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와 스파이스걸스

- 이하의 글은 2000년 11월 21일 저의 개인게시판에 게재했던 가벼운 수필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옮긴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이상한 버릇 중에는 뭔가 지겹고 힘든 일을 할 때 그와 관련된 한국 유행가나 CF 멘트 따위를 입 속으로 계속 중얼거린다는 것이 하나 있다. 예를 들어 지지난 주 금요일날 연구실 이삿짐을 나를 때에는 콧노래로 계속 한국 유행가 "이사가던 날"을 흥얼거렸다(그것도 심형래 버전으로 ^^ 그런데 막상 불러보니 이 노래 가사가 정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사 가 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 각시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언제는 독일친구 Jonas의 강권에 못이겨 그날도 무슨 밤샘작업으로 잠이 부족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할 독일연극을 무려 4시간 가까이나 보아야 했는데, 그날따라 연극에 공주마마가 자주 등장했으므로 나는 Jonas가 자꾸 눈총을 주거나 말거나 콧노래로 혼자 김자옥의 "공주는 외로워"를 흥얼거렸다. "이뿐 나는 공주라 외로워~ ^^ 때로는 날 보는 여자들의 질투어린 시선이~" ^^

그리고 지난 금요일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2박 3일간 스위스 채권법 교과서의 스캔작업을 하면서는 김국진의 CF멘트를 수백번 수천번이나 외쳐야 했다. 밤 새지 마~란 마랴~! 아, 정말 또한번 체력의 한계에 도전했지만, 난 중간에 쉴 때에는 이발소 가서 머리까지 깎아가며 컨디션을 조절한 끝에 정말 잠을 몇시간밖에 자지 않고 마침내 모든 작업을 완수하고야 말았다.

처음엔 Nirvana의 CD "Smells Like Teen Spirit"를 들으며 작업하다가, 나중에는 TV까지 켜놓고 작업을 했는데, 물론 눈은 컴퓨터 화면에 고정시켜야 했으므로 내가 좋아하는 축구중계는 볼 수 없었고, 그냥 소리만 들어도 되는 음악방송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작업이 3분의 2 정도 진행되었을 때인 일요일 밤 11시 경에는 MTV에서 어디 스톡홀름인가에서 거행된 MTV 음악상 시상식 장면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리키 마틴이 남자가수상을 수상하네, 백스트리트보이스가 그룹상을 수상하네 하더니, 사회자의 왁자지껄한 소개멘트와 함께 무대에 Madonna가 등장해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곡명은 최신곡 "Music" !

난 사실 Madonna 이 여자 별로 높이 평가하는 편도 아니고, 이 여자의 음악스타일도 그냥 시시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막 세상에 나타났을 때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8년전,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인 1983년, 1984년 그 무렵이었는데, 그때 그녀가 처음 발표한 "Holiday" "Like A Virgin" 이런 곡들은 그냥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흥겨운 곡들일 뿐이었지 어떤 깊이 있는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그녀를 조금은 맛가고 골빈 댄스가수로 경멸하곤 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음탕한 무대매너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처음에는 정숙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과시하는 Lolita적인 이미지를 뽐내더니만, 언젠가부터는 Marilyn Monroe를 흉내내어 은백색 금발로 머리를 염색하고 속옷바람으로 무대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는데, 마릴린 먼로 흉내를 내려면 좀 백치스러운 면이라도 보이던가. 첫눈에 보더라도 눈치가 빤하고 영악하게 생긴 여자가 순진무구한 섹스심볼 노릇을 하니 거부감까지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짓에서 멈추지 않고 실크햇과 연미복 차림을 하고서 양성애적 이미지인 Marlene Dietrich 흉내를 내기도 했고, 흡혈귀 노릇을 하기도 했다가 언제는 보디빌딩을 통해 온몸을 근육질로 단련하고서 남자를 노예처럼 학대하는 새디스틱한 마녀로 분해 나타나기도 했다. 언제 봐도 밥맛 떨어지는 무대매너가 아닐 수 없었고, 나는 그래서 과연 저 여자 몇년이나 하다 버틸까 하는 '별걸 다 걱정'까지 하던 참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마돈나의 음악에 귀가 번쩍 뜨이기 시작했던 것은 내가 대학 1학년때인 1989년쯤 그녀가 "Like A Prayer"라는 앨범을 들고 나왔을 때였던 것 같다. "La Isla Bonita"였던가? 그걸 듣고, '아니 이 여자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진짜 처음엔 그냥 단순한 멜로디와 몸매자랑으로 한몫 보는 것처럼만 보이던 이 여자가 꽤 음악적으로 성숙해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의 보수적인 사회분위기에 적당히 시비를 걸면서도 교묘히 자기 몫을 챙기며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그녀의 솔직하고 영악하면서도 당당한 태도 역시 꽤나 멋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1992년에는 누드사진집 "Sex"을 발간했는데, 이 사진집의 특징은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에 자기를 수줍게 노출시켜서 교묘히 돈을 벌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니들이 보고 싶어하건 말건 난 그냥 내 벗은 몸을 보여주게따, 어쩔래?'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도발적이면서도 주체성 있는 누드사진집이었다는 얘기다.

하여튼 이러한 그녀의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이 나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형편 없는 연기력임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영화에 출연하려고 하는 도전정신 역시도 언젠가부터 내게는 점점 매력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 수많은 Megastar들이 대중의 환호에 짓눌려 자기 자아를 상실하고 극도의 정신분열 속에서 맥없이 쓰러져 간 것에 비해 조금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는 꿋꿋함과 일관성 또한 마돈나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백수천의 여성운동가들이 목이 터져라 외쳐도 결코 쉽게 대중에게 그 관념을 전달하지 못했던 "여성이 주체되는 삶"을 마치 즐기듯이 온몸으로 실천하며 아주 강력하게 전파하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정치성은 높은 점수를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되게 널럴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이미 10대 시절부터 재즈발레와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기타와 키보드, 드럼, 퍼쿠션을 익히며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을 쌓아간 그녀는 실제로 대단한 노력파라는 사실 역시 나를 뒤늦게나마 놀라게 했다.

물론 그녀의 음악스타일은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녀의 공연장면 역시 너무 꽉 짜인 안무에 의한 것이 많아 평소 꾸밈없고 단순한 무대매너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던 편이었지만, 적어도 이 날의 공연장면만은 꽤나 인상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백댄싱팀 하나 없이 그냥 흑인 여자 코러스 두 명만 데리고 나와 혼자서 춤추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렇게 격하게 몸을 돌리며 노래를 부르는데도 라이브로 시원하게 뽑아대는 음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뚱뚱 뚱뚱뚱 하고 받쳐주는 테크노 반주도 라이브로 들으니 꽤나 흥겨웠고...

특히 그녀가 데뷔시절부터 지녔던, 높고 맑으면서도 길게 여운을 끄는 듯 울려퍼지는 목소리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으며, 율동 사이사이에 가빠지는 호흡은 생동감과 함께 그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거기다 나이가 이미 사십이 넘었을텐데도 여전히 날씬하고 힘 있어 보이고 용수철처럼 팍팍 튀어오르는 허리와 다리하며, 아랫배와 엉덩이가 다 드러날 듯한 골반바지를 몸매에 딱 맞게 빼입고 나온 옷맵시하며, 역시 '난 여자는 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단발머리로 한쪽 눈을 살짝 가린 듯이 하고서 나온 헤어스타일도 그 스타일 자체가 뭐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얼굴이랑 꼭 맞는 머리형을 굉장히 잘 고른 것 같다 싶었고, 이렇다할 백댄싱 팀 없이 혼자서 단조롭게 무대 위에 그냥 서서 몸을 흔드는 데도 무대 전체를 꽉 채우는 것 같은 카리스마 또한 인상적이었다. 역시 Madonna는 Madonna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초대가수로 나온 것은? 역시 육체파(?) 여자가수들인 스파이스걸스였다. 오, 스파이스걸스. 나의 귀여운 뚱땡이들... 원래는 5명이었을텐데, 얼마전 Geri Halliwell이 빠져 네 명인가? 확실치 않다. 그런데 얘네들은 공력이 아무래도 딸려서 그랬는지 라이브로 하지 않고 립씽크로 노래를 불렀다. 역시 Madonna에 비해서 체력이건 가창력이건 연륜이건 많이 처지는 애들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덩치가 말만하고 정력도 팔팔한 여자애들이 각자 자기 개성을 살려 파워풀하게 율동도 하고 하니까 역시 무대를 단번에 휘어잡는 게 느껴졌다.

얘네들은 사실 뭐 그렇게 얼굴이 예쁜 것들도 아니고 그렇게 매력이 느껴지는 애들도 아니다 (하긴 터프하고 개구장이스러워 보이는 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만). 몇몇 애들은 내가 봤을 때 사실상 비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뚱뚱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핑클이나 S.E.S. 같이 얼굴 위주로 뽑은 애들과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게 목소리와 개성이 제각각이어서 그 조합이 환상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데다 표정이나 동작이나 굉장히 당당하고 자립적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자기 몸매 좀 뚱뚱하고 해도 그걸 숨기지 않고, 오히려 불룩 나온 배랑, 허벅지만한 어깻죽지랑 대놓고 노출해서 확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더욱 귀엽고 앙징맞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특히 약간 쉰 듯하면서도 화안하게 울려퍼지는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멜라니C의 비어져 나온 뱃살... 나는 스캔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혼자 외쳤다. "아아, ... 허리가 엄씁니다... (Ach, ... keine Taille...)" 그러나 그렇게 자유롭게 드러내보이는 Sexualität란 날씬하건 뚱뚱하건 예쁘건 못생기건 간에 얼마나 즐겁고 유쾌한 정조를 만인에게 던져주는 것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그렇게 저렇게 지루함을 달래가며 나는 이틀밤을 새운 끝에 스캔작업을 마쳤다는 것이었는데, 김국진의 "밤 새지 마~란 마랴!"도 자꾸 외치다 보니까 그래, 김국진 그 사람은 치와와 같이 비쩍 말라갖고 별로 건강하지 않은데도 방송일에 치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항상 벌개진 눈과 부르튼 입으로 돌아다니는데, 씨름선수처럼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나는 이깟 밤샘 못 견딜 게 뭐 있으랴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랬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숨 푹 자고 라면도 끓여먹고 했더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다. 아아~ 이젠 내일 지도교수랑 면담할 자료를 준비해야지~.

200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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