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위험 당사자부담의 원칙
1) 의 의 : 모든 계약은 자기 책임·위험 하에 체결된다. 상대방이 계약을 위반할 위험, 그 상대방에게 자력이 없게 될 위험 등은 모두 그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한 일방이 부담한다. 계약당사자가 그 계약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3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로마법에서는 이를 ‘Res inter alios acta(남들끼리 정한 일)’ 원칙이라 일컬었다. 남들 체결한 계약에 나를 왜 끌어들이냐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Socii mei socius(내 동업자의 동업자)’ 원칙이라고도 한다. 내 동업자의 동업자라고 해서 내 동업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2) 취 지 : 우리는 정상적 의사표시로 유효하게 체결한 계약 속에서, 상대방에게 법적·사실적 반대급부를 모두 제공하고 얻은 이익을 우리의 정당한 이득으로 신뢰하며 살아간다. 물론 내가 계약상 이익을 얻기 전까지 그와 관련하여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계약의 연쇄로 엮여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다른 계약관계에서 급부장애나 계약위반이 발생하였음을 근거로 내가 이미 정당하게 취득한 계약상 이익이 반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와 같은 반환책임이 인정된다면, 모든 계약당사자는 자동으로 계약상대방의 보증인이 되어 그 상대방이 수많은 제3자들과 체결한 계약의 위반 여부에 대해 무한대의 보증책임을 부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러한 보증책임이 다단계의 계약연쇄를 타고 끝없이 확장될 경우, 각 경제주체에게 가계위험 및 사업위험의 합리적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또한 이러한 강제적 보증책임을 악용하려는 무자력자들의 도덕적 해이도 기승을 부리게 된다.
3) 적용범위 : 계약위험 당사자부담의 원칙에 따르면 계약위반에 따른 책임을 제3자에게 묻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설령 그 제3자가 그 계약으로써 사실적 이익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제3자가 사해행위를 하거나 배임행위에 적극 가담한 게 아닌 이상, 그 제3자의 사실적 이익은 불법도 아니고 부당이득도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계약 자체가 그 제3자로 인하여 체결된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제3자가 계약 당사자를 기망하거나 계약 일방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게 아닌 이상, 그 제3자는 그 계약체결에 단순한 동기를 제공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계약당사자가 자기들 아닌 제3자에게 의무를 부과하도록 계약을 체결했다 하더라도 그 계약은 무효이다. 그러한 계약을 통하여 당사자가 그 제3자의 자유를 자의적·직접적으로 침해한 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어떤 계약이 해제되더라도 그에 따른 청산 및 뒷처리는 그 계약의 당사자들끼리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그 계약이 해제되었고 그에 따라 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그 계약 바깥의 제3자와 상관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4) 실제적 예 :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 민법은 당사자 일방이 계약을 해제할 때 각 당사자는 그 상대방에 대하여 원상회복의 의무가 있지만, 그러한 해제로써 제3자의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 하고 있다(제548조 1항 단서). 여기서 제3자는 그 계약해제 전에 이미 새로운 이해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등기·인도 등으로 완전한 권리를 취득한 자인데, 그러한 제3자에게 계약상대방의 채무불이행 및 무자력 등에 따른 위험을 전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법원은 계약에 의한 급부가 제3자에게 이득으로 귀속되는 동안 계약일방인 급부자가 계약상대방한테서 반대급부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급부자가 그 제3자에 대하여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大判 2005.4.15, 2004다49976). 제3자는 최소한 그 계약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정당한 이익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 소속 화물차량 운전자가 그 회사의 화물운송사업에 이용하기 위하여 주유소로부터 유류를 공급받고도 그 주유소에 대금결제를 하지 않았는데, 그 운전자가 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사용한 유류 덕분에 그 회사가 화물운송사업상의 이익을 얻은 경우가 그와 같다. 이때 그 회사에 대하여 주유소가 직접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할 수 있다고 보면, 그 운전자가 자기 책임하에 체결된 계약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3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되어 계약법의 기본원리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이때 주유소는 그 운전자에게 대금을 청구할 수 있을 뿐, 그 운송회사에게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할 수 없게 된다(大判 2010.6.24, 2010다9269). 또한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상대방의 지시 등으로 급부과정을 단축하여 상대방과 또 다른 계약관계를 맺고 있는 제3자에게 직접 급부를 하는 경우(이른바 삼각관계에서 급부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제3자를 상대로 직접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할 수는 없다는 게 우리 법원의 입장이다. 이때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급부를 한 원인관계인 계약이 해제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허용한다면, 계약 당사자가 자기 책임 아래 체결한 계약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3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大判 2018.7.12, 2018다204992).
* 연속하청과 파견계약의 문제 :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는 대기업이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바탕으로 하청기업에게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강요하거나, 종업원을 하청기업 또는 파견·용역업체 소속으로 내려보내서 임금을 후려치고 편법해고를 하는 등 경제적 지대를 취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 다단계식 착취구조에 계약위험 당사자부담의 원칙을 형식적으로 적용할 경우, 사업이익을 독점하는 대기업이 정작 그 사업위험은 연속하청이나 간접고용을 통해 밑바닥 하청업체나 파견·용역업체에게 떠넘기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원청업체가 혹시 하수급인 또는 하도급·파견 근로자와 실질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는 아닌지 여부를 검토하여 그 계약위험을 부담하게 할 필요가 있다.
4) 유사한 문제 : 계약위험이 당사자 아닌 제3자에게 예외적으로 부담되는 듯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계약일방과의 불공정거래(제104조)로 취득한 목적물을 계약상대방이 제3자에게 다시 급부목적물로 제공하여 제3자가 이를 수령한 경우가 그러하다. 이때 그 불공정거래의 무효를 확인하고 그 물건의 반환을 청구(제213조)하는 원소유자는 설령 그 물건이 제3자에게 넘어갔다 하더라도 그 물건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설령 제3자가 그 계약무효에 대하여 선의였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민법은 이러한 불공정행위에 의해 상실된 소유권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보며, 이 경우 선의 제3자를 희생해서라도 원소유권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적 의사표시에 의해 체결된 계약의 경우 그 표의자가 악의의 제3자에 대해서 그 무효·취소를 대항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그와 같다(제107조 1항; 제108조 2항; 제109조 2항; 제110조 3항 등).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계약상대방의 채무불이행위험이나 무자력위험과는 무관한 문제이므로, 이것이 계약위험 당사자부담 원칙에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는 모두 계약의 무효·취소에 의해 그 계약관계의 뿌리 자체가 뽑혀버린 경우이므로, 이를 계약위험의 제3자 전가에 해당한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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