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주

○ 金日成

김일성의 사주는 壬子年柱, 甲辰月柱, 辛酉日柱, 壬辰時柱로서 사주가 거칠고 강렬하기는 하나 이승만의 사주에 비해 강력하지 않다(강렬함과 강력함은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김일성의 사주는 비록 괴강살이 時支에 붙었긴 하나, 기본적으로 陰日干인 데다 身弱이어서 억센 고집보다는 모성애적인 포용력을, 정정당당하고 선이 굵은 정책 보다는 기습전략과 세밀한 완벽성을 선호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상대적으로 품성, 감성, 현장성을 더 중시하는 그의 사상과, 미래지향성 및 개방성이 결여된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이었던 그의 통치를 수긍케 한다. 따라서 그는 분명 북한공산집단의 '중심'이었지만,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고독하게 앞서서 무언가를 끌고 나가는 개성 강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또 이승만의 사주가 갖출 것은 다 갖춘 다채로운 것인 데 비해, 김일성의 사주에는 어처구니 없게도 官星이 결여되어 있어 사주가 불안정하게 치우쳤다. 관성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엄격성 내지는 원칙성 같은 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을 것임을 말해준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정통 공산주의이념의 기본원칙들을 사실상 폐기해버린 것이나, 많은 기간 외세에 소속되고 외세에 조종되면서도 사상적 모순이나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않은 것, 역사왜곡에 조상미화를 거듭한 것 등도 그런 점에서 이해가 가게 된다. 따라서 그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이나 사상가, 혁명가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광신적 종교가이거나 북한정권의 충실한 관리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사주에는 刑沖破害가 하나도 없다. 그 힘든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면서도 날조된 것 이외에는 투옥의 경험이 한번도 없었다든지, 젊은 나이로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던 동북항일연군의 한 지휘관이 되어 금방 일제의 패망을 맞아 일찍부터 남들에 비해 깨끗한 경력관리를 할 수 있었던 점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의 멀끔한 사주 덕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이후로도 그의 운명은 기본적으로 파란곡절이 많기 보다는 매사가 잘 풀리는 운명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안정감은 북한이 그의 생전 급격한 정치적 공백이나 충돌을 겪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권좌도 사망시까지 탄탄했던 데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는 月·時柱의 印綬에 墓가 붙었으니 종교적인 면이 강하고 생각보단 검소하며 금욕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감성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었건 어쨌건 젊어서부터 고생길이 뻔한 공산주의운동과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이라든가 그가 건설한 나라가 전반적으로 궁색한 신흥종교국가 비슷하게 된 것도 그러한 그의 취향을 반영한 것인지 모른다.

또한 建錄, 暗綠에 十干祿까지 다 가졌으니 재능·지모가 뛰어나고 야망이 커서 출세를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사주이며, 天·月德이 모두 있으니 주위의 사랑과 도움을 받는다. 文昌과 華蓋가 모두 있으니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예술감각도 있었겠으며, 日柱가 紅艶이라 미남자의 용모에 젊어서 멋깨나 부리고 여자깨나 꼬셨겠지만, 食神과 傷官이 年·時柱에 중첩하고 天廚貴人까지 동반하여 체구가 비대한 뚱땡이가 되었다.

그의 대운을 보면 태어나서부터 61세를 먹을 때까지(1912년∼1972년) 모두 괜찮은 대운으로 시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그토록 그가 거의 평생을 부침 없이 잘나갈 수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用神은 辛酉金으로 身弱이라, 生助神을 좋아하는데, 사실 31세까지는 그의 대운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의 日元을 생조하는 운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32세 이후인 1943년부터 본격적인 身旺運으로 化하며, 이때부터 그는 일개 소련극동군 첩보부대 대대장에서 일약 북한의 주석으로 지위가 급상승하게 된다. 당시 북한 열혈 청년들 간에는 조선의 공산화와 근대화를 소련과 중국의 힘을 얻어 무력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나약한 인텔리 출신이거나 켸켸묵은 원칙론자는 그들 좌익청년들의 지도자로서 적합치 않았다. 그는 짧건 길건 소련과 중국에서 실제 항일무장투쟁을 경험했고,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하며 국제정세에도 밝아보였으므로, 34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조선좌익들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 게다.

그는 내친 김에 1950년(庚寅年)엔 한국전쟁까지도 일으키게 된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거기에 참전했었으므로, 그가 그 정도나마 자기 세력범위를 유지한 것은 그래도 그 당시 그의 운이 좋았던 것임을 말해준다. 이후로도 그는 북한을 준병영국가로 만들어 나름대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진영과 제법 명분깨나 있어 보이는 대치상황을 벌였지만, 사실 그에게 정말로 이념수호의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며, 그 과정에서 남북한 모두가 최악의 인권유린국가가 되었다는 점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튼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절대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73년부터는 대운이 용신을 누설하니 운세가 갑자기 꺾여 그도 사실상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가 다스리던 북한의 경제는 파탄을 향해 치닫게 된다. 이렇게 운세가 꺾였음에도 이승만과 달리 실각을 면한 것은 時支가 喜神이어서 貴子(金正日?)의 도움을 받은 덕분으로 봐야 할 것인데, 이렇듯 사주로만 놓고 보면 그는 아들 김정일과 거의 찰떡궁합으로서, 둘의 사이는 소문처럼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역술가들이 그의 죽음을 예견했던 1994년은 癸丑大運에 甲戌年運으로 辰戌이 相沖하고 辰丑이 相破해 그토록 견고하던 月時支의 喜神이 일거에 허물어져버렸으니 그가 죽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사주는 괴강, 飛刃이 워낙 흉포해 수많은 테러, 살인과 전쟁을 저질렀으나, 생각만큼 그의 사주는 강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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