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 기본소득제: 진정한 자유를 위한 복지
독일 짜이트지에 실린 티모 로이터의 글 'Bedingungsloses Grundeinkommen: Geld für wirkliche Freiheit'을 읽었다. 기본소득제(Grundeinkommen)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정부의 심사와 허가를 거치는 것도 아니고, 노동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상으로 일정 금액을 나눠준다는 개념의 간단 명료한 사회복지제도이지만, 의외로 전통적인 사회주의에는 부합하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기본소득제에 대해 독일의 노동자단체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독일의 억만장자 굇츠 베르너는 찬성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기본소득제는 집단주의적 사회주의에 부합한다기보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 간단히 말해, 기본소득제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한다.
기본소득제가 도입되면, 인간의 존재의의는 이제 노동하는지 여부에 따라 규정되지 아니한다. 노동조합이건 대기업이건 사회국가건 그 어떤 강제적 공동체에도 개인은 이제 종속될 필요가 없어진다. 물질적 풍족함이나 사치스러움, 또는 직장생활에 대한 유혹만 포기할 수 있다면, 모든 개인은 혼자서 자기 취미활동에만 전념하며 살아도 된다.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자기 노동력을 자본에게 판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에 자기 가난 또는 자기 노동을 증명해보일 필요도 없으며, 국가가 명령하는 강제노동 내지 직업훈련, 재교육프로그램에 끌려다닐 필요도 없다. 그냥 그 국가 내에서 '살아있기'만 하면 생활비를 받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사회국가는 복지, 즉 'welfare'를 이른바 'workfare'로 끊임없이 전환해왔다. 자유건 평등이건 진정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집단공동체에 참여를 해야 하고, 실질적 자유와 평등은 오로지 집체적 노동과 사회화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해온 것이 사회주의 좌파들의 기본생각이었다.
사회주의 좌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지'보다 '평생고용'이 보장되는 '안정적 일자리의 창출'을 더 우선시하였다. 그냥 돈으로 나눠주면 전국민에게 백만원씩이나 나눠줄 수 있는 재원을 가지고 이것을 공공부문의 확대니, 공공일자리의 창출이니, 중소기업의 진흥이니, 농어업의 진흥이니, 직업훈련에 참가하는 조건이니, 소득분위에 따른 차등지급이니 뭐니 하는 명목으로 세세하게 쪼개어서 복잡한 행정적 절차를 거치게 하였다. 이로써 막대한 심사비용, 허가비용, 의사결정비용이 발생하고 수많은 기득권들이 형성되자,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손에는 실질적으로 몇십만원밖에 돌아가지 않는 식으로 복지제도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눈먼 돈과 기득권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정치싸움이 벌어졌고, 불필요한 집회와 시위가 유발되었으며, 관료주의와 떼법이 판을 쳤다.
이러다보니 그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본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개인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박탈될 수도 있음을 당연시하는 이데올로기, 반면에 자본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개인적 자유가 무조건적, 무제한적으로 보장될 수도 있음을 당연시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고 얘기하면서도, 자본을 상속받았다는 이유로 놀고 먹으며 살아가는 유한계급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른체하는 모순을 갖고 있는 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였다.
기본소득제는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든 안 하든 그건 너의 자유"이고 국가는 그 자유를 지켜주겠다는 식이다. 개인에게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국가의 개입과 각종 사회경제집단의 중간착취를 최소화하면서도 개인에게 최소한의 물질적 안전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제는 아주 매력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기본소득제의 뿌리는 고대 로마제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성기의 고대 로마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시장경쟁에만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로마는 정기적으로 밀가루를 비롯한 여러 생활필수품들을 모든 로마시민들에게 무상분배한 나라였다. 이러한 무상분배를 기반으로 한 무상경제의 규모가 유상경제의 규모 못지 않았으며, 발달된 시장경제질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무조건적 무상분배제도 역시 로마의 번영에 기여하였다.
로마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기본소득제도는 번영하는 민주적 시장경제질서와 조화하면서 충분히 자기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이다. 기본소득제도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더욱 더 자발적인 것으로 재구성하고, 노동시장을 관료화하지 않으면서도 실업률을 대폭 낮춰주는 기능을 한다. 기본소득제도는 유상경제만이 아니라 무상경제 역시 우리 경제활동의 한 축이 되게끔 만들어주며, 돈이 최고가 아니라 사회적 인정, 소박한 보람, 자아실현,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 소규모 기호공동체에의 통합 역시 인간에게 훌륭한 경제적 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인간은 공동체에서의 집단적 노동을 통해서만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인간을 그렇게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권력의 강제적 동원(또는 전지전능한 어머니당이나 위대하신 수령동지의 강력한 령도 및 정치투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기본소득제는 대단히 위험한 제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개인을 원자화, 고립화하도록 방치하는 제도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점차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시대이다. 국가행정서비스의 발전속도는 개인의 창의와 사회의 변화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며, 직업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반면, 인간의 평균수명은 80세, 90세, 100세, 150세, 200세로 끝없이 늘어날 예정이다. 이 상황에서 이른바 진보진영이 60세 정년과 최저임금이 보장되는 '괜찮은 정규직 일자리'의 창출에만 집착하는 게 과연 '진보적'으로 옳을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정치적 과제는 문재인을 선택할 것인가, 안철수를 선택할 것인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을 편들 것인가, 노동을 편들 것인가, 그런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가장 중요한 정치적 투쟁은 '괜찮은 일자리의 창출'을 주장하는 중년의 기득권 세력과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청년세력 간의 충돌일 것이라 생각된다. 자본 또는 평생직장이라는 기득권을 쥐고서 이를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려는 세력과 그 기득권 자체를 사실상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세력 간의 싸움이 목전에 닥치고 있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오로지 사회주의적 시각에서만 현재의 정세를 분석하는 것은 오히려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가 그동안 상대적으로 경시해왔던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 '관료제의 비효율성과 경직성'이라는 관점에서도 현재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고, 앞으로의 정치적 발전을 전망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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