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체결상의 과실에 관한 정리


계약체결상의 과실이란, 계약을 교섭하는 당사자 간에 장래에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신뢰가 형성된 단계에서, 당사자 일방이 일정한 주의의무를 위반한 것을 말한다. 라틴어로는 이러한 계약체결상 과실을 ‘culpa in contrahendo’라 하고, 독일어로는 이를 ‘Verschulden bei Vertragsschluss’, 영어로는 이를 ‘pre-contractual liability’라 한다. 계약체결상의 과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계약종료후의 과실이란 것이 있는데, 라틴어로는 이러한 계약종료후의 과실을 ‘culpa post contractum finitum’이라 한다.

계약체결상의 과실이란 계약이 아직 성립하지 않은 단계에서 과실을 범한 것이다. 물론 계약이 성립하는 중이나 계약이 성립하기 직전, 또는 계약이 성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단계에서 주의의무를 위반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엄밀하게 따지자면 계약이 아직 없는 상태에서 일이 발생한 것이므로, 이것은 계약법이 아니라 불법행위법에 따라 규율해야 하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梁彰洙, 민법연구 I, 386면).

그러나 계약의 성립을 준비하는 단계에만 들어가더라도 이미 양 당사자는 서로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인적ㆍ물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전계약적 단계에서 양 당사자는 단순한 시민 대 시민의 관계가 아니라 좀 더 특별한 구속관계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또 배려를 받을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한 이유로 독일민법(2002년 이후 개정민법 제311조)은 이렇게 계약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발생한 사고 가운데 일부를 계약법에 따라 규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계약의 성립을 준비하는 단계가 이로써 계약관계에 준하는 관계로 인정되는 셈이다. 물론 독일민법은 이를 위해 ① 계약교섭Vertragsverhandlungen이 개시될 것, 또는 ② 계약체결을 위한 준비Anbahnung를 하면서 일방이 상대방에게 장차 성립할지 모를 법률행위적 관계와 관련하여 자신의 권리ㆍ법익 및 이익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부여하거나 이를 위탁할 것, 또는 ③ 이들과 유사한 거래상 접촉geschäftliche Kontakte을 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건이 충족될 경우, 일방이 신의칙상의 주의의무를 위반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손해가 발생한 때에, 그 일방은 상대방에 대하여 계약유사적인 신뢰손해vertragsähnlicher Vertrauensschaden의 배상책임을 부담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 간에 계약이 성립하지 않은 이상, 당사자 간에 계약상 의무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함이 원칙이긴 하다. 특히 계약의 목적에 해당하는 급부의무Leistungspflicht, 즉 계약에 의해 주고 받을 주된 물건이나 서비스에 관한 법적 의무는 아직 당사자들이 부담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미 계약성립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상대방을 다른 일반시민들보다 더 특별히 배려해야 하는 의무, 즉 계약상 주의의무(고지의무, 설명의무) 내지 보호의무는 당사자들에게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방의 과실로 인해 상대방에게 손해가 발생하였다면, 여기서 그 일방은 그 주의의무 또는 보호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보더라도 무방하다(郭潤直, 53면; 金曾漢, 49면). 이래서 ‘계약체결상 과실’이란 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계약체결상 과실의 예로, 존재하지 않는 채권을 존재하는 것으로 오신하고서 양도하여 그 양수인의 자금조달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경우, 집을 팔겠다고 하고서 매수할 사람을 불렀으나 그 전에 아내가 미리 팔아버려 이를 모르고 방문한 상대방이 교통비 및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의 손실을 입은 경우, 돈을 빌려줄 사정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돈을 빌려준다고 약속하였다가 갑자기 안 빌려준다고 발뺌하여 상대방을 곤경에 빠트린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일정한 부동산을 매도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가 나중에 그 부동산의 처분금지사실이 드러난 경우(이 경우 상대방은 그 계약을 위해 계약금을 조달하느라 고생한 것과 헛된 건설계획까지 수립했던 것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수 있음), 아파트 분양자가 아파트단지 인근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는 사실을 수분양자에게 알리지 않아 결국 계약이 취소되게 만든 경우(大判 2007.6.1, 2005다5812,5829,5836), 오피스텔 분양자가 광고를 통하여 모노레일 설치사업의 실현가능성을 부풀리는 등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분양계약이 체결되도록 한 경우(大判 2009.8.20, 2008다19355), 사립학교가 학생모집을 위하여 공고한 입시요강과는 다르게 학생을 선발하여 그 학교에 입학하려던 학생들의 신뢰를 깨트린 경우(大判 2006.9.8, 2004다18859) 등도 계약체결상 과실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백화점에서 상품을 매수하려던 고객이 백화점 측의 관리부실로 백화점 바닥에 깔려 있던 바나나를 밟고 미끄러져 부상을 당한 경우(BGH NJW 1962, 31), 또는 백화점에 잘못 진열된 리놀륨장판이 쓰러지는 바람에 부상을 당한 경우(RGZ 78, 239; JW 1912, 1918)도 이러한 계약체결상 과실의 예가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집 보러 온 사람을 집주인이 지하실로 안내하면서 계단이 파손된 사실을 얘기하지 않아 집 보러 온 사람이 어두운 곳에서 굴러 전치 6주의 뇌진탕 피해를 입은 경우, 어느 회사의 경영컨설팅을 맡기로 하면서 그 회사의 영업비밀을 지득한 컨설팅업체가 컨설팅계약이 무산된 후 그 영업비밀을 다른 업체에 누설한 경우, M&A 계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합병대상기업의 신용을 평가하기로 한 업체가 그 신용을 잘못 평가하여 M&A계약을 무산시켜버린 경우(물론 이 경우 그 신용평가기관도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손실을 본 것은 마찬가지임) 등도 계약체결상 과실의 예로서 검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민법 제535조는 계약체결상의 과실이라는 표제하에 불능(不能)한 급부를 목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자는 목적물이 불능임을 알았거나 알았어야만 했을 경우에는 상대방의 신뢰이익(信賴利益)을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불능급부를 목적으로 한 경우 이외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율도 두지 않고 있다. 그 밖에 우리민법은 착오(錯誤)로 인한 의사표시에 있어서 경과실(輕過失)로 착오를 일으킨 취소권자에게 취소권(取消權)을 부여하고 있지만(제109조 1항), 그 대신 취소권자가 상대방에게 신뢰이익을 배상해야 한다는 규정은 두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공서양속(公序良俗)에 위반한 법률행위를 무효(無效)로 하고 있을 뿐(제103조) 그 무효행위자가 그 무효의 상대방에게 신뢰이익을 배상해야 한다는 규정 역시 두고 있지 않다.

위에서 보았듯이, 계약체결상의 과실제도는 우리 민법에 아직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지 않은 제도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우리 법원은 독일법상 계약체결상 과실에 해당할 사례의 대부분을 불법행위의 문제로 다루는 데 그치고 있다. 물론 불능급부를 목적으로 한 계약체결에 관해서는 우리 민법이 명문규정을 두고 있으므로, 이 경우에 한해서는 계약체결상의 과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梁彰洙, 민법연구 I, 386면)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 견해 역시 다른 사례에서는 계약체결상의 과실을 부정하고 있다. 계약체결상 과실과 관련 있는 사례에 대한 우리나라의 판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국방과학연구소 사건 : 국방과학연구소와 효성 사이에 1년 동안 추가공사계약 관련하여 계약교섭이 있었으며, 효성 측의 공사비용 조정요구를 국방과학연구소가 수용하였고, 공사비용 항목 포함 예산안까지 제출하여 효성 측에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했으나, 국방과학연구소 측에서 계약교섭을 부당하게 중도파기(中途破棄)하여 효성 측이 손해를 입은 사건이 있었다. 법원은 이러한 중도파기행위가 불법행위(不法行爲)를 구성하며, 주식회사 효성 측에서 계약의 성립을 기대하고 이행을 위하여 지출한 비용 상당의 손해가 그 불법행위와 상당한 인과관계 있는 손해에 해당한다고 보았다(大判 2004.5.28, 2002다32301).

* 전주우석대학 교직원채용약속 불이행 사건 : 학교법인 우석학원이 원고를 사무직원 채용시험의 최종합격자로 결정하고 합격통지와 아울러 ‘1989.5.10.자로 발령하겠으니 제반 구비서류를 5.8.까지 제출하여 달라’는 통지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령을 계속 지체하다가 결국 1990.5.28. 원고를 직원으로 채용할 수 없다고 통지함으로써 원고에게 손해를 가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위 학교법인이 자신이 경영하는 대학의 재정 형편, 적정한 직원의 수, 1990년도 입학정원의 증감 여부 등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채용할 직원의 수를 헤아리고 그에 따라 적정한 수의 합격자 발표와 직원채용통지를 하여야 하는데도 이를 게을리 하였다면 위 학교법인은 불법행위(不法行爲)를 저지른 것이므로, 원고가 위 최종합격자 통지와 계속된 발령 약속을 신뢰하여 직원으로 채용되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취직의 기회를 포기함으로써 입은 손해를 학교법인 우석학원은 배상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大判 1993.09.10, 92다42897 ).

* 아파트 건설부지 문화재발굴사실에 대한 고지의무위반사건 : 대전도시공사는 아파트 건설부지에 발굴조사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는 유구가 확인되어 정밀조사가 필요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장의 최종 결정이 있기 전에 그 부지에 건설될 아파트를 사전 분양하면서 그 입주자 모집공고문에 입주시기와 관련하여 이 사건 아파트 부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재 발굴조사로 인하여 사업계획 및 아파트 공사일정의 변경이 있을 경우에 2011년 12월로 예정된 입주일이 변경·지연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만 고지하고, 분양계약서에도 위와 같은 내용만을 기재하는 한편, 계약의 해제와 관련하여서도 대전도시공사의 귀책사유로 입주예정일로부터 3월 이내에 입주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 분양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조항만을 두었을 뿐, 문화재발굴작업으로 인한 아파트건설사업계획 자체의 변경가능성에 관하여는 모집공고문 및 분양계약서에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 대전도시공사는 발굴조사가 완료되기 전에 아파트 공사를 착공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그 아파트 부지에서 고려시대 저택 유구가 발견되자 중앙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지도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그 원형보존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하여 최종적으로 그 아파트 부지에 대하여 현지 원형보존 결정을 하였고, 이에 따라 그 아파트는 당초의 부지에 건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대전도시공사가 분양공고 및 분양계약 체결 당시 그 수분양자들에게 장차 문화재 발굴조사결과에 따른 현지 보존결정으로 인하여 아파트 건설사업의 폐지 또는 그 사업부지 변경 등에 관하여 제대로 고지하지 아니한 과실이 있다고 보았고, 이에 따라 대전도시공사는 아파트분양계약상 아파트공급의무의 이행불능(履行不能)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수분양자들에게 부담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大判 2011.8.25, 2011다43778 ).

* 전문건설공제조합의 도급금액 착오사건 :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공사가 아파트 신축공사를 하면서 그 중 욕실공사에 관해 주식회사 동림화성과 도급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주식회사 동림화성이 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도급금액 약 10억 원의 10%에 해당하는 약 1억 원의 계약보증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주식회사 동림화성은 전문건설공제조합으로부터 1억 원의 계약보증서를 발급 받아 이를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공사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주식회사 동림화성은 전문건설공제조합으로부터 계약보증서를 받기 위해 도급금액을 10억 원이 아닌 5억 원으로 줄여서 신청하였고, 그 결과 전문건설공제조합이 발급한 계약보증서에는 도급금액이 5억 원으로 기재되었다. 그 후 전문건설공제조합은 도급금의 착오를 이유로 보증계약을 취소하였고, 주식회사 동림화성은 수급인의 지위를 포기한다면서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공사에 계약해지를 통보하였다. 이에 대해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공사는 전문건설공제조합에 대하여 계약보증서를 발급함에 있어서 도급금액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과실이 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의 지급을 구하였으나, 법원은 전문건설공제조합에 설령 그러한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민법 제109조에서 중과실이 없는 착오자의 착오를 이유로 한 의사표시의 취소를 허용하고 있는 이상, 그 착오를 이유로 보증계약을 취소한 것이 위법하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이 불법행위(不法行爲)를 구성하지는 않는다고 판시하였다(大判 1997.8.22, 97다13023 ).

* 공동묘지 인근 아파트 분양자의 고지의무 위반사건 : 아파트 분양자가 아파트단지 인근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분양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아파트를 분양하여 수분양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우리 사회의 통념상으로는 공동묘지가 주거환경과 친한 시설이 아니어서 분양계약의 체결 여부 및 가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 공동묘지를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는 것은 통상 예상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아파트 분양자는 아파트단지 인근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는 사실을 수분양자에게 고지할 신의칙상의 의무를 부담하는데, 분양자가 이러한 의무를 위반하여 수분양자들에게 기망행위를 한 이상, 분양자는 불법행위(不法行爲)의 책임을 부담하여야 할 것이라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그 손해액은 ① 수분양자가 실제 지급한 분양대금액에서 ② 분양계약 체결 당시의 적정 분양대금 가액을 차감한 액수로 산정하여야 할 것이지만, ②의 가액을 객관적으로 산정할 만한 방법이 없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정을 정신적 손해의 산정에 참작하여 배상할 손해액을 산정할 수도 있다고 법원은 판시하였다(大判 2007.6.1, 2005다5812 ).

* 오피스텔 분양자의 모노레일 설치사업 광고사건 : 오피스텔 분양자가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인천국제공항 국제업무센터에 모노레일이 완공될 예정이라는 취지로 오피스텔 분양광고를 하여 수분양자들이 이를 분양 받았는데 그후 오피스텔의 시가가 하락하자 수분양자가 분양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분양자가 오피스텔 분양계약의 교섭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광고를 통하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경우, 수분양자가 그로 인해 착오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이는 동기의 착오에 불과하므로, 수분양자가 그를 이유로 계약을 취소할 수는 없다 할 것이지만, 분양자는 이 경우 신의칙상의 고지의무 등을 위반한 것으로서 이는 민법상의 불법행위(不法行爲)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大判 2009.8.20, 2008다19355 ).

* 보문학원의 입목매도 무효사건 : 학교법인 보문학원이 그가 경영하는 보문중고등학교의 교사신축을 위하여 무량사로부터 임야를 기증 받았다. 그런데 무량사의 이러한 기증행위는 그 사찰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였으므로 법원에 의해 무효행위로 판결되었다. 하지만 보문학원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 임야 위의 입목을 원고에게 매도하였는데, 위와 같이 보문학원이 그 임야 및 그 위의 입목에 관한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보문학원과 원고 간의 입목매매계약은 원시적 불능으로 무효가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법원은 원고가 학교법인 보문학원에 대하여 계약체결상의 과실을 이유로 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시하였다(大判 1971.6.22, 71다792).


우리 현행민법이 제535조에서 계약체결상의 과실을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력설(梁彰洙, 민법연구 I, 386면)이 주장하듯 목적이 불능한 계약교섭에 상대방을 끌어들인 일방이 그 원시적 불능에 관해 침묵한 것과 같은 아주 협소한 경우에만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을 예외적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계약교섭에 임하는 와중에 고의 또는 과실로 그 계약의 효력이 없어지게 만들어 상대방에게 헛고생을 시키거나 헛돈을 쓰게 한 경우, 계약교섭의 일방이 계약의 무효ㆍ취소사유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상대방에게 고지ㆍ설명하지 않아 상대방이 시간ㆍ노력ㆍ금전의 낭비를 하도록 한 경우, 계약교섭에 임하였다가 정당한 이유 없이 그 교섭을 중도파기하여 상대방에게 헛고생을 시키거나 헛돈을 쓰게 한 경우 역시, 계약교섭단계에서 계약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를 불이행하여 상대방에 신뢰손해를 발생시킨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여기에도 제535조를 유추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를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제750조)으로 해결하고 있는 현행 판례는 변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계약교섭단계에서 일방이 상대방의 급부이익 이외에 인격권, 소유권 등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하여 손해를 발생시킨 사안의 경우에는, 그냥 현행 판례대로 이를 불법행위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사안은 그 손해배상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서 불법행위의 규정을 따른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이 경우에 제535조를 적용하여 신뢰손해만을 배상케 하는 것은 사리에도 맞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편 계약교섭단계에서 일방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고지의무를 위반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착오를 불러일으켜 계약이 체결되도록 한 경우, 이러한 계약이 착오 또는 사기를 이유로 취소된다면 제535조를 유추적용하여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우는 계약이 원시적으로 불능이었던 경우와 유사성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계약이 취소될 수 없는 경우라면, 이 경우에는 제535조를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는 어쨌든 계약이 유효한 것이므로, 계약당사자 일방이 계약상대방에게 신뢰손해를 묻기 위해 이미 유효하게 성립한 계약을 부정하게끔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판례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이 경우에 제750조를 적용하여 불법행위의 책임을 묻게 하는 것(大判 2007.6.1, 2005다5812; 大判 2009.8.20, 2008다19355 )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사안은 어쨌거나 계약의 사안임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제390조를 적용하여 이행이익의 손해배상책임을 묻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방의 잘못된 정보제공 또는 고지의무의 위반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기대를 불러일으킨 그 내용이 그대로 계약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하고, 그 계약내용 그대로 급부가 이행되지 않은 것에 따른 채무불이행책임을 묻도록 하는 것이,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을 준별하는 우리 책임체계에 더 잘 부합할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각 유형별 요건과 효과]

(1) 개 관

제535조 1항은 계약체결상 과실의 유형으로서 오로지 원시적 불능에 관한 고지의무위반에 대해서만 규정하고 있고, 그 법률효과로서 신뢰손해의 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제535조 1항 단서는 그 신뢰손해의 배상액이 이행이익의 액수를 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계약체결상 과실은 계약이 아직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손해를 야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약이 이미 유효하게 성립한 상태에서 손해를 야기한 경우보다 배상액이 더 많을 수 있게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았기 때문임 ). 그리고 제535조 2항은 상대방이 그 불능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이 없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획일적으로 요건과 효과를 규정하고 있으나, 위반한 의무의 내용에 따라 차별화해서 그 요건과 효과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만약 계약체결상 과실제도를 독일에서처럼 일반적인 제도로 승인하여 확대ㆍ유추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건과 효과를 차별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원시적 불능에 관한 고지의무 위반

원시적 불능에 관한 고지의무의 위반은 우리 민법 제535조가 계약체결상 과실의 대표적 유형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사안이다. 그 요건은 다음과 같다: ① 먼저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될 것임을 계약상대방이 믿을 만한 객관적 사정이 존재해야 한다.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상 급부가 원시적 불능이어서 그 계약이 결국 성립하지 못하였거나 소급적으로 무효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③ 당사자 일방은 그 불능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방에게 고지하지 않았어야 한다(묵시적으로라도 고지를 했으면 계약체결상 과실은 인정되지 않음). ④ 상대방은 그 불능을 몰랐으며 모른 데 과실이 없었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이 갖춰지면, 제535조 1항에 따라 신뢰손해(信賴損害)에 대한 배상책임이 발생한다. 여기서 신뢰손해란 계약상대방이 그 계약의 유효를 믿었기 때문에 받은 손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계약이 가능했더라면 계약으로부터 얻었을 급부의 이익이 아니라(이것은 신뢰이익이 아니라 이행이익이라고 함), 계약의 불능을 알았더라면 지불하지 않았을 비용, 계약의 불능을 알았더라면 다른 곳에서 벌어들였을 수익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아직 계약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태에서 계약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 예컨대 경쟁입찰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출한 제안서, 견적서 작성비용 등은 이러한 신뢰손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판례의 태도이다(大判 2003.4.11, 2001다53059).

(3) 계약의 무효ㆍ취소사유에 관한 고지의무 위반

원시적 불능 이외에도 계약의 무효ㆍ취소사유에는 아주 다양한 사유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어느 것이든 계약체결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우리 민법 제535조는 계약체결단계에서의 고지의무위반사안을 오직 원시적 불능에 관한 고지의무 위반으로 제한하고 있긴 하나, 원시적 불능 이외에도 계약의 무효ㆍ취소사유 전체에 관한 각각의 고지ㆍ설명의무 위반에까지 제535조를 폭넓게 유추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도 계약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계약준비단계에서 일방의 잘못된 행위로 상대방이 헛수고를 하거나 헛돈을 쓴 것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①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될 것임을 계약상대방이 믿을 만한 객관적 사정이 존재해야 한다.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표시의 착오ㆍ하자, 양속위반, 무권대리 등으로 인해 계약이 무효ㆍ취소되어야만 한다. ③ 일방은 그러한 무효ㆍ취소사유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고지하지 않았어야 한다. ④ 상대방은 그러한 무효ㆍ취소사유를 몰랐으며 모른 데 과실이 없었어야 한다.

이러한 예로서는 일방이 상대방과 계약교섭단계에 있었는데, 갑자기 무권대리인이 나타나 설치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이에 관해 고지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무권대리인이 본인의 대리인으로서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려 한다는 점에 대해 본인이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인이 상대방에게 이를 고지하지 않고 고의ㆍ과실로 방치하여 상대방이 결국 무권대리인과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까지 지불하게 한 경우, 그 본인은 상대방에 대해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으로서 신뢰손해의 배상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인의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을 인정할 경우 무권대리의 사안에서 계약상대방은 좀 더 두텁게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물론 계약상대방은 제135조에 기해 무권대리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무권대리인은 무자력이기 때문에 계약상대방은 그리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

(4) 원시적 불능의 유책한 야기

우리 민법 제535조가 이에 관해 명시적으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계약의 교섭단계에서 일방이 계약의 원시적 불능을 고의ㆍ과실로 유책하게 야기한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사견을 말하자면, 이 경우에도 제535조가 유추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경우에도 원시적 불능이 있었고, 일방의 잘못된 행위가 있었으며, 그 잘못된 행위의 비난가능성은 단순한 고지의무의 위반보다 더 높고, 이 경우 신뢰손해가 배상되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요건 역시 원시적 불능에 대한 고지의무 위반과 비슷하다: ①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될 것임을 계약상대방이 믿을 만한 객관적 사정이 존재해야 하고,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상 급부가 원시적 불능으로 변해서 그 계약이 성립하지 못하였거나 소급적으로 무효가 되었어야만 한다. 그리고 ③ 일방은 그 불능을 고의ㆍ과실로 야기했어야 하고, ④ 상대방은 그러한 야기행위가 행해질 것을 몰랐으며 모른 데 과실이 없었어야 한다. 물론 그 효과는 신뢰손해의 배상이며, 구체적 내용은 원시적 불능에 관한 고지의무 위반과 같다.

(5) 계약 무효ㆍ취소사유의 유책한 야기

원시적 불능의 유책한 야기에 관한 법리는 원시적 불능으로 인한 것 이외에도 계약의 다른 무효ㆍ취소를 일방이 고의ㆍ과실로 유책하게 야기한 경우 전체에 폭넓게 유추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우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①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될 것임을 계약상대방이 믿을 만한 객관적 사정이 존재해야 하고,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표시의 착오ㆍ하자, 양속위반, 무권대리 등으로 인해 계약이 무효ㆍ취소되어야만 하며, ③ 일방은 착오ㆍ사기ㆍ강박 등으로 계약의 그러한 무효ㆍ취소를 야기해야 하고, ④ 상대방은 그러한 야기행위가 행해질 것을 몰랐으며 모른 데 과실이 없었어야만 한다.

이러한 예로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가령 계약교섭자 일방이 과실로 착오를 일으켜서 계약을 체결하였다가 이를 취소하는 경우, 계약교섭자 일방이 상대방을 기망하여 계약을 체결하게 하였는데 그 상대방이 계약을 취소하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계약교섭자 일방이 상대방을 강박하여 계약을 체결하게 하였는데 그 상대방이 계약을 취소하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계약교섭자 일방이 상대방을 현혹하거나 협박하여 양속에 위반한 계약을 체결하게 하였는데 그 상대방이 계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등이 그와 같다.

이러한 요건이 충족될 경우의 효과는 당연히 신뢰손해의 배상이다. 독일민법은 아예 명문규정(예를 들어 독일민법 제122조)을 통해 이러한 신뢰손해배상의 의무를 확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판례는 이러한 사안이 불법행위의 요건에 포섭되는지만을 검토하다가 이를 부정하면서 손해배상책임 역시 부정해버리곤 하는데(大判 1997.8.22, 97다13023), 이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계약의 무효ㆍ취소를 야기한 기망ㆍ강박행위가 불법행위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 행위가 계약의 무효ㆍ취소를 야기한 이상 이 경우에 신뢰손해의 배상책임만큼은 인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방의 착오에 기해 계약이 취소되었을 경우에도, 착오취소자 못지 않게 취소상대방의 이익 역시 보호할 필요성이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이 경우에 제535조를 유추적용하고 그로써 무효ㆍ취소를 유책하게 야기한 자에게 신뢰손해의 배상책임을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6) 계약교섭의 부당파기

계약교섭 자체가 부당하게 파기된 경우에도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계약의 원시적 불능을 유책하게 야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 경우는 계약의 체결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기한 것이니, 그 비난가능성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역시 계약체결상 과실의 사안으로 취급함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계약교섭의 부당파기 요건은 원시적 불능의 유책한 야기와 비슷하다: ①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될 것임을 계약상대방이 믿을 만한 객관적 사정이 존재해야 하고,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교섭이 정당한 이유 없이 파기되었어야만 한다. 그리고 ③ 일방은 그 교섭파기행위에 관해 고의ㆍ과실이 있었어야 하고, ④ 상대방은 그러한 교섭파기가 행해질 것을 몰랐으며 모른 데 과실이 없었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이 충족될 경우의 효과는 물론 신뢰손해의 배상이다. 우리 판례는 이러한 사안을 불법행위의 요건에 포섭시키면서도 그 효과로서 신뢰손해의 배상을 명하고 있는데(大判 2004.5.28, 2002다32301; 大判 1993.09.10, 92다42897), 그보다는 제535조를 유추적용하고 제535조의 법률효과로서 신뢰손해의 배상을 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 급부이익 이외의 법익침해

계약체결 자체에 대한 주의와 무관하게, 예를 들면 계약체결장소의 안전적 결함 등이 계약교섭단계에 참가하거나 참가할 상대방의 생명ㆍ신체ㆍ건강ㆍ자유나 소유권에 직접적으로 위해가 될 것을 알거나 알 수 있었으면서 그것을 방치해 상대방의 신체나 재산에 일정한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 이때 계약체결상 과실을 인정할 수 있는지 문제된다. 이것도 넓게 보면 계약의 교섭과정에서 일방의 주의의무가 유책하게 위반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계약체결상의 과실이 아닌 불법행위로 처리하는 것이 판례의 태도이긴 하지만, 만약 일부견해를 따라 이러한 경우에도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을 인정한다면, 그 배상범위는 신뢰이익에 국한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뢰이익과 이행이익의 개념을 떠나서, 마치 불법행위가 있었던 것처럼 상대방의 인신이나 재산에 발생한 손해 전체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견으로는 어차피 이렇게 할 것이라면, 이러한 경우를 계약체결상의 과실이 아닌, 불법행위로 처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8) 계약교섭 중의 설명의무위반

계약의 교섭단계에서 일방이 계약의 성립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항(예를 들면 급부의 현재 시가가 현저하게 낮아졌다거나 하는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제대로 고지ㆍ설명을 해주지 않은 경우에 제535조가 적용되어야 하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도 계약준비단계에서 일방의 잘못된 행위로 상대방이 손해를 입는 것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안에서 계약상대방이 손해를 입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고지ㆍ설명의무위반으로 인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마땅히 체결되었어야 할 계약이 체결되지 않은 경우와, 상대방의 입장에서 결코 체결되어선 안 되는 계약이 그로 인해 체결된 경우다.

만약 상대방의 입장에서 체결되어선 안 되는 계약이 일방의 고지ㆍ설명의무위반으로 인해 체결되었다면, 이때는 제535조를 적용할 수 있을까? 사견을 말하자면, 이때는 계약의 무효ㆍ취소요건이 충족되어야만 제535조를 유추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계약의 무효ㆍ취소요건이 충족되지 않는 고지ㆍ설명의무위반이라면, 이 경우 계약은 어쨌든 유효이므로, 합의해제가 되지 않는 이상 상대방이 설명의무위반자에게 신뢰손해의 배상청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참고로 독일에서는 계약체결전단계에서의 과실로 인해 손해가 발생하였다면 그 후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하고 있음). 계약을 그대로 살려두고 그로부터 이익을 챙겨먹고 있으면서 동시에 계약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그로 인해 계약이 무효ㆍ취소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대신에 이행이 지체되거나 불능이 되거나 불량하게 이행이 됨으로써 손해가 발생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신뢰이익 대신에 이행이익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大判 2011.8.25, 2011다43778 ). 예를 들어 불량하게 이행이 된 경우라면(예를 들어 오피스텔 분양자가 모노레일 설치사업 등을 광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허위사실로 드러났거나, 아파트 분양자가 아파트 단지 인근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사실을 은폐한 경우라면), 그 손해액은 계약체결로 낭비한 비용 및 날려버린 기회의 가치를 기준으로 산정할 것이 아니라, 애초의 계약내용에 따라 이행되었어야 할 급부의 가액에서 실제의 급부가액을 차감한 액으로 정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체결되었어야 할 계약이 일방의 고지ㆍ설명의무위반으로 인해 체결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대개 상대방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는 아무리 일방이 유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유도행위는 소극적 부작위에 불과하고, 어쨌든 상대방이 계약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발을 뺀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소극적 부작위가 거의 사기(詐欺)나 다름 없을 정도이고 계약의 불성립과 상당한 인과관계까지 있는 경우라면, 이는 물론 계약의 체결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배상되어야 할 손해는 신뢰손해가 아니라 이행이익(履行利益)의 손해이다. 이 경우 계약은 체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던 이상, 상대방이 계약체결을 신뢰하고 투입한 시간ㆍ노력ㆍ비용은 애초에 헛수고나 헛돈이 아니었고, 이 경우 단지 신뢰손해를 배상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경우는 단지 계약이 성립하지만 않았다 뿐이지, 애초에 그 계약에 무효ㆍ취소사유가 존재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계약이 온전히 성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뢰이익의 배상 대신에 차라리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거나 이행이익의 배상을 인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일방이 계약의 성립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항에 관해 상대방에게 제대로 고지ㆍ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막연히 그 이유만으로 제535조를 그 사안에 적용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악의로 거짓말을 하여 계약체결을 방해한 경우에는 그 고의성과 적극성으로 인해 비난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므로, 이러한 결론이 더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독일판례 BGHZ 49, 77). 일종의 예약(豫約)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그 예약에 따라 본계약이 체결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계약의 교섭은 어느 정도 계약의 예약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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