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재정손실
1. 로마법에서 손해 개념은 신체corpus 또는 물건res에 대한 가시적 침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손해란 ‘어떤 실체 있는 이익의 감소’를 의미했고, 이는 대부분 유형적 손해였다. 이러한 관념은 산업화 이후에도 유지되어 교통사고로 인해 보행자가 부상당하거나 차량이 파손되는 것, 화학 공장에서의 폭발로 인해 인명피해가 발생하거나 그 공장설비 및 인근 주택이 부서지는 게 대표적 손해로 취급되었다. 고장난 주방기기로 인한 감전 사고, 놀이기구 추락 사고, 건물 담장 붕괴 사고 등으로 사망자 또는 부상자가 발생하는 것도 대표적 손해였다. 다시 말해 사고Unfall로 인한 인명·신체 또는 물건의 피해가 과거에는 손해 개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2. 물론 손해는 반드시 사람의 신체나 물건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신체 또는 물건에 대한 침해가 없더라도, 순수 재정손실reiner Vermögensschaden 역시 손해로서 문제될 수 있다. 예컨대 금융기관이 잘못된 신용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제3자가 지급불능 상태의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어 손실을 입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재정손실은 이른바 시장위험market risk에 속하는데, 자유시장경제의 이념과 계약자유의 원칙 아래에서 이러한 시장 위험은 각자가 스스로 부담해야 할 몫에 해당한다. 따라서 단순한 금전적 손실은 개인의 책임 아래 발생한 위험으로 간주되고, 계약상의 이행이익Erfüllungsinteresse이 아니라면 이러한 금전적 이익을 법으로 보호할 수는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3. 그러나 오늘날 산업의 중심이 정보와 서비스산업으로 이동하고 디지털 금융 경제가 확대되면서 금전적 이익이 중시되고 고도의 지능형 경제범죄에 의한 시장교란이 늘어나면서 거래질서가 강조됨에 따라 새로운 환경에서 재정손실을 보호하기 위한 법규들이 많이 제정되었다. 그러한 법규의 취지에 따라 오늘날은 순수 재정손실 역시 손해의 범주로 점점 더 많이 편입되는 추세에 있다.
* 순수 재정손실이 불법행위법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는 이유 : 순수 재정손실은 예를 들어 회사의 경영진이 허위의 수주 계약 체결 사실을 발표하여 주가가 일시적으로 상승한 뒤 그 허위가 밝혀져 주가가 하락하는 경우, 언론 보도로 인해 기업의 제품 매출이 감소하는 경우, 은행 직원에게 서명 위조의 전력 있음이 드러나 해당 은행의 신용이 실추되어 조달금리가 상승하는 경우 등에 발생한다. 만약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계약관계가 없다면 이러한 사안에서 직접적 권리 침해는 없고 단순히 경제적 손실이 일어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위법성의 근거는 불명확하다. 또한 재정손실은 그 성질상 파급효과가 불특정 다수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광범하게 미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또한 재정손실은 그 발생경위와 결과가 간접적이며 복잡한 인과관계를 통해 실현되므로, 행위 당시 예견가능성이나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주의의 구체적 내용을 설정하기가 곤란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재정손실은 원칙적으로 불법행위법상 손해 개념에서 배제되고 있다.
* 순수 재정손실이 불법행위법에서 보호되는 범위 : 20세기 이후 산업경제는 전통적 제조업 기반에서 정보·신용·금융·데이터 중심의 서비스경제로 전환되고 있다. 기업 자산의 대부분이 무형자산intangible assets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회계적으로 브랜드 가치, 평판, 영업비밀, 알고리즘, 고객 데이터 등의 가치는 더욱 상승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금전적 이익 및 거래관계 자체가 기업의 핵심 자산이자 생존 기반으로 기능하며, 이에 대한 침해는 단순한 기회상실을 넘어 실질적 손해와 경쟁력 상실로 직결되고 있다. 게다가 디지털화된 금융경제에서는 하나의 정보 오류가 직접적 계약당사자를 넘어 수많은 투자자나 이해관계자에게 순식간에 확산되는 체계적 위험systemic risk이 존재한다. 특히 정보의 비대칭성과 금융범죄의 지능화는 거래상대방뿐 아니라 다른 거래참가자들까지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노출시키기 때문에, 자본시장법, 부정경쟁방지법, 전자금융거래법, 개인정보보호법 등 현대의 여러 규제법규는 그러한 정보제공자나 중개인의 책임을 점차 강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종래 시장위험 또는 계약상 급부장애로만 취급해 왔던 금전적 손실 역시 공법의 보호대상으로 더욱 많이 편입되고 있다.
교수님은 순수 재정손실을 '자유시장경제의 이념과 계약자유의 원칙 아래에서 각자가 스스로 부담해야 할 몫'으로 간주했고, '단순한 금전적 손실은 개인의 책임 아래 발생한 위험으로 간주'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과거의 '배제 원칙'을 설명하는 논리에서 약자에 대한 법적 보호의 의지가 미약하거나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교수님의 가치관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책임 아래 발생한 위험'이라는 표현은 사회 위험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논리입니다. 정보의 비대칭성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순수 재정손실은 개인이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의 잘못된 신용정보 제공'으로 인한 손실은 과연 전적으로 개인의 '시장위험'으로만 치부될 수 있을까요? 정보 접근성이 낮고 법률 지식이 부족한 민중은 이러한 '시장위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과거 법이 이러한 손실을 외면한 이유를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에서 찾은 것은, 결과적으로 강자의 논리를 대변하고 약자의 피해를 묵인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는데, 교수님의 글을 읽어보면 모든 글에서 이를 당연시하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교수님의 법적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합니다. '위법성의 근거 불명확성', '불특정 다수에게 미치는 광범한 파급효과로 인한 법적 안정성 및 예측가능성 침해 우려', '복잡한 인과관계와 예견가능성 설정 곤란' 등의 이유들은 피해자 구제보다는 가해자의 책임 제한과 법 체계의 편의성을 우선시하는 시각으로 보입니다. 법의 역할은 단순히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데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금융 경제 시대의 '체계적 위험'이나 '지능화된 금융범죄'는 그 본질상 광범위하고 복잡한 인과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복잡성을 이유로 피해 구제를 주저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에 민중이 무방비로 노출되도록 방치하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