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민법상 culpa in contrahendo


2002년의 채권법 대개혁 이후 독일민법은 모든 급부의무의 불이행을 채무불이행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급부의무의 불이행에는 원시적 불능으로 인한 급부의무의 불이행도 포함되기 때문에, 우리 민법과 달리 독일민법에서 원시적 불능은 계약무효사유가 아니라 채무불이행사유에 해당하게 된다. 채무자의 귀책사유만 전제된다면, 원시적 불능이나 후발적 불능이나 책임원칙과 책임효과는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현재 독일민법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2년 이후 독일민법에서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은 이행이익의 배상책임으로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이전까지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이 신뢰이익의 배상책임에 국한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2002년 이전에는 채권자도 급부의 원시적 불능사실에 대해서 알았거나 알 수 있었으면 원시적 불능에 따른 신뢰이익 배상책임을 부담했다. 그러나 2002년 이후에는 객관적 불능급부의 채무자만이 그 원시적 불능에 대한 신뢰이익 배상책임을 부담한다. 다시 말해 계약체결 전에 그 급부가 채무자에게 주관적으로 불능일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불능이었는데, 채무자가 배려의무와 고지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때에 한하여 채무자는 신뢰이익배상책임을 부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경우 채무자가 계약전단계에서 부담하는 모든 배려의무와 고지의무를 다 이행했다 하더라도 어차피 계약은 체결될 수 없었을 거라는 데 있다.) 만약 그 급부가 주관적 불능이었다면, 채무자는 설령 그 불능이 계약체결 전에 이미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이행이익 배상의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물론 2002년 이전이든, 2002년 이후이든, 급부가 원시적 불능이라 하더라도 채무자가 선의,무과실이라면, 채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채무자가 그 급부불능 또는 장애사유를 회피할 수 있었다면, 채무자가 급부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사정이 계약체결 이전에 존재했든, 계약체결 이후에 존재했든 상관 없이, 채무자는 이행이익 배상책임을 부담한다. 그 이행불능에 대하여 채무자가 과실책임을 부담하는 근거는, 그에게 그 급부의무가 인수되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물론 채무자가 원시적 불능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지만, 채무자가 거래상 요구되는 주의를 다하지 않았다면, 채무자는 그가 인수한 급부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2002년 이전에는 원시적 불능(anfängliche Unmöglichkeit)과 원시적 무능(anfängliches Unvermögen)을 구분하였다. 그렇게 해서, 원시적 무능의 경우 무과실책임으로서의 이행이익배상책임. 그리고 객관적 불능인 경우 과실책임으로서의 신뢰이익배상책임을 부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2002년 이후에는 원시적 무능과 원시적 불능 모두 과실책임으로서의 이행이익배상책임을 부담할 뿐이다. 물론 무과실에 관한 증명책임은 채무자가 부담하지만, 2002년 이후 독일민법은 채무자의 주관적 무능에 관하여 무과실책임을 요구하지 않고, 과실책임만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채무자의 부담을 줄여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채무자가 원시적 불능을 알지 못한 과실책임은 신뢰이익 배상책임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계약체결 당시 그가 있었어야 할 상태만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채무자의 의무위반이 원시적 불능사실의 불고지에 있다면,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신뢰이익의 배상책임만을 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존의 이해에서는 자연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채무자가 급부의 원시적 불능에 대해서도 이행이익배상책임을 부담하는 근거는 채무자의 전계약적인 과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채무자가 급부결과에 대한 약속을 못 지켰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채무자는 여기서 채권자의 소극적 신뢰이익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 채권자의 적극적 급부이익을 침해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여기서 급부가 원시적으로 불능함에도 불구하고 계약은 유효하다고 봐야 한다. 마치 처분권한이 없는 물건에 대하여 채권계약을 유효하게 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원시적 불능인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라 하더라도 그 계약은 유효하게 성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채무자가 원시적 불능사실을 몰랐고 모른 데 과실이 없었을 경우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을 부담하지는 아니한다. 그런데 여기서 채무자가 원시적 불능사실을 몰랐고 모른 데 과실이 없었다는 것이, 채무자가 급부이행을 위하여 충분히 노력한 것을 의미하겠느냐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독일민법에서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은 계약체결전 고지의무의 위반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보다는, 계약상 채무자가 급부결과에 대해서 부담하는, 유형화된 보장의무(Einstandspflicht)의 위반에서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의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일종의 담보책임(Garantiehaftung)인데, 무과실의 착오를 면책요건으로 유보하는 이상, 완전한 무과실책임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러한 특별책임이 계약체결상 과실책임에 대한 종래의 이해와 쉽게 부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원시적 급부장애사례를 이러한 방식으로 규율하지 못하도록 입법자를 막을, 고차원적인 법원칙이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계약상 채무자가 급부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이를테면 '수단채무(obligation de moyens)'를 부담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보장의무를 인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수술에 대한 의사의 설명의무위반으로 인하여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을 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환자의 완전성이익까지 침해된 경우가 그러하다. 애초에 성공하기가 거의 어려운 수술이었는데, 의사가 그 수술에 관해 환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수술이 이루어진 경우라 하더라도, 그 완전성이익의 침해 자체에 의사의 과실이 인정되지 않는 한, 의사가 그에 대한 손해배상책임까지 부담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에는 의사가 환자에게 급부약속을 했다 하더라도, 여기서 발생하는 채무는 수단채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환자에게 만족할 만한 급부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 침해에 대해서만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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