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통적 물권관념


1) 개 요 : 옛날의 우리나라에 물권개념 같은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문과 신분계급에 근거한 세습적 특권이 물건소유에 관한 권리개념을 현저히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옛날의 우리나라는 왕권과 중앙권력이 고질적으로 허약했고 국가의 행정력이나 재정력도 그리 뛰어나지 않아, 각 고을의 유력 양반가문들은 거의 배타적 소유권에 가까운 토지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그 토지지배권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신분질서였지, 물건의 효율적 이용과 처분을 위한 합리주의 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富)가 지주계급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며,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와 각종 비합리적인 폐습이 자본의 발전ㆍ축적을 막았기 때문에, 소유권제도가 계층이동과 사회변화의 역동성을 촉진하긴커녕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2) 사적 소유권의 인정 :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중국ㆍ일본ㆍ한국에서 사적 소유권의 보장은 이미 중세 시기부터 상당히 진전된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농경지는 거의 사유화되어 있었고, 유력가문들은 대역죄(大逆罪)를 저지르지 않는 한, 자기 소유 농지에 대해서 사실상 절대적인 지배권을 보장 받고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왕토사상(王土思想)’이 강했기 때문에, 국왕은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에 대하여 궁극적인 관할권을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관할권은 공적인 관할권에 불과했고, 관념적인 권리에 불과했다. 국가가 소유한 공전(公田)의 경우 수조권(收租權)이라 하여 사인에게 한시적 용익권만 인정하였으나, 그 수조권은 사적 처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사실상 사적 재산권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경지는 사전(私田)이었는데, 그 사전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양반계급은 소작인을 심하게 수탈하는 등 온갖 특권을 남용하면서도 조세와 병역의 의무를 면제 받는 등 사회적 책임은 전혀 부담하지 않았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공전의 비중이 꽤 높았으나, 이 비율은 계속 낮아져서,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의 농경지가 사유지에 속했다. 예를 들어 1918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전체 토지의 97% 가까이가 민유지로 집계되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일반적 편견과 달리 사적 소유권이 오랜 시기에 걸쳐 상당히 폭넓게 인정되었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적 소유권의 한계 : 옛날 우리나라에서 농지와 임야 등에 대해 사적 소유권을 가졌던 자들은 그 토지 등에 대해서 당연히 사용ㆍ수익의 권능을 가졌고, 심지어는 상속(相續)의 권능도 인정을 받았다. 조선초기까지는 토지소유권에 매각처분의 권능이 원칙적으로 부정되었지만, 실제로는 토지매매가 공공연하게 행해졌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토지매매에 대한 제한이 사실상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사실상 이렇게 폭넓게 인정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농업생산력은 계속 낮은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양반계급은 신분적 특권에 힘입어 그 토지지배권을 영속적으로 보장 받을 수 있었지만, 평민과 천민계급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보호막 같은 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반계급은 상민계급에 대해서 언제든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도 가혹한 사형(私刑)을 가할 수가 있었다. 또한 도덕적 논의가 법리를 압도하는 사회풍조 속에서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았다거나 유교적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재산을 몰수 당하는 일은 각 고을에서 흔한 편에 속했다(조선 근대화 초기의 자생적 자본가가 기득권과 기층민의 비겁한 담합에 의해 희생양으로 절멸되는 과정은 영화 ‘혈의 누’에서도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음). 심지어는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사적 폭력에 의해 가옥이 파괴되거나 토지를 몰수 당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따라서 양반계급에 속하지 않은 자들에게 소유권이란 그저 몰락의 화근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물론 양반이라 하더라도 중앙관료조직에 혼맥과 인맥이 닿지 않아 힘이 없는 양반들은 거의 평민이나 다를 바가 없는 위치였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부패ㆍ횡포도 극심했기 때문에, 힘 있는 가문을 배경 삼지 않는 이상, 갑작스러운 관재(官災) 앞에 소유권은 그저 유명무실한 방패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4) 지주ㆍ소작제의 보편화 : 대부분의 사유지를 자작농(自作農)이 아닌 각 지역의 양반지주들이 독점하였으며, 소작료가 지나치게 비쌌다는 점도 큰 문제였다. 실제로 조선의 농민들 가운데 자작농의 비율은 매우 낮았으며,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小作農)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물론 조선 건국 당시 토지재분배를 통해 균질적 자작농 중심의 경제체제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대부분의 토지는 소수의 양반지주계급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게 직접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양반계급이 신분적 특권을 이용해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하자, 대다수 농민은 어차피 열심히 노동하더라도 부를 축적할 수 없으니 차라리 게으르게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5) 비합리적인 폐습 : 조선 후기에는 이모작(二毛作)과 수도작(水稻作)이 늘어나면서 근검절약하고 이재(理財)에 밝아 약간의 재산을 모은 자작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시장이 발달하면서, 상인들도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힘들게 벌어들인 재물의 대부분을 자기 가족이 아니라, 뼈대 깊은 양반집 유지들이나 사랑채에 머무는 식객들을 위해 소비해야 했다. 마을유지들과 양반들에게 잘 보여야 사형(私刑)을 피할 수 있으며, 매일 같이 찾아오는 식객들의 입소문에 의해 가문의 좋은 평판이 유지되어야만 가문의 생존이 보장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부자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화려한 잔치를 벌여야 했고, 풍물패와 광대패를 부르고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떡을 나눠주며 재산의 대부분을 정기적으로 낭비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물질이 합리적으로 관리되고 인간의 물질적 생산력과 물질적 생활수준, 그리고 물질에 대한 과학적 인식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양반들은 어차피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거나, 권문세가와 혼맥으로 연결되기만 하면, 상민들에게서 아무때나 재물을 몰수해올 수 있었기 때문에, 물질적 재산경영의 문제를 법적으로 규율하고 물질의 이치를 과학적으로 궁구하는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는 인맥ㆍ연줄을 챙기거나, 유교경전의 맹목적 암기를 통해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일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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