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니덤(Joseph Needham)은 영국의 과학사학자이다. 1954년부터 1995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이라는 대작을 썼다. 중국의 과학문명은 적어도 12~13세기까지 서양의 과학문명보다 훨씬 더 앞섰으며, 서양의 과학과 문명 가운데 아주 많은 부분은 원래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만들어지고 건너온 것이라는 내용이다.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조셉 니덤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해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독일 친구들과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문제점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내가 보았을 때,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책엔 틀린 부분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2012년 캐나다의 역사학자 리꺄르도 뒤셰엔느(Ricardo Duchesne)란 사람이 쓴 '서구 문명의 독특함(The Uniqueness of Western Civilization)'이란 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우연히 이 책을 구해서 읽어보았는데, 조셉 니덤 교수의 견해를 매우 통렬히 공박하고 있었다. (조셉 니덤만 까이는 게 아니라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 같은 책도 여기서 여지 없이 까인다.) 서구 문명은 고대 그리스 이래 이성(reason), 변증(dialectical reasoning), 이론과학(theoretical science), 시민권(citizenship), 민주정치(democratic politics)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왔고, 동양 문명에는 이런 것이 결여돼있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이 동양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봤자 그것은 제한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예를 들어 서양에는 이미 고대 그리스 유클리드 시절부터 증명이라는 개념이 확고했는데, 중국에는 증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는 것, 서양은 일찍부터 자기를 초월하려는 욕구, 잘못된 것과 투쟁하여 끝장을 보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동양은 운명에 순응하고 조용히 살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 등등.)
솔직히 동양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서양 특유의 공격성과 호전성을 찬양하는 것, 현재의 안온한 유럽문화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 정치적으로 이 책의 저자가 다문화주의의 반대편에 서있다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의 주된 부분인 '서구 문명의 독창성'이란 가설에 한해서는 조셉 니덤 교수의 책보다 리꺄르도 뒤셰엔느 교수의 책이 이론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엽적인 과학발명 몇 가지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게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서양문명이 전통적으로 진리성과 확실성을 그 극한까지 추구한 반면, 동양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동양문명은 전후모순 없이 완벽한 이론보다, 대세를 점한 자, 서열 높은 자가 소수자, 서열 낮은 자를 세력과 권위로 짓누르는 테크닉만 비대하게 발전시켰다. 시시비비를 칼 같이 가리고 실사구시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진취적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 젊은 시절 동양과 서양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의 입장에서, 왜 동양은 서양에게 19~20세기 동안 그렇게 철저하게 밀릴 수밖에 없었는지, 왜 동양은 아직까지도 서양의 모방자, fast follower 역할에 그치고 있는지를 이 책은 너무나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최근에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에 관해서 어느 교수님과 잠깐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른바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교수님이었는데, 그 분께서는 아직도 케케묵은 조셉 니덤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추종하고 있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이 원래 모든 면에서 서양에 앞서고 있었으며, 서양이 동양을 잠시 지배한 것은 서양문명의 폭력성과 야비함때문이었고, 서양문명은 이제 곧 몰락할 것이며, 이제는 동양의 시대, 중국과 한국의 시대가 곧 도래할 거라나?
그런데 내가 볼 때 서양문명이 결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밤낮 대의명분이나 찾아대며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시비나 합리적 의심조차 억압하고 단결과 통합만 외치는 수준이라면, 앞으로 동양문명은 서양문명을 결코 압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리꺄르도 뒤셰엔느란 사람의 우익적, 인종주의적 성향에 대해서는 반드시 경계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앞으로 동양의 시대, 대한민국의 시대가 활짝 열릴 것이라고 자신하시는 분들께서는 우리 동양의 약점을 악착같이 지적하는 리꺄르도 뒤셰엔느 교수의 책도 한번 참조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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