ‘비본래적 무효’ 정도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양자는 내용상의 차이를 갖는다고 답변하였는데, 그에 대해서 그 교수님께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시고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이에 관한 추가적 설명을 여기에 적어두고자 한다. (이건 물론 내 교과서에도 이미 썼던 부분이다.):

사실 독일의 법률들은 법문상 ‘nichtig’와 ‘unwirksam’, 두 가지 용어를 그리 구별하지 않고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 학문적으로 ‘본래적 무효nichtig’와 ‘비본래적 무효unwirksam’는 엄밀히 구분되는 개념이며, 강학적으로도 두 개념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실제로 독일의 학설에 따르면, ‘본래적 무효nichtig’는 처음부터 당연히 무효인 것을 말하는 반면, ‘비본래적 무효unwirksam’는 당연히 무효라기보다 법에 의해 무효인 것처럼 취급됨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각각 다른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비본래적 무효unwirksam’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처음에 유효하였다가 나중에 일방의 행위에 의하여 그 법적 효력Rechtsgeltung이 소급적(遡及的)으로ex tunc 상실되는 것으로서 이를 ‘소급적 무효’라 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어떠한 법률행위에 요건(추후에 갖춰질 수도 있는 요건)의 불비가 있었는데 그 요건이 추후에도 갖춰지지 못하는 것으로서 이를 ‘불발효(不發效)’라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취소사유Anfechtbarkeit 있는 법률행위가 처음에는 유효하다가 결국 취소권자에 의해 취소되어 처음부터 무효인 것처럼 취급되는 경우, 그러한 법률행위는 추후에 일방의 취소권행사에 의해 처음부터 무효인 것처럼 되는 것이므로 ‘본래적 무효nichtig’가 아니라 ‘비본래적 무효unwirksam’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밖에 애초에 대리권한Vertretungsbefugnis 또는 처분권한Verfügungsbefugnis 없는 자가 처분행위 또는 대리행위를 하였는데, 그러한 행위가 끝내 추인Genehmigung을 받지 못해 무효가 된 경우에도, 그러한 법률행위는 추후에 갖춰질 수 있는 요건이 끝내 갖춰지지 못함에 따라 무효로 취급되는 것이므로 ‘본래적 무효nichtig’가 아니라 ‘비본래적 무효unwirksam’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행위에 있어서 추후에 취소권자가 취소를 하지 않거나, 대리권한 또는 처분권한이 나중에라도 행위자에게 부여될 경우, 그 법률행위는 무효unwirksam가 아닌 유효wirksam가 된다.

반면 ‘본래적 무효Nichtigkeit’는 그보다 더 강한 것으로서, 처음부터 그 어떤 법적 효력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하자의 치유Heilung도 거의 불가능한 무효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무능력(意思無能力 Willensunfähigkeit)처럼 그 무효사유가 당사자 자신에게 있었던 경우, 이는 ‘비본래적 무효unwirksam’가 아니라 ‘본래적 무효nichtig’이고, 법률행위의 목적이 공서양속(公序良俗)에 반하거나 불공정(不公正)한 경우에도, 이는 ‘비본래적 무효unwirksam’가 아니라 ‘본래적 무효nichtig’에 해당한다.

비진의표시나 통정허위표시도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 되는 의사표시였으므로 ‘비본래적 무효unwirksam’가 아니라 ‘본래적 무효nichtig’에 해당한다. 방식을 갖추지 못한 유언처럼 요식행위(要式行爲)임에도 불구하고 방식을 갖추지 못한 행위 역시 ‘비본래적 무효unwirksam’가 아니라 ‘본래적 무효nichtig’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대체로 보아 우리 법상 무효사유(無效事由)에 의해 무효가 된 것은 ‘본래적 무효nichtig’라고 할 수 있고, 취소사유(取消事由) 및 취소권 행사에 의해 무효가 된 것은 ‘비본래적 무효unwirksam’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무권대리행위(無權代理行爲)의 경우에는 무효사유에 의해 무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추인가능성이 남아 있는 까닭에 ‘비본래적 무효unwirksam’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댓글 1

김규수
김규수
이 정도 얘기는 이영준 변호사님 교과서에도 다 나오고 있고, 지원림 교수님 강의서에도 거의 다 나오는 얘기인데요?

마치 주인장님이 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쓰셨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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