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커버리제도에 관한 단상
대륙법계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의 제출을 강제당하지 아니한다(Nemo tenetur contra se edere)”는 것이 기본원칙이다. ‘모색적 증명(Ausforschungsbeweis)’ 역시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법상 ‘pre-trial discovery’ 같은 제도는 아무래도 우리 법제에서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 소송에서 중요한 증거가 구조적으로 편재되어 있는 경우 당사자 지위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사건이나 자동차 급발진으로 인한 사망사건의 경우처럼 소비자의 입장에서 제품하자의 증명이 용이하지 않은 경우, 가해자로 의심되는 회사가 내부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관련 자료를 소비자 측에 제출하게끔 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디스커버리제도가 갖고 있는 약점이다. 미국에서는 아주 많은 회사들이 디스커버리제도에 대응하기 위해 도저히 읽을 엄두가 안 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를 제공해서 사실상 원고측 변호사의 기를 죽이는 경우가 흔하다. (한강에서 바늘 찾기?) 그로 인해 원고측 변호사가 그 많은 서류를 읽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분류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그로 인해 소송이 지연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원고 측에서 너무 많은 자료를 요구해대는 바람에 회사 입장에서 시간과 금전의 낭비가 심해질 때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커다란 종이상자들이 회사와 법무법인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엄청난 숫자의 증인과 전문인력이 동원되고 고액의 수임료와 소송비용이 낭비되고 있다. 물론 그 비용은 회사 측이 부담한다. 하지만 그 비용이 결국 상품가격에 반영되거나, 회사 측이 시간 끌기를 위하여 그 어떤 비용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소비자에게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혜택은 그닥 크지 않을 거라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각주: 이에 관해서는 Garner, Discovery and Related Motion Practice, Patent Litigation 1994, Bd. 1, p. 411.)
예를 들어 In re Japanese Electronic Products Antitrust Litigation 사건만 봐도 그렇다. 디스커버리제도를 원용한 결과, 수백만 건의 서류가 생산되었고, 이 서류를 다 읽고 분석하는 데 9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백 명이 넘는 증인들이 태평양을 오가며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해야 했다. 원고 1인이 한번 찔러나 본다는 생각으로 문제제기하였다는 이유 하나로, 넓은 땅덩어리의 모든 바위 밑을 들춰보고, 모든 집의 침대 밑을 들여다보고, 모든 나무 위 모든 나뭇잎을 만져가며 샅샅이 뒤져야 했다. 그런데 그 결과, 고작 아무것도 없더라는 사실, 또는 이건 어차피 법원에서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사실만 밝혀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사이에 발생한 어마어마한 비용을 과연 누구에게 전가해야 하는가?
이러한 점에서, 디스커버리제도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디스커버리제도의 이러한 부작용을 보완할 만한 대비책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첫째는 악의적으로 상대편에 너무 많은 서류를 제공하여 사실상 증거자료의 분석과 평가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의 모든 증명방해행위에 대한 제재이다. (예를 들어 사실상의 추정효과 등.) 그리고 둘째는 디스커버리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증명이 안 될 것 같거나 경제적으로 디스커버리가 그닥 효율적이지 않은 사안의 경우 그 비용을 감안하여 디스커버리 자체를 아예 못하게 하는 규정의 도입이다.
물론 이러한 보완장치를 마련할 경우 디스커버리가 약화되거나 유명무실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을 놓고 보면 모든 경우에 디스커버리제도가 꼭 비효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디스커버리제도를 통해 정보가 더 투명하게 공개되고, 당사자의 지위가 실질적으로 더 평등해지며, 실체적 진실이 보다 더 빨리 발견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따라서 이렇게 예외적 보완장치를 마련할 때 오히려 디스커버리제도의 도입이 보다 더 용이해지고, 우리 법현실에 디스커버리제도가 더 쉽게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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