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출장 후기
1.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6일까지 독일 출장을 다녀왔다. 급히 복사해야 했던 문헌도 복사했고, 가족과 모처럼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돌아왔다.
2. 무려 8년 만에 가본 함부르크의 모습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쾌적해지고 정갈해지고 화사해진 것처럼 보였다. 지난 2010년과 2011년에 독일경제가 많이 성장했고, 작년에도 독일경제가 최근 경제위기상황인 유럽대륙 내에서는 그나마 가장 안정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유독 독일경제에 투자가 집중되었다는 점 등이 거리 곳곳에,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 각각에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2.1. 한국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심겨진 나무들, 한국보다 훨씬 더 깨끗한 공기, 한국보다 훨씬 더 효율적, 기능적으로 짜여진 시스템,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계획되고 정교하게 디자인되었으며 탄탄하게 구축, 유지, 보수되는, 편리한 환경 등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독일에 있던 7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축적된 과학문명과 세련된 디자인의 쾌감을 느끼면서 살았는지를 다시 한번 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유학시절에야 워낙 절망과 비관, 그리고 스트레쓰의 늪 속에서 허덕이다보니 그런 선진적이고 예술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번에는 우리나라와 독일 간의 많은 차이들이 더 크게 눈에 들어왔고, 새삼 독일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더 자주 들었다.
2.2. 그 차이들 가운데 가장 크게 눈에 띄었던 것은 역시, 독일국민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본생활을 누린다는 점이었다. 일단 주거공간 외부부터가 대단히 널찍널찍하고 반듯반듯하여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아무리 육체노동자나 연금생활자들의 주거공간이라 하더라도, 아니 심지어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빈민굴 지역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건물과 건물 간의 간격이 충분히 넓고, 건물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아, 답답하고 어지럽고 비인간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다. 어느 거리이든 크고 작은 가로수가 빽빽하게 심겨져 있어 푸릇푸릇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거리의 청결상태와 자연보존상태가 워낙 좋고 악취가 없어서 깔끔하고 청신한 분위기였다.
2.3. 공동 주거공간의 쾌적함 다음으로 놀라웠던 것은, 물가가 낮다는 점이었다. 특히 슈퍼마켓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저렴했고, 식료품, 기호품과 전자제품의 가격이 모두 낮았다. 서비스 가격, 특히 식당의 음식 가격은 그래도 독일이 더 비싸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한끼 만 원 이상의 식사만 놓고 보면 독일의 식당이 훨씬 더 싸고 깨끗하고 맛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다. 함부르크는 독일 내에서도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2.4. 거기에다 독일은 사교육비 걱정도 없고, 대학등록금 걱정도 없고, 의료비 걱정도 없다. 도서관도 잘 돼있고, 각종 문화시설도 잘 갖춰져 있으며, 생활체육 시스템 역시 광범위하고 긴밀하게 잘 짜여 있다. 이러니 독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얼마나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본적인 것들이 확실하게 보장되니 사회 분위기에 있어서도 질투와 시기 같은 게 없어서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뭔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예절 바르며 유머러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긴 하지만, 독일과 우리나라 사이에 그러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3. 이번 출장의 주목적이 문헌복사이다보니, 아무래도 도서관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어, 도서관의 시스템을 아주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은 도서관의 시스템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장서의 숫자나 도서관의 인테리어만이 아니라 개방시간, 복사기기 등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3.1. 그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함부르크대학교 법학도서관은 예나 지금이나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쉬지 않는 연중무휴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침 여섯시에 문을 열고 밤 열두시에 문을 닫는다. 그리고 도서관 이용료는 무료이다.
3.2. 함부르크대학교 학생들 가운데 복사기를 이용하는 학생들은 이제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스캐너를 이용하여 학술자료들을 pdf 파일로 스캔, 변환한 다음, 자기 노트북이나 타블렛에 띄워놓고 보는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에다 문헌을 복사한 다음, 그것을 토너 냄새 맡아가며 읽어대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3.3. 각자 usb 스틱만 준비해가면 모든 스캔은 무료로 제공되었다. 법학도서관 한 곳에만 약 10개의 스캐너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스캐너에서 책을 갖다 대는 가운데 부분이 가벼운 스프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두꺼운 책을 스캔할 때에도 복사되는 페이지가 반듯하게 스캔되었고, 스캔되는 속도 역시 아주 빨랐다. 예전에는 복사코너에 들어가면 토너 먼지 냄새와 복사기 소음으로 귀와 목이 턱턱 막히는 듯했지만, 이제는 그런 게 거의 없어졌다.
3.4. 도서관은 건물 외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채광이 무척 좋고, 커다란 창이 전자감응에 따라 수시로 자동 개폐되어 환풍 역시 잘 되었다. 매일 아침 8시 경에 청소 아줌마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도서관 전체를 순식간에 깨끗이 청소하고 나가기 때문에 도서관의 청결상태 역시 괜찮은 편이었다. 화장실 공간 역시 넉넉하여, 시험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줄 서서 기다리는 학생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수업료 한 푼 안 받고 거의 국민 세금으로만 운영하는 도서관임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미래세대들을 위해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확실히 받아 학생들에게 정말 최고의 지식탐구환경을 제공하는 듯하였다.
4. 내가 독일을 방문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그리스의 국민투표(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프로그램 찬성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앞둔 시기였다. 그래서 TV를 켤 때마다 그리스 얘기가 많이 나왔고, 독일 친구들을 만나서도 그리스 얘기를 많이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진보지식인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그분들은 몰라도 정말 너무들 뭔가를 모르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에 관해 그냥 몇 가지만 얘기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4.1. 지난 7월 8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씨의 칼럼('정치와 용기')을 보니 아래와 같은 대목이 눈에 띄었다:
"‘트로이카’인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은 그리스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정책, 즉 부유층에 대한 중과세나 군사비 삭감 정책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서민들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임금 삭감, 사회복지의 축소 등 소위 긴축정책만을 강요해왔다."
4.2.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와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연합은 그리스 정부가 부유층 중과세를 하지 않고, 군사비를 대폭 삭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깊은 실망에 빠졌다. 특히 독일 사민당은 치프라스에 대해 애초에 대단히 우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프라스가 부유층 중과세와 군사비 대폭 삭감, 그리고 청년실업감소정책 등을 미적거리고 주저한 반면에, 자국민의 반외세감정에 호소하는 데는 아주 민첩했던 것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4.3. 물론 독일 내 좌파들의 입장은 대체로 그리스에 대해 최대한 자비를 베풀고, 그리스를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독일 사민당의 최고원로인 헬무트 슈미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리스를 절대로 비난해서는 안 되며, 설령 채무탕감을 해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무 긴축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구체적인 프로그램들을 단계적으로 제시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개진되고 있다.
4.4. 그러나 그러한 온정적인 태도는 그리스 정부와 그리스 국민들의 억울한(?) 입장을 독일이 온전히 인정해주겠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피케티에 앞서 헬무트 슈미트가 먼저 지적한 것이긴 하지만, 독일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로부터 채무 절반을 탕감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역사적인 이유 등을 감안해서 독일이 그리스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지, 그리스 정부가 유럽연합 가입하면서 회계장부 등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이나, 독일로부터 채무 일부의 탕감을 받았을 때에 맹세한 약속 등을 나중에 어기고서 벼랑끝 협박을 하는 것 등에 대해서까지 모두 용서를 해주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5. 독일 사민당 총재인 지그마 가브리엘도 이미 이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긴 하지만, 독일 지식인들의 기본 입장은 이렇다. 유럽의 그 어느 나라 전직 공무원들도 누리지 못하는 막대한 연금혜택을 받는 그리스 전직 공무원들의 기득권을 위해 독일의 연금생활자들과 노동자, 납세자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6. 국적을 넘어선 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것이 성사되려면, 적어도 연금비율이나 연금요건 등의 기본적인 조건은 대략 서로 일치될 필요가 있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그리스 공무원들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적은 액수의 봉급과 연금을 받는다. 그럼에도 독일 노동자들이 그리스 전현직 공무원들의 연금기득권에 공감하고 이에 대해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겠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4.7. 김종철씨를 비롯한 우리나라 좌파 지식인들은 이번 그리스문제를 신자유주의의 전횡에 대한 저항의 문제, 전세계 1% 최고특권층의 이익에 맞선 99%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한 문제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그리스에 대해 가장 동정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런 식으로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화해서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4.8. 유럽 사람들이 계급 간의 정의, 노동자의 권력, 자본주의의 폐지 등에 앞서, 그보다 더 기본적인 가치로 숭상하는 것은 '정직'과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정직'과 '신뢰', 그리고 '성실'이나 '염치'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조차 못 지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계급간의 연대도 무소용이고, 유럽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상호협력이나 배려 같은 것도 좀 곤란하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 진보 지식인들도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을 해보고서 그리스문제에 관해 논의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진다.
5. 이것 외에도 독일의 서점이나 박물관, 동물원 등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온 출장여행이었는데, 나머지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다. 특히 독일의 상고허가제도와 독일의 로스쿨제도 등에 관해서 독일의 판사, 변호사 친구들과 나눈 얘기들이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얘기를 더 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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