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gel에 관한 정리 (2)


- 이하의 글은 2003년 7월 11일부터 2003년 9월 29일까지 저의 "개인낙서장"에 일곱편으로 나누어 게재했던 저의 Hegel에 관한 잡글을 거의 있는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드디어 나이 18세에 이르러 Hegel은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가 선택한 전공은 신학이었고, 그가 진학한 대학은 Tuebingen대학이었는데, 당시 Hegel이 진학한 Tuebingen대학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독일에서도 대단히 이름 있고 수준 높은 대학 축에 속하고 있었다. 원래 독일에서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대를 꼽는다면, 지금도 München대학, Heidelberg대학, Freiburg대학, Tübingen대학, Bonn대학, Berlin대학 등을 꼽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당시 독일에서 최고의 학문적 자부심을 자랑하고 있던 대학들은 주로 독일 남서부, 다시 말해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Baden-Württemberg지역에 위치한 대학들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예를 들면 Heidelberg대학, Freiburg대학, Tübingen대학 등), Tübingen대학도 그 중에 하나였다. (반면에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Hamburg대학은... -_-;; 그 당시에 아직 설립도 되지 않았으며, 당시 독일의 북부지방은 거의 학문적으로 불모지상태나 마찬가지였다... -_-;;).

그렇게 다른 독일지역에 대해서 문화적 우월의식을 갖고 있던 자기 고향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대학시절의 Hegel은 - 지금 생각해볼 때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 정치적으로 상당히 반독일적, 반Preußen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약삭빠른 장삿꾼, 거친 뱃놈들만 몰려있는 도시 Hamburg, 무식한 군바리, 충직한 병정들만 몰려있는 도시 Berlin, 그밖에도 대부분의 지역이 아직도 문맹의 농노들과 구닥다리 지방영주들로 가득차 있던 독일 북부지방에 비해본다면, 당시 Hegel이 살고 있던 독일의 남서부지방은 문화적으로 제법 많이 개화된 지역이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매우 자유롭고 밝은 분위기가 넘쳐 흐르던 지방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 당시의 많은 Württemberg지역 대학생들이 그러했듯이 Hegel 역시도 북독일의 Preußen 알기를 완전히 '무식한 곰탱이, 야만인들의 나라' 쯤으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같은 독일민족이긴 하지만 촌스럽고 거칠기 이를 데 없는 Preußen인들보다 오히려 우아하고 세련된 France인들에게 더 많은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나중에 Berlin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후 열광적인 Preußen인으로 변신해버린 Hegel의 만년과 비교하면 좀 어처구니가 없어지긴 하지만... -_-;;).

그런 상태에서 1789년, Hegel의 나이 열아홉살때에 그의 이상향 France에서 대혁명이 일어났으니, 이 혁명에 대해서 Hegel이나 그의 젊은 동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을지 우리는 능히 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 여태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낡은 봉건적 질서가 폭력적으로 붕괴되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에 의한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질서가 선진 프랑스땅에 새롭게 건설되는 것을 보고서, 그리고 그가 살고 있던 Württemberg지역에서는 그러한 정보를 독일의 다른 어떤 지역에서보다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Hegel은 바로 이러한 혁명의 정신이야말로 자기가 추구해야 할 어떤 새로운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물론 아직도 Württemberg공작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Tübingen대학 내에서 이러한 프랑스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겠지만, Hegel은 점차 이 위험스러운 혁명의 불길에 자기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오늘날의 한국도 그렇지만, 당시의 독일에서도 대학가에는 남달리 권력욕이 강하고 문화적 유행과 지적 흐름을 선도하기 좋아하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을 지닌 친구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운동써클을 조직하여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고, 감옥에 들어가거나 고문을 받거나 하면서 은근히 자기 정치적 캐리어를 쌓아나가려 하던 이들이었는데, 당시 Tübingen대학 내에서도 이러한 '운동권' 학생들은 꽤 많은 숫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Hegel은 이들 운동권학우들의 그룹에 가담하여 함께 프랑스신문을 읽고 'La Marseillaise'를 부르는 등의 반체제적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비활동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Hegel은 이런 운동권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학습활동은 같이 할 수 있었어도 그 이상의 정치적 활동은 할 수가 없었던 듯하다. 어려서부터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정신적으로 무척 조숙한 상태였던 Hegel로서는 이런 운동권 친구들이 마구마구 쏟아내던 언어들의 조잡함과 유치함에 일찌감치 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치 프랑스 혁명투사들이 그렇게 수없이 허무하게 죽어갔던 것처럼 자신도 독일내에서 함부로 혁명을 주동했다가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싶을 만큼 용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Hegel은 무턱대고 그런 운동권 학우들과 함께 행동에 나서기 보다는 그들과 일부러 적정한 거리를 두고서 그동안 자기가 갖고 있던 정신적, 철학적 체계에 프랑스혁명의 여러 이론들을 차근차근 통합시키는 시도에 더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는' '투싸!'가 되기 보다는 '이론가 나으리'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당시 이런 Hegel과 죽이 맞았던 학우로서는 Hegel과 동갑이었던 문학청년 Friedrich Hölderlin, 헤겔보다 다섯살 연하였던 철학의 신동 Friedrich Schelling 등이 있었는데, 우연히 기숙사 한 방을 같이 썼던 그들은 모두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너무 비대하게 발달해버린 정신세계를 갖고 있던 선비족(?)들로서 프랑스대혁명의 아름다운 이상에 심취하면서도 자기 부르주아적 기득권과 남다른 지식욕, 그리고 적정범위에서의 출세욕만큼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던 '무늬만 혁명가'스타일의 '이론가'형 인물들에 속했다.

이들 '기묘한 쟈코뱅파 3인방'의 우정은 그들이 Tübingen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뿔뿔이 헤어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왜 그렇게 머리도 좋고 개성도 강한 그들이 그런 유별난 우정을 서로 지속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 험난한 시기에 그들 서로만큼 죽이 맞는 인물들을 다른 데서 찾기도 힘들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비록 그들은 모두 - 당시에는 상당히 안정되고 존경받는 직업이었던 - 목사님의 지위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뭔가 다른 길을 찾기 위해 귀족집안의 가정교사 자리를 전전하며, 각자 바쁘고 힘든 길을 걸어가야 했지만, 그렇게 흩어지고 난 뒤로도 이들은 서로 '좋아 죽는 사이'였기 때문에 편지 등을 교환하며 정신적 자극을 계속 주고 받는 데 휴식을 몰랐다고 한다.

이렇게 Tübingen 신학대학을 졸업하던 당시만 해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고 앞날에 별다른 비젼도 보이지 않던 세 사람이 놀랍게도 졸업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들 독일문화사에 길이 남을 만큼 유명한 인물들로 성장하게 된 것 역시 그런 점에서 보면 참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대학시절 스승을 잘 만나는 것보다 친구를 잘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옛말 그대로, 바보같은 동료들에게 귀찮은 바짓가랑이 끌어내리기를 당하지 않고 똑똑한 또래들끼리 만나서 서로 활발한 지적 자극만을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그들은 가장 머리 잘 돌아가던 시절에 가장 빠르고 확실한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니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중에 가장 먼저 유명해진 것은 이들 가운데서 생일이 제일 빨랐던 Friedrich Hölderlin이었다. 졸업후 그는 당시 문호로서 대접받고 있던 Schiller와 Goethe 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미 22세의 나이로 자기 시집을 출판하면서 문학적 명성을 떨쳐나가기 시작했는데, Friedrich Schelling 역시도 1798년 겨우 23세의 나이에 Jena대학의 교수로 임명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으니, Hegel은 이들 3인방 가운데서도 가장 출세가 뒤쳐진 편에 속했다.

사실 Hegel이 이렇게 20~30대 나이에 남들보다 더 헤매고 고전했던 데에는 Hegel의 부진한 대학성적도 큰 작용을 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워낙에 문체 자체가 어려서부터 난삽하기 이를 데 없었던 데다가, 하루가 다르도록 크나큰 정치적 변화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프랑스혁명의 소식에 자기 모든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던 Hegel로서는 혁명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느라 학업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학위증에는 '능력은 대단한데 노력을 안함. 아는 것도 별로 없음'이라는 글귀만이 씌어져 있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난 대학시절부터 A학점만 받았다는 인간들, 석박사학위논문에도 '최우수' 점수만을 받았다는 인간들, 매우 밥맛 없게 생각하는 편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기 지도교수 학설만 충실하게 쫓아가 그것으로 좋은 점수 받는 데만 능한 인간들이 어떻게 학문적으로 대성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_-;;).

그러나 Hegel은 비록 형편없는 대학성적으로 아무런 비젼 없이 가정교사 노릇이나 하며 헤매고 다닐 망정 Kant와 달리 집안에 경제적인 여유도 좀 있는 편이었고,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들어가도 어떻게 돈 많고 마음씨 좋고 정치적 성향도 진보적인 집안에 가정교사로 취직해 들어가서, Kant에 비하면 엄청나게 행복한 가정교사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Hegel이 가정교사로 들어간 Bern의 Steiger집안 서재에는 좋은 책들이 많았으므로, Hegel은 여기서 Grotius, Hobbes, Hume, Leibniz, Locke, Macchiavelli, Rousseau, Montesquieu, Spinoza, Gibbon, Voltaire, Kant 등을 읽으면서 자기 철학의 체계를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으며, 대학시절 어줍잖은 과격혁명파 Jakobiner로 행세하며 입만 살아 떠벌리고 다녔던 부끄러운 자기 과거를 청산하고 프랑스혁명세력 가운데서도 온건파에 속하는 Girondist로 조금씩 변신하게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요즘으로 치면 공산주의자에서 사민주의자로 변신을 한 셈인가? -_-;;).

그러다가 절친한 친구 Hölderlin과 Schelling의 주선으로 가정교사자리를 Frankfurt로 옮긴 Hegel은 대도시 Frankfurt에서 더 많은 유행과 정보를 접하면서 점차 법학(특히 민법학)과 경제학 방면으로 관심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학문들이 각자의 전문적 영역 속에 고립되어서는 안되며, 인간생활의 전체성 속에서 신학, 윤리학, 물리학 등과 함께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당시 독일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신문들을 열심히 읽으면서 자기 조국 독일의 낙후된 현실에 대해 비판의식을 체계화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서른한살의 나이가 되었을 때 Hegel은 친구 Schelling의 주선으로 Jena대학에 걸음을 옮겨놓게 되었다. 당시 Jena대학은 Kant의 수제자 Fichte가 교수로 부임해 있으면서 이제 막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Kant식 독일관념철학의 싱싱한 생명력을 대학 전체에 불어넣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에 Hegel의 친구 Schelling도 가세하여 일찍부터 젊은 교수로 명성을 날리면서 Fichte와 가열찬 논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당시 Jena는 유럽철학의 미래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던 곳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원래가 논쟁이 있는 곳에 학문적 발전이 있다고, Jena에서 벌어지는 여러 피 튀기는 논쟁들에 자극받고, 때로는 친구 Schelling을 위해 그 치열한 논쟁에 가세하기도 하면서 Hegel은 철학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Hegel은 자신의 박사논문을 1801년 8월달에 써냈고 그 다음 학기에는 Jena대학에서 강사자리도 하나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에 강의에 소질이 없었던 Hegel은 학생들에게 아주 재미 없고 지루한 강의만을 늘어놓을 뿐이었으므로, 당시 학생들은 Krause나 Fries같은 - 내가 이름도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 철학강사들을 더 좋아하고 따랐던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원래 강의실력과 학문수준은 절대 비례하지 않는다는 - 옛날 나의 모교 고대법대 공간에서 떠돌던 - 말들이 실감이 난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렇게 강사생활을 해나가면서 Hegel은 자신의 대표작이자 최초의 걸작인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정신현상학'은 내가 왕년에 - 초보자 주제에 겁도 없이 - 꽤나 고생해서 읽어봤던 책이고 지금도 집에 독일어원서로 한 부를 갖고 있으므로 (내가 지금 현재 갖고 있는 Hegel의 독일어 원서는 'Phänomenologie des Geistes' 'Wissenschaft der Logik'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이렇게 네 권이다), 하여튼 내 일천한 학문적 수준에서나마 약간의 의무감을 갖고 요약을 해보자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듯하다:


Hegel이 '정신현상학'이라는 이 두꺼운 책(무려 600페이지 가까이나 된다. 물론 Kant의 '순수이성비판'보다는 약간 더 얇지만)에서 결국 모색하는 것은 예전에 Kant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증명했던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과연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Kant는 이러한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인식을 자아의 자발성에 일임하고, 그러한 인식의 대상이 인간이성의 여러 범주들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형식 속에 구성된다고 보았는데, Kant의 수제자였던 Fichte는 Kant가 이런 전제 속에서 주장한 인간이성의 독립성과 절대적 자주성의 법칙 위에서 의식(Bewusstsein)의 역사와 세계존재의 역사가 오로지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주관주의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힘있게 발전시켜나간 바가 있었다.

그러한 Fichte의 역사철학에서 Hegel은 마치 Schelling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단 역동적이고 발전적인 사고를 자기 체계 속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Hegel은 이미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이른바 '되기(das Werden)'의 문제, 필요적 사유과정 속에서 절대적인 것의 발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 원문을 직접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학문 또는 지식의 '되기'라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정신현상학이 표현하는 바이다. 처음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지식 또는 정신은 곧 무정신이며 감각적인 의식이다. 본래의 지식이 되거나 그의 순수한 개념 자체로서 학문의 요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기나긴 여정을 통한 지속적 작업이 필요하다. (Dies Werden der Wissenschaft überhaupt oder des Wissens ist es, was diese Phänomenologie des Geistes darstellt. Das Wissen, wie es zuerst ist, oder der unmittelbare Geist ist das Geistlose, das sinnliche Bewusstsein. Um zum eigentlichen Wissen zu werden oder das Element der Wissenschaft, das ihr reiner Begriff selbst ist, zu erzeugen, hat es sich durch einen langen Weg hindurchzuarbeiten.)"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W Bd. 3, S. 31.

그렇지만 Hegel은 Fichte의 철학에서 주관주의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속적 작업에 뭔가 더 절대적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절대적인 것은 Hegel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끊임없이 계속되는 자기규정 속에서 발전해나가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 통일성을 잃지 않는 자립적 정신으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절대적인 정신은 수많은 반대항들을 자기 자신 속에서 용해시켜나가는 것이고, 그로써 더 많은 것을 포괄하고 통합하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절대정신은 단독자로서의 동일성을 잃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써 Hegel의 철학은 '되기(das Werden)'의 철학, 생성의 철학인 동시에 전체(das Ganze)의 철학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이에 관해서 Hegel의 원문을 직접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한 것은 전체이다. 전체는 그러나 단지 그의 발전 속에서만 완결되는 존재이다. 절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종국에 가서야 그것의 실존재가 되는 것이다. (Das Wahre ist das Ganze. Das Ganze aber ist nur das durch seine Entwicklung sich vollendende Wesen. Es ist von dem Absoluten zu sagen, dass es wesentlich Resultat, dass es erst am Ende das ist, was es in Wahrheit ist;)"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W Bd. 3, S. 24.

이제 Hegel에게 있어서 인간의 사고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이고 동태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은 개념의 운동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었으며, 순수한 실재의 이러한 움직임들은 학문적인 것의 성질을 형성하고, 이것은 보다 큰 전체로 확산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번 Hegel의 원문을 직접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순수한 사유는 개념이 되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되며, 자기운동, 궤도, 그 실체인 것, 정신적인 실재가 된다. 그 순수한 실재의 이러한 운동은 학문적인 것의 성질을 형성한다. 그 내용의 맥락으로서 본다면, 그 운동은 필연성이며 그와 같은 것이 유기적인 전체로 확산되는 것이다. (Durch diese Bewegung werden die reinen Gedanken Begriffe und sind erst, was sie in Wahrheit sind, Selbstbewegungen, Kreise, das, was ihre Substanz ist, geistige Wesenheiten. Diese Bewegung der reinen Wesenheiten macht die Natur der Wissenschaftlichkeit überhaupt aus. Als der Zusammenhang ihres Inhalts betrachtet, ist sie die Notwendigkeit und Ausbreitung desselben zum organischen Ganzen.)"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W Bd. 3, S. 37-38.

여기서 Hegel은 Fichte의 변증법(Dialektik)을 끄집어낸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증법이야말로 정신적, 영혼적인 것, 그 내면적 삶이나 본래적 기능방식 같은 것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변증법이 뭐냐 하면 - 물론 여러분들도 다 알고 계시겠지만 - 정(Thesis), 반(Antithesis), 합(Synthesis)의 운동원리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개념은 반드시 그 반대적인 것으로 변하고, 그 반대적인 것은 다시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종합으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이 바로 그 변증법이 말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종합명제는 다시 하나의 명제가 되고, 다시 그 반대명제로 변하고, 다시 종합명제로 끌어올려지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정신은 그 자체로부터 대상물들의 전체적인 세계로 재탄생할 수가 있게 된다 (정말? -_-;;). 모든 차별성과 다양성은 극복되고 단 하나의 통일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며 (허걱!), 이로써 절대적이고 동일적인 것은 그냥 공허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풍부한 내용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증법은 Schelling이 설명했던 바와 같은 텅 비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변증법이 아니다. Fichte도 변증법을 얘기했고, Kant도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연역의 이념을 설명하면서 변증법이라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언급했었지만, Hegel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변증법은 자신만의 깊이와 내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Fichte 이전의 변증법은 그 주의적인 사고의 한계로 인해 다분히 자의적인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변증법이었지만, Hegel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는 어떤 객관적인 이념 같은 것이 되었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Hegel의 변증법에 있어서 반대명제는 그 명제 자체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Thesis와 Antithesis는 질적으로 더 높은 공통성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재가 Thesis라면 무는 Antithesis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개념은 '되기(das Werden)'라는 Synthesis 속에서 더 고차원적으로 승화된다. 생겨남과 사라짐은 마찬가지로 현존재(Dasein)라는 종합개념 속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고, 태어남과 죽음은 삶(Leben)이라는 종합개념 속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다. 우리가 그냥 신(神)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단순히 추상적인 것에 머문다면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을 테지만(마치 Kant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만약 변증법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신(神)이 무엇인지,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다 알 수 있게 된다 (정말? -_-;;).

이러한 진리의 매개로서 변증법을 이용하는 예는 감각적 확신성(sinnliche Gewissheit)의 장에서 전형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된다. Hegel의 원문을 직접 인용해보기로 하자:

"지금'이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은 밤'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각적 확신성의 진실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시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종이에 적는다. ... 그러나 정오가 되어 종이에 적어놓은 진실을 우리가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진부하게 돼버렸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이렇게 얻어진 '지금'은 따라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된 것이다. 왜냐하면 머무르고 유지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다시 말해 낮이 아니라거나 밤이 아니라는 것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 부정을 통해 존재하는 그러한 단순한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이 아닌 것으로서 또한 이것이 저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에 상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우리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 일반적인 것은 따라서 실제로 감각적인 확신성의 진실한 것이다. (Auf die Frage: was ist das Jetzt antworten wir also zum Beispiel: das Jetzt ist die Nacht. Um die Wahrheit dieser sinnlichen Gewissheit zu prüfen, ist ein einfacher Versuch hinreichend. Wir schreiben diese Wahrheit auf; ... Sehen wir jetzt, diesen Mittag, die aufgeschriebene Wahrheit wieder an, so werden wir sagen müssen, dass sie schal geworden ist. ... Dieses sich erhaltende Jetzt ist daher nicht ein unmittelbares, sondern ein vermitteltes; denn es ist als ein bleibendes und sich erhaltendes dadurch bestimmt, dass anderes, nämlich der Tag und die Nacht, nicht ist. ... Ein solches Einfaches, das durch Negation ist, weder Dieses noch Jenes, ein Nichtdieses, und ebenso gleichgültig, auch Dieses wie Jenes zu sein, nennen wir ein Allgemeines; das Allgemeine ist also in der Tat das Wahre der sinnlichen Gewissheit.)"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W Bd. 3, S. 84-85.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감각적인 확신의 단계를 거친 다음에는 대상의 성질을 알기 위해 반드시 지각(Wahrnehmung)의 단계를 거쳐야 하게 된다. 그러한 지각의 단계를 거친 다음에는 대상세계의 법칙을 알기 위해 다시 오성(Verstand)의 단계를 거쳐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오성단계에서도 인간은 단지 의식(Bewusstsein)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한, 아직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성에 사로잡힌 대상지향적 의식을 갖고 있는 데에 불과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의식(Bewusstsein)이 아니라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Hegel의 원문을 직접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자기의식은 즉자대자적인 것이다. ... 이것은 중복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로 자기의식은 스스로 없어져버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본질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자기의식은 그로써 다른 것을 지양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다른 것을 본질로서 보지 않고, 다른 것 속에서 스스로를 보기 때문이다. (Das Selbstbewusstsein ist an und für sich, ... Dies hat die gedoppelte Bedeutung: erstlich, es hat sich selbst verloren, denn es findet sich als ein anderes Wesen; zweitens, es hat damit das Andere aufgehoben, denn es sieht auch nicht das Andere als Wesen, sondern sich selbst im Anderen.)"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W Bd. 3, S. 145-146.

다시 말해 Hegel이 보기에 어떤 인간이 타인을 알고자 하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결국 타인이란 자기를 알고 자기를 인정받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처음에 의식(Bewusstsein)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인정시키려고만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던 의식이 타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이 자신을 승인하는 것처럼 자신도 타인을 승인하는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는 타인과 통합하여 자기 자신의 확대를 이룰 수가 있게 된다. 이를 Hegel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승인하는 것으로서 자기들을 승인하게 된다. 이러한 순수한 승인의 개념, 자기의식이 그 단일성 속에서 배가되는 개념은 그 과정이 자기의식에 대해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로 관찰될 수 있다 (Sie anerkennen sich als gegenseitig sich anerkennend. Dieser reine Begriff des Anerkennens, der Verdopplung des Selbstbewusstseins in seiner Einheit, ist nun zu betrachten, wie sein Prozess für das Selbstbewusstsein erscheint)."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W Bd. 3, S. 147.

그러나 Hegel은 이러한 상호승인이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일방적으로 존경하는 관계,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아랫사람으로서의 지위만을 승인하고 일방적인 권위를 행사하며 알량한 배려만을 베푸는 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상호승인 속에서 일방의 본질은 타자의 결정에 달려있고, 타자는 그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선다. 이 경우 두 사람의 자기의식은 고양되기 전의 의식 차원으로 떨어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지배와 예속관계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렇게 타자에게 예속된 의식은 자기를 이탈하는 순간에 곧 타자를 지양하게 된다. 언제까지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맡겨놓고 살 수만은 없게 돼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예속돼있던 인간은 곧 자기의식을 되찾고 타자에 대해 저항 및 투쟁을 개시하게 되지만, 이 투쟁 속에서 타자가 패배하여 거꾸로 이쪽의 자기의식에 예속되고 만다면 두 의식의 관계는 영원한 지배-예속의 반복적 자리바꾸기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정한 자기의식은 타자를 자기와 대등한 자기의식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고 또 자기도 그렇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 자기의식은 원래 타자 속에서 자기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존재를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 상대방 속에서 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했던 이쪽의 자기의식 역시 실체적 존립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조폭깡패가 진정으로 '군자' '인격자'란 말을 똘마니들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데, 억지로 똘마니들을 권위로 윽박질러서 백번 '군자'란 소리, '인격자'란 소리를 들어봤자 다 싱거운 노릇일 뿐이고, 이건 뭔지 불안하고 재미없는 일일 뿐이다. 결국엔 그 조폭깡패가 똘마니들을 독립된 존재로 만들어 그들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형님은 정말 군자이시고 인격자이심다!'란 말이 나오도록 만들어야 비로소 그 조폭깡패는 진정한 자기인정을 받은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얘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Hegel의 그 유명한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Dialektik des Herrn und des Knechts)"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을 수 있게 된다. 이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정신현상학'에서도 '자기의식의 자주성과 비자주성: 지배와 예속(Selbständigkeit und Unselb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Herrschaft und Knechtschaft)'에 관한 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 Hegel의 원문을 직접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 권력의 느낌은 그러나 전적으로 그리고 예속의 개별상황에서 단지 즉자적인 해결일 뿐이다. 주인의 공포가 지혜의 시작이라 하더라도 의식은 그 속에서 그 자신에 대한 것일 뿐이지 대자적인 것이 되지는 못한다. (Das Gefühl der absoluten Macht aber überhaupt und im einzelnen des Dienstes ist nur die Auflösung an sich, und obzwar die Furcht des Herrn der Anfang der Weisheit ist, so ist das Bewusstsein darin für es selbst, nicht das Fürsichsein.)"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W Bd. 3, S. 153.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글들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게 된다. 왜? 우리가 그냥 우리 주위 현실을 둘러보더라도 동등한 상호승인의 관계 같은 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대인관계에서 거의 존재할 수가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동갑내기 친구관계이거나 모범적인 남녀연인관계, 부부관계, 아니 그냥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관계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동등한 상호승인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 통례이다. 적어도 어느 한쪽이 더 아쉬워 하거나, 어느 한쪽이 더 우월적/종속적 위치에 있는 것이 보통이며, 아무리 평상시에는 서로가 서로를 동등한 대상으로 승인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힘이 더 센 한쪽이 힘이 더 약한 다른 쪽을 자기 권세로 누르면서 자기 생각을 관철하게 돼있다. 물론 그렇게 힘으로 억누기만 할 경우 자기가 진심으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힘으로 윽박질러서 듣는 아부라도, 일단 듣기 좋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게 돼있다. 자기가 진심으로 존경받는 것은 바라지 않더라도,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아랫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 세상은 그렇게 '인격적 상호승인'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목가적인 공간이 아니다. 자기 죽이려고 칼들고 덤벼드는 사람한테 '인격적 상호승인' 백날 운운해봤자 얻을 것은 실험실 해부대 위의 부검 메스나 조의금밖에 있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학술논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적 상호승인'은 논쟁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어떤 매너 정도의 요건에 속할 뿐이지, 상대방의 자기의식 속에서 자기자신의 자기의식을 찾아가고 그렇게 상대방과 공통의 일치점만을 추구하면서 상대방과 온전히 하나가 되려 노력하다간 오히려 상대방에게 닭살 돋게 하는 부작용만을 불러일으키거나 매번 상대방에게 인격적으로 실망하는 감정적 소모만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로 관심사도 다르고 지식범위도 다르고 가치관도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서로를 온전히 똑같은 지위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전제 자체부터가 매우 의심스러운 전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해봐~'가 우리 상호간에 가능할 수 있는가? 물론 어느 정도 범위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가 만약 똑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런 타인의 입장에 자신의 옛날 입장을 대입시켜서 어느 정도는 동정적으로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은 타인의 고통이나 분노를 자기가 온전히 온몸으로 느끼면서 온전한 이해와 온전한 상호승인을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DJ 나 놈현(?)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빨갱이'라 욕하는 조선일보 독자들과 한겨레 신문독자들이 서로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정치문제에 관해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아내거나 서로를 대등한 주체로 승인하게 될 수 있을까? 노동자가 파업만 하면 용역깡패 몰고 와서 두들겨 패고 손배가압류조치로 파업주동자들을 완전히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는 악덕자본가들의 폭력 앞에서 과연 노동자들이 완전한 '인격적 상호승인' 운운을 뇌까릴 수 있을까?

마누라 두들겨패기를 밥먹듯 하는 폭력적 마초남편에게 고상하게 '인격적 상호승인'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하고 맘씨 좋은 여자들이 과연 이 세상에 몇명이나 존재할 수 있을까? '즉자대자'라고? 이 세상에 과연 '즉자대자적'인 인간이 존재해봤자 얼마나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설령 그런 '즉자대자적'인 인간이 몇몇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 세상에서 그런 인간이 얼마나 완벽하게 '즉자대자적'일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완전한 보편성이 존재할 수 있나? 내가 타인에게 행하는 방식과 타인이 나에게 행하는 방식 사이에 과연 공통의 척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승인하려는 동기에서 상대방의 불확실한 비리를 대외적으로 폭로하고 그를 시련과 궁지에 몰아넣는 행동을 저질렀는데,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과 상호승인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에 대해 인터넷공간에서 인신공격을 하고 모욕적 훈계를 익명으로 계속 늘어놓았는데, 그런 방식을 보고 그 상대방이 그러한 행동을 배려나 승인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물론 Hegel은 그러한 동일성과 보편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상호승인의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 폭력과 굴복의 관계인 게 사실이겠지만, 그것도 이왕이면 상호승인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며, '인격적 상호승인'은 단순히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모델일 뿐 그런 모델을 따라갈 수 없는 대다수의 즉자적 인간들에 대해서는 그냥 폭력과 배제의 방법을 쓰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론은 뭔가? 결국 Hegel은 '정신현상학' 속에서 '듣기 좋은 꽃말씀'만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했지 현실적으로 쓸모있고 영양가 있는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마치 'Religion'의 장에서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처럼 Hegel이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현실적 속세가 아니라 종교적 내세일 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며, 당장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Hegel에게서 어떤 답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Hegel은 자기의 그러한 이상을 실현시켜줄 인물로서 당시 프랑스의 혁명적 독재자 Napoleon에게 크나큰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정신현상학'을 거의 탈고해나갈 즈음인 1806년에 Hegel은 Jena에서 Napoleon군대의 침략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Hegel은 Napoleon군대가 자기 직장을 폐쇄하고 자기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오히려 '어이구 속이 다 후련하다. Preußen아, 빨리 망해라~'를 짐짓 속으로 뇌까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군다나 Hegel은 Jena에 말타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던 Napoleon의 모습에서 '세계정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글을 써서 남기기도 했으니, 당시의 봉건적이고 수구적인 독일현실에 대해 Hegel이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을 타개하는 방법으로서 Hegel이 대충 어떠한 방법을 선호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오늘따라 졸음이 유난히 일찍 밀려오는 관계로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한다. 요즘은 하여튼 더운 날씨 탓에 여기저기서 같이 놀자, 술 마시자고 불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낙서장에 글 쓰는 일 역시도 점점 힘들어지는 듯하다. -_-;;

2003. 7. 25.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선택한 댓글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