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易을 읽으면서: 益


- 이하의 글은 2002년 7월 5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게재했던 저의 잡글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요즘 나는 틈틈이 주역(周易)을 읽고 있는 중이다. 대학 다닐 때 한번 마음잡고 독파해본 적이 있었으나, 너무 구름잡는 말들이 많아 그냥 시간낭비했다며 투덜대고 던져버리기도 했었는데, 오래간만에 다시 한번 易을 읽으니 이게 정말 오묘한 말이 아주 많다. 역시 동양 최고의 지혜가 담겨있는 책으로서의 옛 명성은 전혀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나 할까?

한때는 누가 내 앞에서 "주역 한 권 독파하는 것이 자본론 다섯 권 독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면 "무슨 소리냐. 자본론 1,2,3권을 독파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발끈하던 나였지만, 지금은 견해를 조금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사실 주역은 내가 생각할 때 한번 독파하는 것쯤이야 별로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며, 문제는 주역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주역은 사실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니다. 문제는 주역을 소화해서 완전히 자기 정신과 의식과 생활 속에 체화하는 것이다. 그 정도 단계에 이른다면 그는 거의 초인 내지 신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도 일컬어질 수 있다. 거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수가 없는 경지에 올라섰다고도 일컬어질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를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나이 여든살 정도나 먹어야 그 정도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오늘 내가 읽은 주역의 대목은 '익(益)'이었다. 자기를 늘려간다는 것, 뭔가를 자꾸 행한다는 것, 커다란 강물을 용감히 가로지른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에 따르면 자기를 무한히 늘려가는 자, 뭔가를 자꾸 행하는 자는 대개 보면 남을 모방하는 능력이 탁월한 자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남의 좋은 것을 보고 열심히 베끼려고 하며, 그 속에서 자기발전과 자아실현을 이루려고 한다.

이게 참 유치한 일인 것 같지만, 결코 유치하지가 않다. 하늘 아래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원래 없기 때문에, 모든 자는 어차피 처음에는 남을 베끼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좋은 것을 베끼느냐, 나쁜 것을 베끼느냐에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쁜 것을 베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데 비한다면, 좋은 것을 베끼는 자는 그래도 훨씬 나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럼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가? 거칠게 말하자면 남에게 도움을 주고 기쁨을 주는 일이 좋은 일인 반면에, 남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불이익을 주는 일은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름지기 좋은 것은 베끼고 본받아야 하지만, 나쁜 것은 피하고 멀리해야 한다. 남의 나쁜 것을 피하려 하긴 커녕 오히려 그것을 따라하거나, 나쁜 것을 발견하면 도리어 제 세상 만난 듯 그것과 함께 놀려고 난리를 치곤 하는 사람들은, 주역에 따르면 아예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가치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역시 남의 좋은 것을 베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모든 나쁜 것이 나름대로는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모든 좋은 것도 나름대로는 그 안에 조금이라도 나쁜 것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문제는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어떤 좋은 것을 베끼면서 그 안에 불가분으로 섞여있는 나쁜 것까지 따라서 베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것만 베끼고, 그 안에 불가분으로 섞여있는 나쁜 것은 떼어내버려야 하겠지만, 그것은 그리 쉽지가 않은 일이며, 결국 열심히 남의 좋은 것을 베끼려는 자는 처음에는 그 좋은 것으로 인해 이익을 얻다가도 언젠가는 그 좋은 것 속의 나쁜 것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기준은 과연 절대적인가? 그것 역시도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한때는 좋았던 것이 금방 나쁜 것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으며, 한때는 나빴던 것이 금방 좋은 것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어떤 자에게는 좋았던 것이 다른 자에게는 아주 나쁜 것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자에게는 나빴던 것이 다른 자에게는 아주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남에게 기쁨을 주고 도움을 주는 모든 자는 처음에는 주위의 칭송을 받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주위로부터 악을 불러들이게 돼있다. 그는 그만큼 사랑을 받지만 그만큼 시기와 질투를 얻게 되며, 그에게서 기쁨과 도움을 받은 모든 자는 그에게서 더욱 많은 것을 기대했다가 곧 실망하게 되고, 그에게서 아직 기쁨과 도움을 받지 않은 모든 자는 그로부터 차별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오히려 더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것을 베끼는 일이 아무리 즐겁고 보람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함부로 좋은 것을 베끼려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기보다 높은 자, 모든 이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auctoritas)의 지원과 허가를 받아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베끼는 것이 안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식으로 학교에 들어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 모든 베낌은 불법으로서 반드시 악을 불러오게 돼있다. 화를 불러오게 돼있다.

또한 모든 베낌에는 어떤 자연스러운 필요성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베끼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은 어떤 절박한 필요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베낌은 아무리 좋은 것을 베낀다고 하더라도 가짜일 수밖에 없다. 절박함이나 진실함이 결여돼있는 모든 베낌은 책임감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베낀 자들에게 화를 부르게 돼있다.

나름대로의 진실함이나 절박함이 있어서 베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입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때는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는가하는 질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화를 입었더라도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백만대군이 몰려와서 짓밟더라도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

칭찬이나 감사, 비난이나 욕설과 같은 모든 외부의 평가들은 다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물음에 있어서 모든 문제는 결판이 난다. 진짜였는가? 가짜였는가? 거기에 모든 해답이 있다. 진짜였다면 그 어떤 박해에도 굴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 못박히건, 장작더미 위에서 불고기가 되건 자기 신념대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나 가짜였다면 빨리 굴복하는 게 낫다. 진짜도 아니고 가짜인 것에 자기 명예를 걸고서 고집을 부리는 일은 아주 우매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를 판명한다는 것도 사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처음엔 장난처럼 가짜로 시작했던 일이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 자기에게 진짜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뭔가를 계속 베낌으로써 자기를 늘린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일이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고 격려를 해주지만, 덩치가 점점 불어날수록 견제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적대하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어느 시점에서 사람들의 견제와 적대감, 거부감이 적정한도를 넘어설 만큼 크게 느껴진다 싶을 때는 즉시 자기 능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해봐야 한다. 내 키는 얼마인가? 그에 비해 내 몸무게는 얼마나 많이 나가는가?

만약 지방이나 물살이 너무나 많다면 과감하게 빼야 한다. 하지만 대체로 건실하다면 계속 덩치를 불려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남의 좋은 것을 베껴서 자기를 계속 살찌운다는 것은 결코 부질없는 일이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아주 끝까지 덩치를 불려서 한번 거인이 돼보는 것도 나름대로는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비록 남들의 표적이 되어 위험해질지라도 이런 시도는 마치 커다란 강물을 가로지르는 것과 같아서 사람의 용기를 길러주고, 경험을 축적시켜주고, 세상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주역의 이런 모든 얘기들이 과연 도덕적, 규범적으로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얘기인가? 그것은 아니다. 남들의 시기, 질투에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며, 그들로부터 화를 입더라도 이를 달게 받아들이라니... 이런 얘기들은 도덕이나 법규범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다. 주역은 결국 처세술이고 현실론일 뿐이다. 이 세상에 흔하디 흔한 여러 인간쓰레기들을 교화할 수 없는 존재로서 이미 포기해버리고, 적어도 양식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그런 인간쓰레기들 사이에게서 자기 한몸 보신하기 위한 인생방법론을 가르치는 책이다.

하지만 법학은 오히려 그러한 인간쓰레기들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파헤치고 그것에 대해 적당한 처벌을 내리는 데서 출발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나같이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인간쓰레기들을 논외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역학적 처세술의 가르침을 받을 때면 많이 낯설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요즘은 나도 규범적 사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다. 특히 오늘날의 인터넷공간은 거의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익명을 이용해 거의 폭력배처럼 행패를 부리고 있으며, 꽤 지성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이버폭력을 남의 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이를 자기정당화에 이용하려드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규범'보다는 언제나 '힘'이기 때문이다.

법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운 현실. 규범적 사고나 예절, 페어플레이정신 같은 것에 친숙하지 않고, 남이 애써 만들어놓은 것을 권모술수나 우격다짐으로 더럽히거나 파괴하며, 그런 모든 행위를 길흉화복의 결과론적 사고로써 정당화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도 이제 법전만 읽을 것이 아니라, 주역을 읽고 주역의 원리로써 세상의 파고를 헤쳐나가려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동안 점복술이나 처세술 같은 것은 참으로 하찮게 생각해왔는데, 결국 주역을 다시 읽기 시작했으니 이젠 나도 어느새 많이 늙어버린 셈인 것 같다.

2002. 7. 5.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선택한 댓글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