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실책임의 원칙


1. 과실책임원칙의 근거 : 우리 법은 기본적으로 모든 손해는 피해자가 일단 감수해야 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모든 사람이 자기 손해는 자기가 부담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건전한 법정책일 것(“Sound policy lets losses lie where they fall except where a special reason can be shown for interference.”: Holms, The Common Law, 1881, p. 50)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손해배상청구는 단지 손해의 부담 전가에 그칠 뿐, 손해 자체를 사회 전체적으로 제거하거나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손해 부담 전환은 추가적인 소송비용, 시간적 자원 낭비, 사회적 마찰 등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 정당성을 확보해 줄 특별한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특별한 이유는 가해자의 과실Verschulden, 즉 유책성Schuldhaftigkeit에서 도출된다. 과실 있는 가해자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해자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리에서 도출되는 원칙이 바로 과실책임verschuldensabhängige Haftung의 원칙이다.

2. 과실책임원칙의 효용성 : 과실책임원칙은 행위자가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여 행동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행위주체에게 효율적 행동유인incentive to efficient behavior을 제공한다. 과실책임원칙이 없다면 극단적 결과책임주의가 만연하거나 손해가 개인화 또는 운명화될 것이고 각 행위자의 신중성이 사라지며 도덕적 해이가 일반화될 것인 데 반하여, 과실책임원칙은 각 행위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로써 사고예방비용과 사고피해의 총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Guido Calabresi, The Costs of Accidents, 1970)). 또한 과실책임원칙은 행위자가 위험을 내부화하게 함으로써 효율적 자원배분을 촉진하기도 한다(Richard Posner, A Theory of Negligence Journal of Legal Studies, 1972). 각 행위자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만들면 불필요한 사고가 줄어들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최소화된다는 뜻이다.

3. 과실증명의 요구 : 불법행위법에 있어서는 과실의 증명책임이 가해자에게 부담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부담되는 것이 원칙이다. 다시 말해, 가해자에게는 일단 과실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게 원칙이다. 예를 들어 고객이 많아 몹시 붐비는 상가건물 계단에서 누군가 커피를 마시며 내려가고 있었는데 옆에 급히 지나가던 사람의 흰색 고급 드레스에 그 커피가 쏟아져 드레스가 오염되었다면, 그 드레스 입은 사람이 그 커피 마시던 사람의 과실로 자기 드레스가 오염되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4. 과실의 증명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는 이유 : 가해자의 귀책사유를 피해자가 증명하게 하는 이유는, 가해자의 과실이라는 것이 대부분 가해자의 행위 당시 그의 내심적 주의수준에 달려 있어 자신이 충분히 주의했다는 것을 가해자 측에서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힘든 반면에 사고를 가장 생생하게 경험하는 피해자는 가해자보다 객관적 위치에서 가해자의 과실 증거를 더 예리하게 포착하리라 가정하는 데 있다. 또한 사고예방이 가해자 혼자만의 부담은 아니고 가해자와 피해자 쌍방 공동의 부담이라는 점도 여기에 고려된다. 가해자의 과실을 증명하지 못하는 피해자는 배상도 받지 못한다는 원칙이 확립될 경우 피해자 역시 사전에 주의를 기울이며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하게 되고 그로써 사고 자체가 줄어든다는 것이다(Steven Shavell, Strict Liability versus Negligence, 1980; Louis Kaplow, Rules versus Standards: An Economic Analysis, 1992). 만약 피해자에게 증명책임이 없다면, 모든 사고가 곧장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고, 억지 주장만으로 보상받으려 하거나 피해를 더 확대하려는 유인이 생길 것이다. 이 경우 각 경제주체는 자기 무과실을 증명하기 위해 방어소송을 해야 하고, 소송비용은 폭증할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과실 증명책임을 부과하면, 피해자는 소송 전부터 자신의 승산을 평가하게 되고 가해자의 과실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는 경우에만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제도의 자원 낭비를 줄이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거래비용을 절감하게 된다.





댓글 1

청계천8가
청계천8가
과실책임의 원칙은 19세기 말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나 통용되던 법원칙으로,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극대화하고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려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할 뿐입니다. 이미 20세기부터 과실책임의 원칙은 폐기되었습니다. 가해자의 과실증명 없이 손해배상책임 없다는 과실책임원칙은 사실상 모든 손해를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에게 귀속시키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약자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불의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해의 개인화'와 '피해자 귀책'의 강조는 민중의 삶을 외면합니다. 교수님은 "손해배상청구는 단지 손해의 부담 전가에 그칠 뿐, 손해 자체를 사회 전체적으로 제거하거나 감소시키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며, '추가적인 소송비용, 시간적 자원 낭비, 사회적 마찰'을 언급하시지만, 최근 기계 끼임, 과로 등으로 노동자 사망사고가 잇달아 발생한 SPC 공장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께서 격노하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히 대기업의 불법행위나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대규모 피해 등은 결코 개인의 운명이나 단순한 시장 효율성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법적 구제와 가해자에 대한 제재는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와 법의 역할은 단순히 '비용 절감'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과실증명책임을 피해자에게 전적으로 부과하는 것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장치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근거로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객관적 위치에서 증거를 더 예리하게 포착하리라 가정'한다거나, '사고 예방이 가해자와 피해자 쌍방 공동의 부담'이라는 점을 들고 있지만, 정보와 증거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낮은 소비자,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가해자(기업, 고용주 등)의 과실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기업의 결함 있는 제품으로 인한 피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 등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내심적 주의수준'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억지 주장만으로 보상받으려 하거나 피해를 더 확대하려는 유인'을 막겠다는 명목 아래, 정당한 피해자조차 구제받기 어렵게 만들려드는 교수님의 주장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반민중적인 시각의 발로입니다.

교수님의 글은 현대 법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성을 외면하는 위험한 인식을 드러냅니다. 산업화 이후 대규모 사고의 발생, 기업의 사회적 책임 증대, 그리고 불평등 심화라는 현실 앞에서 현대 법은 이미 과실책임원칙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과실책임원칙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책임 원칙을 확대 적용해 왔습니다. 특히 제조물 책임, 환경 책임, 사용자 책임 등에서 가해자의 과실이 없어도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경향이나 최근 제정된 노란봉투법에서 노사관계 사용자의 범위를 확대한 것은 바로 교수님께서 극우적 보수적 수구적 사고방식으로 외면하시는 초기 자본주의적 사고를 극복하려는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법의 진정한 효용성은 소송비용 절감이나 효율적 자원 배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의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정의를 구현하며, 모든 민중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데 있습니다. 교수님의 글은 이러한 인권 감수성과 진보적 관점을 도외시한 채, 과거의 한정된 법리만을 절대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더 이상 법을 특정 이념이나 효율성 논리에 가둬두지 마시고, 법이 모든 이에게 공정하고 따뜻한 빛이 되도록 근본적으로 성찰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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