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현실세계에서 무력하고, 현실은 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남들보다 공부를 더 깊게 해왔다고 자부를 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공부를 계속할 때마다 느끼는 일종의 허무함 같은 것이 있다. 내가 공부하는 이론의 세계와 그 이론이 적용되어야 하는 현실의 세계가 실제로는 전혀 다르게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무기력감 같은 것이다. 세월호니 4자방이니 천안함이니 댓글부정선거니 하는 것들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 특히 그러하다. "법학공부 아무리 해봤자 뭐하나, 저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데..."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말 그대로 이론은 현실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현실은 이론으로 잘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물의 주관적 질서는 그러한 것이다. 인간이란 합리적 이성을 갖고 자기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다하며, 세계를 개념화하고, 그 개념을 보편화, 체계화하며 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의 객관적 질서는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우리 현실 속의 인간은 탐욕스러움과 나약함, 그리고 어리석음과 유치함으로 가득차 있으며, 이러한 현실과 이상은 심지어 일말의 긴장과 대립조차 일으키지 않고 있다. 법학과 같은 규범학에서 뭐라고 외치며 떠들어대든, 그와 상관없이 현실은 그 나름의 모순된 동력에 따라 비정형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론이나 학문으로부터 현실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실제로 오늘날의 학문은 그저 그 자체의 작동원리에 따라 거짓말의 증식을 반복하거나 정치적 진영의 골을 더 깊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이론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다. 해결하긴커녕 오히려 그 모순을 더 증폭시키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학문이 마치 현실을 구원하기 위한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확신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부끄럽기만 하다. 실제로는 특정집단의 이익에 아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정파적 행위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면서도 위대한 정의라도 실현하는 양 자기도취에 빠졌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서, 끝내 사랑과 승리를 쟁취하는 영웅들의 성공담이 펼쳐지는 헐리웃영화나 그런 류의 긍정적인 성공담을 고대하는 진보언론의 기사를 읽는 게 영 재미가 없어진다. 그것보다도, 수많은 주인공들이 고난과 실패를 거듭하고 결국에는 비극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는 류의 옛 문학작품들을 읽을 때 더욱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여러 주인공들처럼, 이념과 현실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발을 담그지 못한 채 그 중간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엔 자기가 쳐놓은 덫에 자기 스스로가 걸려버리고, 그 비극적 운명을 나중에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최후를 맞는 자들이 가장 진실되면서도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라 생각되곤 한다.
실제로 이 세상이란 게 결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약점 투성이의 모순된 존재이고, 그러한 자들이 벌이는 대부분의 용기 있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선의는 악의로 오해되고, 이 세상의 운명은 암흑의 혼돈과도 같이 모든 것을 비정하게 짓뭉개고 집어삼키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자기 이론과 현실의 하나됨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어린애스러운 치기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허무한 이치는 굳이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지 않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냥 기본적으로 깨닫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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