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ppi는 유럽에서 해방된 여성자아인식의 중요한 코드


- 이하의 글은 2000년 12월 7일 저의 개인게시판 '고담준론'에 게재했던 제 가벼운 답장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얼마전 독일여자애 하나와 얘기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인데, 독일에서 '피피'는 해방된 여성자아인식의 중요한 코드가 되기도 한다네요.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괄량이 삐삐'로 알고 있는 주근깨 투성이 여자애가 독일과 북유럽에서는 'Pippi Langstrumpf'라고 해서, 이미 어린 나이에 분명한 자의식(Selbstbewusstsein)을 갖추고 어른들이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모든 단정한 것들을 거부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새로운 이상적 소녀상으로서, 70년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독일 여학생들에게 매우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요.

당시만 해도 독일여자애들의 보통 일상적인 삶은 정말 하루하루가 숨막히는 것이었다고 해요. 종아리까지 오는 하얀 양말, 무릎을 덮는 푸른 치마, 하얀 블라우스, 피아노교습, 교회성가대, 식사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고 나이프와 포크를 예법에 맞게 사용하고 웃어른들에게는 항상 공경하게 존대말을...

그런데 Pippi가 나타나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이, 아니 최소한 그 중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요. 여자애들은 일찍부터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살기를 열망하게 되었고, 강아지나 고양이 대신 말이나 원숭이를 기르기 시작했고, 치마에 흙이 묻어도 개의치 않게 되었고, 성적에 상관없이 항상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법을 배웠고,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게 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너'라고 부르게 되었고(우리나라 번역판에서는 어른들에게 존대말을 쓰는 것으로 나오지만 원래 Pippi는 원작상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아무한테나 반말을 쓰는 애라네요), 땅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눕게 되었고, 피아노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대요.

이건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지금의 독일여자애들의 모습과 일치하기도 하죠. 남자들에게 아무것도 꿀릴 것이 없다는 당당함. 자기를 어떤 경우에도 주변인(Randfigur)이나 외부인(Außenseiter)으로 머물게 하지 않으려는 적극성. 돈이나 성적, 세간의 평판에 대한 무심함. 고정되어 있지 않은 귀가시간과 취침시간. 그리고 모험과 여행에 대한 동경. 제가 독일에 와서 몇몇 여자애들과 친하게 지내고 난 후 흥미롭게 경험했던 것들이기도 하죠.

제가 어린 시절 한국에서 동생과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말괄량이 삐삐'가 문득 다시 떠오르는군요. 물론 그때 제가 좋아했던 여자는 '은하철도 999'의 메텔이나 '미래소년 코난'의 라나와 같은 조용하고 신비로운 여자였지만, 독일에 온 후로는 Pippi같은 취향에도 나름대로 적응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님께서 '피피' 얘기를 하시니 그냥 그런저런 생각을 덩달아 하게 되었네요. 그럼 건강하시고...

2000.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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