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효와 구별되는 개념들
며칠 전에 무효에 관한 얘기를 한 김에 무효와 구별되는 개념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기로 하겠다. 무효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는 먼저 ‘취소’가 있고, 그 다음에 ‘불성립’ 또는 ‘부존재’가 있는데, 이에 관해 차례차례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취소(取消 Anfechtung)는 법률행위가 일단 유효한 법률행위로서 효력을 발생하였으나 그 후에 취소권의 행사로 인하여 성립의 시기로 소급하여 효력을 잃게 되는 것을 말한다. 취소의 사유로서는 미성년자의 법률행위(제5조), 정신적 제약으로 후견을 받는 자의 법률행위(제10조, 제13조),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제109조), 사기ㆍ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제110조) 등을 들 수 있다.
무효는 그 무효에 관한 특정인의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무효사유가 존재할 경우 당연히 처음부터 효력이 없는 것이 된다. 반면에 취소는 취소사유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특정인(취소권자)의 주장(취소)이 있어야 비로소 효력이 없어지게 된다. 또한 무효는 처음부터 효력이 없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이를 주장할 이익만 있으면 무효로서 주장하고 효력이 없는 것으로서 다룰 수가 있게 되지만Toute personne intéressée peut invoquer la nullité, 취소는 취소권자(제140조)가 취소를 하기 전에는 일응 효력이 있는 것wirksam으로서 다루어지며, 다른 이해관계인이 이를 효력이 없는 것으로서 다룰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무효는 시간의 경과에 의하여 그 무효라는 사실에 변동이 있거나 하는 일이 없지만, 취소는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그 취소권이 소멸하므로, 이로써 그 취소사유 있는 행위는 확정적으로 유효한 행위가 되어버린다(제146조).
무효와 취소는 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느 법률행위를 무효로 할 것인가 또는 취소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법적 가치판단과 입법정책의 문제이며, 필연적이고 이론적인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체로 무효사유는 법질서 전체의 이상과 일반적인 이익intérêt général에 어긋나는, 객관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에 인정되고, 취소사유는 그 근거규정 자체가 특정의 상황에 놓인 자의 특별한 이익intérêt particulier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서 그 효력 유무를 특정인의 의사에 좌우하게 하여도 무방한 경우에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郭潤直, 289면; 宋德洙, 422면).
법률행위가 성립요건을 갖추었으나 효력요건을 갖추지 못할 때에 이를 ‘법률행위의 무효’라고 하며, 법률행위가 아예 성립요건도 갖추지 못한 때를 ‘법률행위의 부존재’ 또는 ‘법률행위의 불성립’이라 한다(金亨培/金奎完, 331면). 법률행위가 일단 성립해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무효가 되었다 해서 아무런 법률효과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소급적 무효Unwirksamkeit’의 경우 무효로 확정될 때까지 당사자 간에 계약체결 준비단계와 유사한 법률관계가 발생하므로, ‘법률행위의 무효’와 ‘법률행위의 불성립’을 일부러 구별하는 것이다.
‘법률행위의 불성립’은 이를 주장하는 자에게 증명책임이 없지만, ‘법률행위의 무효’는 이를 주장하는 자에게 증명책임이 있다는 것도 중대한 차이점이다. 또한 무효인 법률행위는 전환Umdeutung도 할 수 있고(제138조) 추인Bestätigung함으로써 새로운 법률행위로 만들 수도 있으나(제139조) 존재조차 하지 않는 법률행위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에도 구별의 실익이 있다(宋德洙, 429면).
다만 프랑스민법학의 경우 ‘법률행위의 불성립’을 ‘법률행위의 절대적 무효nullité absolue’와 거의 동일시하고 있으며, 독일민법학의 경우 ‘법률행위의 불성립’을 ‘법률행위의 본래적 무효Nichtigkeit’와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우리 민법 역시 제451조 1항 단서에서 "채무자가 채무를 소멸하게 하기 위하여 양도인에게 급여한 것이 있으면 이를 회수할 수 있고 양도인에 대하여 부담한 채무가 있으면 그 성립되지 아니함을 주장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나, 제504조에서 "경개로 인한 신채무가 원인의 불법 또는 당사자가 알지 못한 사유로 인하여 성립되지 아니하거나 취소된 때에는 구채무는 소멸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는 것 등을 보면, 법률행위의 불성립과 무효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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