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스승이신 조규창 선생님께서 이번에 《로마법사》라는 책을 새롭게 내셨습니다.
이 책은 선생님께서 평생 축적해온 로마법 연구를, 《로마법》·《로마형법》에 이어 하나의 완결된 '로마법 3부작'으로 마무리하신 결과입니다. 로마 건국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이르는 1,300년의 시간 동안, 로마의 정치·군사·경제·사회·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로마법이 어떻게 형성·발전·변형되었는지를, 시대별‧주제별로 꼼꼼하게 그려내신 방대한 저작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이것이 단순한 '법률 연대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공화정기의 평민권 투쟁과 농지개혁, 속주 지배와 과세 체계, 군사제도의 개편과 제국 말기의 재정 파탄이 법제도의 내용과 법문화의 변질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각 법개념과 역사 서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 공화정 몰락의 원인은 도시국가의 구조적 한계였나 아니면 계급경제의 붕괴였나, 로마의 속주 지배는 약탈이었나 아니면 통합이었나, 로마의 노예제도는 비생산적 착취체제였나 아니면 합리적 고대 자본주의였나, 로마의 기독교 공인은 법문화의 진보였나 아니면 단절이었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개혁은 위기의 관리였나 아니면 제국 종말의 서막이었나, 중세 로마법의 부흥은 법의 재발견이었나 아니면 새로운 법의 창조였나 하는 무겁고 거대한 논점들이 수시로 제시되며 이에 관한 여러 견해의 충돌 자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학습 대상으로 부여됩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로마법이 다르게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로마법을 낳은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로마법을 둘러싼 학문사적 논쟁을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마리오 탈라만카, 빈첸초 아란죠-루이스, 안토니오 구아리이노, 프란체스코 데 마르티노 등 이탈리아의 저명한 법학자들이 로마법의 시대구분과 성격, 로마 시민법과 만민법의 관계, 고전기법학의 의의 등을 두고 벌인 치열한 논쟁이 곳곳에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저희 스승님의 지도교수였던 로마 사피엔짜 대학교의 피에트로 본퐌테 교수는 로마 공화정의 최고위 관직인 집정관이 왜 동료제였는지 설명하면서, 이러한 동료제는 군왕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민주적 제도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로마의 시초였던 로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 시절부터 이미 복수의 국왕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국왕동료제가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권력의 분점과 타협이야말로 로마의 전통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군의 깃발에 항상 그려져 있던 쌍날개 독수리 문양이 새삼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날카로운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를 가장 흥분시키고 감동시켰던 것은 프란체스코 데 마르티노 교수의 견해가 이 책에서 상세하게 소개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나폴리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로마법 교수로 재직했을 뿐 아니라 좌파 정당에 가입하여 정치인으로 활약해 이탈리아 부총리까지 올랐고 종신 상원의원까지 지냈던 그는 로마법과 로마역사를 종종 사회경제적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시각을 제공합니다. 특히 로마의 시민권 확대와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이나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 로마 공화정이 원수정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관하여 데 마르티노 교수가 기존의 통설을 뒤집고 예리하게 던지는 냉철한 견해는 우리에게 많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법학자들이 흔히 읽는 독일 법학교수들의 로마법 교과서는 상대적으로 기존의 통설을 충실하게 정리하는 데 더 주력합니다만, 이 책은 특정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세계 로마법학계 안에서 같은 로마법을 두고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음을 암시하며 현대 민법학 방법론의 뿌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여러 견해 대립을 풍부히 접하면서 우리는 로마법이 이미 완성된 과거의 법이 아니라 지금도 해석 평가가 계속 움직이는, 살아 숨쉬는 연구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고대 법학자들에 대한 서술도 매우 입체적입니다. 가이우스, 울피아누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등 우리가 이름만 들어 알고 있던 법학자들이, 어느 시대, 어떤 정치적 환경에서 어떤 학풍을 잇고 어떤 실무·이론 작업을 했는지, 사후에 어떻게 비판되었고 그들의 학문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이 책은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각 법학자의 출신과 성격, 사상적 성향과 대표 저작, 그리고 후대 로마법 전통 속에서의 위치가 하나의 인물사로 서술되어, 마치 고대 로마의 법률가들을 곁에서 보는 듯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특히 이 책에서 가이우스는 단순히 '로마법 입문서의 저자'로만 소개되지 않습니다. 원로원 귀족도, 고위 관료도 아니었으며, 공인해답권(ius respondendi)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는 실무가형이라기보다는 철저한 교육자형 법학자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했기에 그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사고에 강점을 가질 수 있었으며, 당시 법학의 주류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이론적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울피아누스는 이 책에서 가장 양가적으로 평가되는 인물인데, 그는 놀랍게도 로마 출신이 아니라 시리아 속주 출신이었지만 제국 관료로서 실무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황제권의 강화를 전제한 법학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법학자로서는 최고봉이었지만 결국 어느 병사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는 정의의 순교라기보다 군대와 행정조직을 통제하려던 관료적 시도가 빚은 갈등이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로마법학자로서 불의한 황제 명령을 거부하고 처형되었다는 이유로 그간 신격화되었던 파피니아누스는 이 책에서 체제 바깥의 저항자가 아니라 최고위 법률관료로서 제국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었고 순수한 양심에 의해서 순교했다기보다는 정치 내부의 논리에 따라 희생되었던 인물로 서술됩니다.
물론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은 약 천백여 페이지에 걸쳐 수많은 로마의 법개념 또는 법리와 사례를 읽기 힘든 라틴어와 함께 매우 자세하고 건조하게 서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 곳곳에는 미소를 자아내는 일화와 소소한 역사적 단편들이 종종 배치되어 있습니다. 로마 법률가들의 유머와 기지, 황제와 법학자 간의 긴장 관계, 제도 뒷면에 숨어 있는 법률가의 인간적 모습을 짐작케 하는 역사적 사실이 때때로 등장해, 방대한 분량의 법사학이 결코 딱딱한 연표가 아니라 그들 법학자라는 인간들이 구체적으로 살아냈던 이야기였음을 일깨워 줍니다. 예를 들어 사비누스 학파와 프로쿨루스 학파의 대립은 학문적 관점의 대립이라기보다 인맥과 계보에 따른 대립에 더 가까울 수도 있었다는 점, 공화정 말기부터 로마의 법률가들이 가상의 사례를 만들어 끝없이 “만약에? (quid si?)”라는 의문을 던졌는데, 실제 분쟁이 아닌 아무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법한 상황을 가지고 법률가들이 진지하게 논쟁했으며, 심지어 노예가 도망가다 번개를 맞아 죽은 경우, 주인이 노예를 해방하기로 약속했는데 해방 직전에 주인이 사망한 경우 등에 관한 사례를 갖고도 법학자들이 자기들의 사고근육을 단련하기 위하여 치열한 상상 실험을 하였다는 얘기 등이 이 책에 보면 가끔 나옵니다. 또한 고대 법학자들이 서로를 비판하는 문장이 자주 소개되는데, “○○의 견해는 존중할 만하나, 다소 지나치다.” 또는 “이는 학문적으로 흥미롭지만, 실무에는 부적절하다.” 같은 워딩이 당시 학계의 관행으로는 상당히 센 말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음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인명이나 지명이 알파벳으로만 표기된 게 아니라 한글로도 표기되었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합니다. 라틴어를 잘 모르는 분들께서는 예를 들어 Mucius라든가 Sulpicius라든가 Pactumeius라든가 하는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답답해 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그간 국내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로마법서가 라틴어 원어로만 이름을 표기했던 반면, 이 책은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이러한 이름을 전부 무키우스, 술피키우스, 팍투메이우스와 같은 한글로 표기하였습니다. 고대 라틴어 발음으로 표기해야 할 때는 고대 라틴어 발음의 한글로, 중세 라틴어 발음으로 표기해야 할 때는 중세 라틴어 발음의 한글로, 6세기 그리스어 발음으로 표기해야 할 때는 6세기 그리스어 발음의 한글로 표기하였으며, 이탈리아 인물, 프랑스 인물, 독일 인물의 이름도 원어 발음을 최대한 살려 한글로 표기하였습니다. 이렇게 전부 한글로 표기하니 가독성이 크게 향상되는 효과가 일어났습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고유 법사가 오늘의 민법 해석에 거의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한국 민법의 간접 법원인 로마법·게르만법에 대한 연구가 왜 여전히 필수적인지 강조하시고, 그 작업을 위해 평생을 건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조용히 회고하십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 책 《로마법사》는 로마법을 전공하는 연구자와 법학도에게는 물론, 로마사·서양고대사·고전문명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에게도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줄 책입니다. 법제도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로마의 정치와 사회, 경제와 문화가 입체적으로 보이고, 반대로 로마사의 굴곡을 따라가다 보면 그 속에서 법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했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저 역시 이 책의 원고 교정과 색인 작업에 조그만 힘을 보탠 제자로서, 선생님의 오랜 학문적 결실을 이렇게 소개할 수 있음에 큰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로마법과 서양 법문화의 뿌리를 알고 싶으신 분들, 그리고 오늘 한국 민법의 얼굴 너머 그 '심층 구조'를 보고 싶으신 분들께, 제 스승님의 이 새로운 책을 자신 있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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