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거절 (Erfüllungsverweigergung)
이행거절(履行拒絶)이란 채무의 이행이 가능한데도 이를 행하지 않겠다고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종국적 의사를 표시하여 채무자의 임의이행을 채권자가 객관적으로 기대할 수 없게 된 사안을 말한다(梁彰洙/金載亨, 403면). 독일어로는 이러한 이행거절을 ‘Erfüllungsverweigerung’이라 하고, 프랑스어로는 이를 ‘refus d'exécution’이라 하며, 영어로는 이를 ‘refusal to fulfil’이라 한다. 비록 명문규정상 근거는 없지만, 우리 판례는 이미 2005년부터 이러한 이행거절의 사안에 채권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해왔다(大判 2005.8.19, 2004다53173).
* 독자적 채무불이행유형으로서의 이행거절 : 일부 견해는 이행거절의 사안이 이행지체와도 구별되고, 이행불능과도 구별된다면서, 이행거절을 독자적인 채무불이행의 한 유형으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梁彰洙, 독자적인 채무불이행유형으로서의 이행거절, 민법연구 제4권, 133면 이하; Leser, Die Erfüllungsverweigerung. Ein Typ der Leistungsstörungen, in Ius privatum gentium. Festschrift für Max Rheinstein zum 70. Geburtstag II, 1969, 643 s.). 채무자에게 임의이행을 기대할 수 없어 바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이행불능과 같지만, 급부이행이 객관적으로 가능하고 채권자는 다른 채무자를 구하여 대체거래Deckungsgeschäft를 할 수도 있는 이상 이행불능 사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이행기 도래 전에 벌써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행거절은 이행지체 사안과도 다르다. 하지만 이행거절의 사안에서도 이행기가 도래하면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해 급부실현을 강제할 수 있는 이상, 이행거절과 이행지체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宋德洙, 109면; 池元林, [4-153]). 따라서 이행거절을 이른바 ‘선취(先取)된 이행지체’로서 이행지체의 하부유형으로 파악하면 될 뿐, 이행거절을 특별히 독자적 채무불이행유형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池元林, [4-153]). 이행거절 사안에 대한 우리 현행민법의 흠결은, 독일민법 제281조 2항과 같이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그 급부의무이행을 본격적ernsthaft이고 종국적endgültig으로 거절한 경우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하여 기한을 정한 최고를 하지 않아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거래현실에서는 이행불능보다도 이행거절의 사안이 훨씬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Ulrich Huber, Leistungsstörungen, Bd. I, 1999, S. 16). 대개는 채무자가 계약의 불성립·무효·취소·해제·해지를 주장하는 경우에 자주 문제되는데, 아무리 잘 알아 듣게 설명해도 채무자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완강한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채권자의 입장에서는 이행기까지 기다리거나 채무자에 대해 기한을 정한 최고(제395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경우에는 채무자가 기한의 이익을 상실했다거나(제388조), 지체 후의 이행이 채권자에게 이익 없게 됐음(제395조)을 증명한다는 것조차 채권자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일이 된다. 채무자에게 바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더라도 소액의 지연배상(遲延賠償)만 청구하는 것으로는 채권자에게 부족하다(아직 이행기가 도래하지 않은 이상, 지연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어차피 법리적으로 불가능함). 이 경우에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하여 곧바로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 즉 전보배상(塡補賠償)을 청구할 필요가 있다.
이행거절의 요건이 충족되려면, 채무자의 본격적이고 종국적인 이행거절을 채권자가 증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채무자가 근거 없이 계약의 무효, 취소 또는 해제를 주장하면서 채권자의 반대급부 수령을 거절하는 경우에 이러한 이행거절의사의 묵시적 표시를 인정할 수 있다(大判 2005.8.19, 2004다53173). 채무자가 자기 채무를 아직 다 이행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미 다 이행했다고 주장하면서 반대채무의 이행을 구하는 제소까지 한 경우도 그와 같다(大判 2014.10.6, 2014다210531). 채무의 이행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아도 된다.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하여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이행을 최고(제395조)할 필요도 없다. 설령 쌍무계약관계라 하더라도,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하여 자기 채무의 이행을 제공(제460조; 제536조)함이 없이 채무자의 이행거절을 주장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이행거절은 종국적이어야 하므로, 단순히 “지금은 이행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은 이행거절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본다(OLG Düsseldorf 10.2.1994).
* 이행거절의 위법성 : 이러한 이행거절을 근거로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바로 전보배상을 청구하려면 채무자의 거절표시가 위법unberechtigt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근 주민의 민원으로 인해 매매계약이 그 본래 내용대로 효력을 유지시킬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매수인의 계약변경 요청이 있었고, 매도인이 이에 응하여 계약변경 가능 여부를 타진하겠다고 답변하였다 하더라도, 매수인이 이를 근거로 잔금지급을 계속 지체하였다면, 매도인은 적법하게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매도인이 계약변경 가능여부를 타진하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관계 행정기관의 협조요청과 매수인의 요구를 감안한 매도인의 시혜적 조치로서 매수인의 잔금지급의무를 유예할 만한 정황이 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 매도인의 계약해제는 적법하므로, 매수인은 매도인의 이행거절을 근거로 매도인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된다(大判 2015.2.12, 2014다227225).
* 이행거절표시의 철회 : 이행거절의 요건을 잠시 충족했다 하더라도, 채무자가 이행거절의 의사표시를 적법하게 철회하였다면,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하여 전보배상을 청구하거나 계약을 해제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건설수급인인 채무자가 공기를 지연하고 부당하게 보수증액을 요구하였으며 보수증액에 관한 채권자와의 협의를 결렬시켰다 하더라도, 채권자의 작업중지통보 후에 채무자가 다시 채권자의 요구대로 합의할 것을 회신하였다면, 이행거절은 없었던 것으로 본다(大判 2003.2.26, 2000다40995).
이행거절의 효과로, 채권자는 채무자의 이행거절 즉시 전보배상, 즉 급부에 갈음한 손해의 배상청구권을 갖게 된다. 이때 손해액의 산정은 이행거절 당시의 급부목적물 시가를 표준으로 해야 한다(大判 2007.9.20, 2005다63337). 물론 채권자는 전보배상을 청구하는 대신 계약을 해제하고 채무자에 대하여 반대급부의 반환을 청구할 수도 있다(제544조 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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