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글은 2000년 11월 1일 저의 개인게시판 "고담준론"에 게재한 저의 일기 비슷한 글을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고래 wrote:
지난 화요일 내게는 아주 기쁜 일이 있었다. 바로 내 박사논문 "Einschränkung des Bürgschaftsrisikos durch die Erweiterung des Formerfordernisses gemäß §766 BGB"의 초안이 박사과정 심의위원회를 통과한 것이었다(벌써?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너무 놀라지는 마시라. 나도 이미 독일에 온지 1년반 정도가 되었고, 논문도 전체가 통과된 것이 아니라 nur einen Entwurf만 aufgenommen된 것이었다. 사실 이런 거 벌써부터 할 필요가 하등 없는 것인데, 내가 장학금 받는 재단에서 함부르크대학 박사과정심의회로부터 내 논문에 대한 Abstimmung을 받아 제출할 것을 요구하길래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여튼 공짜는 없다고 장학금 받는 것도 정말 힘겨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오랜동안 고생해온 결실이었기에 그 기쁨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지만, 주중에 애들을 불러내어 술을 퍼마실 수도 없고… 결국 금요일까지 기다려서 마리오라는 친구의 집에서 축하파티를 갖기로 했다. 물론 순전히 내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하는 파티가 아니라 그냥 겸사겸사해서 여는 파티였지만, 어쨌든 내게는 그동안의 스트레쓰를 확 풀어버릴 수 있는 매우 유쾌한 파티가 아닐 수 없었고, 모처럼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실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지도교수님께서 다음 면담날짜를 갑자기 다음주 화요일로 앞당기면서 그때까지 지난번에 약속했던 논문 2, 3부에 대한 보충설명서와 향후 문헌참조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떡하니 내리시는 것이 아닌가? 모처럼 좀 쉴려는 데 아주 낭패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하늘같은 지도교수님의 명령이니 따를 밖에 도리가 있나? 거기다 그날 저녁에는 최근에 산 중고 텔레비전이 말을 듣지 않아 졸지에 그 텔레비전을 간단히 분해해서 재조립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위험천만한 일을 하게 되어 밤을 또 꼴딱 새버리고 말았다. (그 덕분인지 지금 텔레비전은 한결 깨끗하게 잘 나오고 있다. 전자제품 고치는 데 천재인 내 동생이 있었다면 그 녀석이 모든 일을 해줬을 텐데… 갑자기 동생녀석이 보고 싶어진다. ㅠㅠ)
그런 상태에서 수요일과 목요일, 금요일에는 지도교수님께 제출할 계획서를 써보려 했는데, 이게 찾아야 할 문헌도 많고, 읽어야 할 논문도 산더미였다. 일단 메디쿠스 교수가 99년에 쓴 논문을 중심으로 해서 필요한 문헌을 복사하고 대략적인 내용을 훑어보는데, 그동안의 피로가 누적되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목요일밤에는 큰 맘 먹고 좀 일찍 자려고 했으나(난 평일에는 보통 새벽 2시까지 "독일어사전 단권화"라는, 나 혼자만의 괴상망칙한 작업을 하다가 멋대로 곯아떨어져 잔다), 요며칠 물처럼 퍼마신 커피의 카페인이 체내에 누적되어 잠이 도무지 오지를 않았다. 결국엔 버릇대로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으며, 다음날 금요일에는 컨디션이 말 그대로 최악, 거의 미칠 것만 같은 상황으로 악화되었다.
이렇게 되가지고서는 파티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을텐데 하는 생각에 도서관에서라도 조금 졸아볼까 했으나, 오늘따라 내 옆자리에는 내 잠재적인 경쟁자(?)인 Thilo라고 하는 혼혈 중국인 녀석, 또 뒷자리에는 내가 '전인화(독일어론 촌닌나?)'라고 부르는, 요즘 내가 어떻게 또 작업 걸어볼까 하는 아주 예쁘고 청순하고 동양적으로 생긴 독일여자애 Franziska가 자리잡고 앉아서 도서관을 떠나려 하지를 않는다. 이래서 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계획서를 제대로 쓴 것도 아니면서, 최악의 컨디션으로 파티에 가게 되었는데, 파티에 대한 조짐은 이때부터 안 좋았던 것 같다.
마리오의 집은 엘프가우슈트라쎄에 있었다. 마리오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건축엔지니어로서, 마이스터 자격까지 따놓은 실력있는 친구였다(난 이 친구 집에서 Meisterbrief라고 하는 마이스터 자격증을 처음으로 보았다). 마리오와 동거하는 여자애는 할일없고 수다만 심한 제니퍼. 한국의 신분주의적 잣대에 따르면 공고출신 기술직 남자와 백수 여자가 눈맞아서 함께 사는 셈이었지만, 독일이란 나라에서는 기술인에게도 정당한 사회적 대우가 보장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일수록 더 풍족하고 여유롭게 잘 사는 법이다(아니, 한국도 요즘은 그런가?). 그들은 정말 널찍한 거실, 침실, 화실, 공부방, 부엌에다가 베란다, 차고까지 갖추고, 카나리아 새도 두마리나 기르고 정말 남부럽지 않게, glücklich하게 살고 있었다.
파티는 북독일애들 파티하는 게 워낙 그렇듯이, 이것저것 쬐끔쬐끔 차려놓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메뉴로 화끈하게 그리고 푸짐하게 차려서 내왔다. 종목은 프랑스요리에 자주 등장하는 Muscheln. 아, 왜 시장가면 시커멓고 커다랗고 길쭉한 조개 왕창 갖다놓고 팔지 않던가? 그걸 진짜 한가마니 삶아다놓고 끊임없이 퍼날리는데, 참가한 열한명이 배 터지게 먹고도 남을만큼 푸짐한 것이었다. 거기다 맥주야 포도주야 술도 있는대로 내오고… 버섯파이, 사과파이에다 아이스크림까지 한바께스…
놀라운 것은 독일여자애들의 식욕이었다. 나도 조개를 거의 백몇십개는 까먹었지만, 여자애들도 나보다 더 먹었으면 더 먹었지 결코 덜 먹지는 않았다. 이렇게 처먹어대니 그 덩치를 유지하지… 어우, 미련한 것들… 맨날 한국 여자애들 깨작대는 것만 보다가 독일여자애들 멧돼지처럼 처먹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또 약간은 혐오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피곤한 몸으로 이렇게 꾸역꾸역 먹고나니 나도 결국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내 옆에 앉은 카쓰라는 HVV(함부르크교통공사) 직원이 완전히 술에 취해 혀를 꼬부라뜨리면서 평소의 띨띨하고 사람좋던 모습과는 다르게 마구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어대며 헷소리를 해대니, 내가 여기에 안 말려들고 배기겠나? 결국 이 대목에서 문제는 발생하게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한국이란 나라의 통일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탈북자문제, 독일과 한국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으로 무난하게 화제가 진행되었는데, 내가 한국이란 나라의 특수성을 내세우며 독일처럼 한국의 통일과정이 반드시 비관적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다가 옛날 유럽인들도 흉노족과 몽고족에게 혼쭐이 나지 않았냐는 둥 피곤한 두뇌로 정말, 지금 내가 돌이켜봐도 한심스러울 만큼 횡설수설을 늘어놓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 이러자 카쓰란 친구, "이거 보니 한국민족, 정말 웃기는 민족 아냐. 정말 상상력이 뛰어난 민족이로군."하고 모욕적인 발언을 내게 퍼부어댔다.
나도 그 친구가 CDU, SPD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자기는 녹색당인데, 녹색당도 적록연정 속에서 예전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으니, 자기가 새로 당을 만들어야 할 판이라고 한 것을 꼬투리잡아, "그럼 CSPD를 만드시지. 기독교적인 사민당을 만들고 싶다면 CSPD가 되는 거 아냐? 야, 그거 괜찮겠네."하고 비꼬아대면서 맞섰다. 그러자 그 녀석은 한국엔 제대로 된 좌파가 있기는 한 거냐면서, 독일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모든 정치스펙트럼(politische Vielfalt)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한국과 일본, 중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은 유교사상 때문에 그런지 정치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는 둥,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아주 무식한 사전지식만 갖고 있다는 둥 나를 거칠게 몰아세워댔다.
그 뒤로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면서 입씨름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도 그녀석도 술에 정신없이 취한 탓이었다. 하여튼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결론을 본 것은 내가 태권도 시범을 보임으로써 누가 더 잘났는지 승부를 내도록 하자는 것이었으니(Ach, mein Gott !), 이렇게 무식한 결론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자리에 어떤 친구가 자기가 태권도를 배우는데, 자기 한국인 사범이 두번이나 세계를 제패한(Weltmeister) 실력있는 사범이라면서 돌려차기로 눈 높이에 놓인 Apfel(사과)를 격파할 정도라고 하자, 내가 "겨우 사과 하나 격파하는 것 같고 뭐가 자랑이라는 거냐.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고 큰소리 친 게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결국 창고에 가서 사과를 꺼내온다 어쩐다 난리가 났는데, 이게 알고 보니 차라리 나무 판때기를 깨면 깨지, 그 쪼그만 사과를 돌려차기로, 그것도 순간적인 충격을 줘서 박살을 낸다는 게 말이 쉽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당시 내 컨디션이 어떤 컨디션이었던가?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잤지, 조개를 백몇십개나 까먹어 배는 남산만하게 나왔지, 포도주랑 맥주는 또 몇병을 따라 마셨지, 도무지 다리가랑이가 제대로 찢어질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결과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돌려차기로 사과를 차기는 찼는데, 이 사과가 격파되지 않고 공중을 날아 거실 구석에 있던 빈 어항을 깨부쉈던 것이다(Bingo !). ^^ 카쓰란 녀석이랑 그 옆에 있던 니콜라스 케이지 닮은 녀석이랑 나에게 뭐라고 험악한 소리를 짖어대는 가운데, 나는 마리오에게 미안하다고, 어항값은 내가 변상하도록 하겠노라고 잘못을 빌고, 마리오는 괜찮다고 하고, 뭐 대충 그런 소동이 있었다.
오늘 아침은 내가 그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Omas Apotheke라는 Sternchanze에 있는 싸구려 음식점에 마리오, 제니퍼, 안드레아스, 타냐 등을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했다. 서머타임이 마침 오늘 새벽에 해제되어 평소보다 한시간을 더 잘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부모님께서 아침일찍 전화를 걸어주신 덕분에 숙면을 못해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오와 제니퍼, 안드레아스 등 나의 친구들은 Kellnerin들이 계속 눈치를 주는데도 음식점에서 네 시간을 뻣대며 수다를 떨어대었고, 나는 음식점 안에 자욱한 담배연기를 네 시간동안이나 속절없이 들이마시며, 그들의 수다가 언제 끝나나만 한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제 낼 저녁까지 지도교수님께 제출할 계획서를 완성해야 하는데, 써놓은 거는 하나도 없고, 나도 정말 미칠 지경이다. 이젠 10월달도 다 지나가네… 그냥 교수님께 면담을 일주일 뒤로 더 미뤘으면 좋겠다고 사정해볼까나? ^^
200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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