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부청구에 관하여


급부청구(給付請求)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채무의 내용이 되는 일정한 작위 또는 부작위를 하도록 요구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채무의 내용에 좇아 금액의 지급, 물건의 인도, 서비스의 제공, 소음의 인내 등을 하도록 법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그와 같다. 독일어로는 이를 ‘Leistungsforderung’이라 하고, 영어로는 이를 ‘claim for performance’라 한다. 여기서 ‘요구(要求)’ 내지 ‘청구(請求)’라고 하는 것은 물론, 예를 들어 ‘강제(强制)’처럼 상대방의 반대의사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관철하겠다는 의미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쨌든 상대방이 자유의사에 따라 스스로 행할 것을 전제로 하여 상대방에게 권리를 행사한다는 의사를 통지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청(申請)’이나 ‘요청(要請)’에 비하면, ‘청구’는 상대방에 대한 압박의 정도가 꽤 강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공손한 예절 등에 구애됨이 없이 상대방에 의해 반드시 행해져야 할 것을 상대방에게 행하도록 명령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상대방이 해주면 고맙고 안 해줘도 상관 없는 것을 해주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에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하라고 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2) 급부청구의 법적 성질 : 보통의 경우 이러한 급부청구의 표시행위 속에는 일정한 법률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의사가 담겨 있지 아니하다. 그저 단순히 상대방에게 이제 변제라는 사실행위를 하도록 알리고 그것을 하도록 시켜야겠다는 의사, 즉 사실적 의사를 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급부청구는 그 성질상 의사표시(意思表示)가 아닌 것으로 보게 된다. 급부청구에 근거하여 법률행위가 성립하고, 그로부터 급부이행의 법률효과가 발생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급부청구가 있을 때 채무자의 채무가 저절로 이행되는 것은 물론 아니라 하더라도, 이행기 없는 채권의 변제기 도래(제387조 2항), 소멸시효 중단(제168조) 등의 부수적 법률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행위자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그 급부청구라는 행위에 일정한 법률효과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급부청구는 그 성질상 준법률행위(準法律行爲)에 속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준법률행위 가운데서도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의사를 알리는 것이므로, ‘의사의 통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3) 비슷한 개념과의 구분 : 급부청구는 ‘의사의 통지’에 속한다는 점에서 최고(催告 Aufforderung) 또는 촉구(促求 Mahnung)와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이행요구의 통지여야 할 뿐 아니라(최고나 촉구는 취소 또는 추인 여부의 확답을 빨리 하라는 취지로 할 수도 있음) 기한을 두고 재촉함을 요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과 개념이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급부청구는 채무자에 대한 압박이라는 측면에서 강제이행(强制履行) 또는 소구(訴求 Klage)와도 개념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지만, 국가기관에서의 이행명령 또는 국가기관을 통한 물리적ㆍ심리적 강제를 당장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과도 개념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코 일방적 신뢰나 환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정당하고 적법한 것에 대한 명령이고,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그 의사가 반드시 적극적ㆍ능동적으로 통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급부청구는 기대(期待 Erwartung)와도 확연히 구분되는 개념임을 볼 수 있다(이행청구가 좌절될 경우 강제이행이나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게 되지만, 기대가 좌절될 경우에는 단지 실망만이 뒤따를 뿐임).

(2) 급부청구의 필요성

1) 채무자의 기회주의적 행동 : 채권의 효력이란 채무자가 일정한 행위를 하게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법적 힘을 행사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채무자의 그러한 의무이행 여부를 순전히 채무자의 의사 내지 양심에만 맡겨둔다고 하면, 기회주의적인 채무자가 채권자의 관대함을 악용하고 그 의무이행을 일부러 지연시키거나 아예 회피해버릴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이는 채무자가 아무리 법적인 구속의사에 따라서 자기 채무부담에 스스로 동의를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간은,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득이 되지 않는 일을 회피하고, 가급적 자신의 욕구를 바로 충족시키거나 자기에게 단기적 만족을 주는 일부터 먼저 하려 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어떤 의무를 부담한다 하더라도, 그 의무가 곧 흐지부지 사라질 것이라거나 다른 사람이 이를 대신 해주거나 할 것이라는 식의 자기편의적 환상을 갖고 있는 게 보통이다. 반면에 혜택이나 이익은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받거나 하기 전에 가급적 빨리 챙기고 누려야 한다는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단순한 기대감의 표출이나 사후적 가치평가 이외에 다른 어떤 압박도 가하지 못한다고 할 경우, 채무자는 이를 악용하기가 쉽다는 점이 고려될 수 있다.

2)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명령 :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채권자가 채무자의 거부감이나 불쾌감 등을 전혀 배려함이 없이 막무가내로 자기 이해관계와 권리만을 채무자에게 확인시키려 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별도로 검토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채권관계는 결코 위계적 상하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채무자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채권자에게 어떤 행위를 약속했고, 그 약속의 이행조건이 충족되었으며, 이행기한이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갑자기 자기가 채권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지위로 전락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게 보통이다. 아무리 채권자가 채무자의 의무이행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고, 그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채무자가 아직 이행을 지체하거나 거절한 것은 아닌 이상, 채무자가 채권자로부터 일종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무자는 채권자가 자기에게 그 객관적 권리내용이 아닌 주관적 희망사항만을 밝히고, 그것을 부탁하는 이상의 표현행위는 하지 않기를 바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채무자는 자신의 채무부담에 관해 채권자와 합의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채권자가 자기에게 명령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합의를 해준 적은 없으므로, 채권자가 설령 자기한테서 받을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요구를 하는 식이 아니라 의향을 살피는 식으로 해주기를 바랄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채무자의 그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채권자가 이에 아랑곳 않고 채무자에게 의무이행의 ‘요구’를 할 경우 채무자는 자신의 인격이 무시되었다는 기분에 정신적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의무이행의 의욕을 오히려 상실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3) 채무자의 의사영역에 대한 간섭과 개입의 필요성 :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권자로 하여금 채무자에게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그러한 급부청구가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명령의 의미보다는 건강한 정신적 자극 또는 주의환기(注意換起)로서의 의미를 더 많이 갖는다는 데 있는 것이다. 설령 그러한 이행의 청구가 채무자의 의사영역에 대한 간섭이 되고, 채무자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 된다 할지라도, 채권자가 혹시 권리 위에 잠 자는 건 아닌지를 살피며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적 채무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상, 채무자들에 대한 약간의 경고가능성은 채권자들에게 확보될 필요가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정도의 심리적 압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채무자에게는 법적인 의무가 있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민법은 이러한 이행청구 그 자체에 혹시 있을 수 있는 위법성의 요소를 완전히 조각해주며, 이러한 요구가 위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려 한다. 다시 말해 채무자의 채무이행에 대한 채권자의 요구와 명령은 법적으로 얼마든지 허용이 되며, 그로 인해 채무자에게 정서적 평온의 파괴와 자존감의 손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불법행위책임(제750조)을 지지 아니하게 된다. 이렇듯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적법하게 이행청구할 수 있는 힘을 가리켜 ‘청구력(請求力 Berechtigung zur Leistungsforderung)’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청구력은 채권에 부여되는 가장 최소한의 힘으로서, 만약 이러한 청구력조차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 채권은 더 이상 아무런 효력도 갖지 않는 셈이 된다 할 것이다.



댓글 3

H.호나우두
H.호나우두
교수님 특유의 문장... 다른 분들께서는 그냥 원래 그런가보다 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걸 혼자 세밀하게 파고드시는 게 교수님의 장기인 것 같네요. 이런 문장으로 민법만이 아니라 다른 법률까지 모두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_-;;
1stwhitewhale
1stwhitewhale
H.호나우두님께/ 음... 그렇지 않아요. 호나우두님도 그렇고,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시각이 있는 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떤 것은 더 적게 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더 많이 보기도 하고 그런 거죠 뭐. -_-;
졸리냥
졸리냥
교수님 글은 다른 법서에서 읽는 글들이랑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선택한 댓글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