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泳三
김영삼의 사주는 戊辰年柱, 乙丑月柱, 己未日柱, 甲戌時柱로서,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帝王格의 사주이다. 辰戌丑未의 四庫를 전부 갖춘, 용이 변화를 일으키며 바다로 들어가는 형국(化龍入海格)의 사주일 뿐 아니라, 한때 많은 해바라기성 역술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一行得氣의 稼穡格까지 겸했다.
몽고를 몰아내고 明을 건국한 주원장의 사주도 제왕격에 가색격을 겸했다 하니, 김영삼의 사주는 단순히 제왕격 정도가 아니라 天子格 내지 皇帝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淸朝 康熙帝의 周流無滯가 최고의 사주라 하나 결코 그에 못지 않은, 이건 가히 최고의 사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사주는 四貴格은 될지 모르나 月干이 乙木七殺인 이상 一行得氣의 稼穡格은 아니다. 또 四貴格은 좋은 사주이긴 하지만 일단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고나면 급속도로 허물어지게 되는 사주이니 박정희와 같은 四生格의 사주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조갑제 기자는 그를 소위 '사대적 귀족적 민주주의자'의 대표격 내지, 사리사욕 밖에 모르는 전형적 파당주의 야당정치인으로 보면서, 민족을 사랑하고 서민을 중시하는 전체주의 애국자 박정희의 운명적 맞수 역할을 하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사주상으로 그는 박정희의 맞수가 될 수 없다. 물론 그의 日柱인 己未와 1979년(己未年)의 己未가 박정희를 죽인 것은 사실이라도, 같은 帝王格인 이상 그는 누구보다도 박정희의 닮은 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의 사주는 比劫이 太旺한 데다 天耗·地耗를 모두 갖췄고, 이를 모두 刑沖破害로 두들겼으니, 財星運이 오면 群比爭財로 모든 재물을 거덜내게 되어있다. 만약 대통령이 안 되었다면 1988년에서 2007년 사이에 그의 개인재산을 몽땅 거덜냈을 것이나, 그 기간 동안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나라를 온통 말아먹고 말았다. 말할 것도 없이 대통령을 하면서 우리나라 경제를 10년 가까이 후퇴시키고 남북간 소득격차를 대폭 줄인 것이야말로 그의 평생에 최대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사주에 財星과 印星이 하나도 없고 劫財만 3개씩이나 있는 그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 자체가 우리나라로서는 불운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주는 年支에 白衣殺·白虎大殺이 들고, 이것이 다시 時支와 상충되었으니, 어머니가 일찍 흉하게 돌아가실 팔자이다. 그 밖에 時干甲木은 日干과 合해 官殺混雜을 면한 대신 忌神으로 변했으니, 영웅호걸일지라도 실질에 있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無用之人의 사주이다. 이에 더해 時支가 刑沖破害를 다 얻어맞은 데다 忌神이기까지 하니 자식이 좋지 않고, 심지어는 옥살이하는 자식까지 생기며,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의 말로도 좋지 않다(이는 박정희도 마찬가지).
그의 大運을 보면 40세까지는 相生의 대운을 만나 순탄한 행로를 걷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산에서 수산업을 경영하는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나 별로 신통치 않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경남중학, 서울대 철학과를 다닌 것이나, 군생활도 국방부 정훈국에서 만고땡으로 편히 보낸 것, 24세에 일약 국회부의장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고 27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 이후 7선의 관록을 쌓으며 38세에 원내총무가 된 것 등이 그가 억세게 운좋은 초년시절을 보냈음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41세부터 相克의 庚午大運을 만나니 用神乙木을 合去하여 43세에는 다 잡아놓은 대통령후보직을 김대중에게 놓친다. 45세에는 유신을 만나 가택연금을 당하고, 그 밖에도 박정희의 탄압을 받아 오만 고생을 다하게 된다. 물론 한편으로 보면 똑같은 帝王格인 박정희와 드디어 좋은 승부를 벌이게 되었고, 김대중과 함께 대표적인 야당지도자로 부상하게도 되었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눈물 쏙 빠지는 고초를 당한 것은 여태껏 평탄했던 그의 생애에서는 거의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51세부터는 辛未大運을 만나니 用神乙木이 折伐되어 버린다. 이때 그는 이른바 '가처분신청'으로 야당 총재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YH여공사건과 뉴욕타임즈 기자회견 사건으로 국회의원직에서까지 제명되고 만다. 비록 이러한 탄압의 여파로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박정희정권은 파멸하고 말지만(아닌 게 아니라 일찌감치 장래의 천적으로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는 박정희는 결국 김영삼 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보게 된 셈이다), 여전히 운세가 좋지 않은 그에게 박정희의 대통령 자리가 돌아올 가망은 없었다.
'서울의 봄'이 돌아오고, 잘만 하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던 때도 잠시, 전두환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를 짓밟은 후, 그는 자택에 연금되고 만다. 완전히 열 받은 그가 56세때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 것도 별무소득이었다. 같은 시기에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고, 차디찬 감옥에서 식은 밥을 먹으며 떨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는 호강을 한 편이었지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데다 그의 정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던 이 시절은 그에게 분명 시련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57세때부터 1984년(甲子), 85년(乙丑), 86년(丙寅), 87년(丁卯)의 好運을 만난 그는, 신민당을 창당시키고, 총선에서 야당바람을 일으키고, 6월항쟁을 이끌어낸 데 이어, 87년 12월에는 대통령 자리를 놓고 노태우와 운명의 일전을 벌이기도 한다. 그의 오뚜기같은 불굴의 의지가 또다시 열매를 맺은 것이다(하긴 3김씨 모두 그 칠전팔기 정신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인물들이지만). 물론 그는 낙선하지만, 대선의 결과 역시 그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운이 아직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보다는 우위를 지킨 것이었다. 대운이 나빠도 年運이 좋으면 그럭저럭 체면치레는 한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운은 그의 나이 61세때부터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다. 그 두려운 群比爭財의 壬申大運이 돌아온 것이다. 그 때문인지 62세때 그는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에게조차 밀려 제1야당 당수자리마저 내놓고, 여소야대 정국의 주도권까지 김대중에게 넘겨주고 만다.
여기서 그는 3당합당이라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벼락같은 결심을 함으로써 그가 갖고 있던 일말의 도덕성이나 일관성은 훼손을 당하게 되지만, 제왕격의 운명을 가진 사람이 모두 그렇듯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초월적 행동을 하게끔 되어있는 그같은 사람이 그런 사소한 것에 구애받을 리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곧 일생 최고의 行運이 오게 되어 있었다.
65세때인 1992년(壬申年)은 大運과 年運이 모두 壬申으로 水氣가 충분해 爭財를 막아, 比旺財旺의 대길운이 되었다. 이런 큰 운을 탄 그는 시종일관 노태우를 강력하게 밀어붙여 여당후보를 따낸 다음, 지역감정과 사상시비로 김대중마저 고꾸라뜨려 평생을 열망하던 대통령에 드디어 당선되고 만다. 범민주세력의 지지는 김대중 쪽에게 더 있었던 것 같고, 정주영까지 그를 협공하여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타협과 후퇴라고는 없는 호쾌한 힘겨루기로 그는 결국 미약한 만년야당 지도자에서 만인지상의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1993년(癸酉年) 역시 그에게 比旺財旺의 호운이었으므로, 이때 그는 과감한 문민개혁을 밀어붙이며, 영호남을 막론하고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비록 이러한 최고운도 최악의 大運 속에 잠깐 끼어든 단 2년간의 단꿈에 불과했지만,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김대중까지 정계를 은퇴한 이상 그의 성세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화려한 인기 속에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그는 이제 그로서 최대의 지지기반이어야 할 수구보수세력까지도 과감하게 적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관철할 자신도 능력도 없으면서 "돈 없는 사람이 부끄러웠던 시대가 가고 오히려 돈 많은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한 것이나,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세법을 개정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 그 예이다.
그 결과로서 수구세력은 집단반발하기 시작하고, 그의 안일한 정국운영과 시대착오적 냉전사고, 철저한 은원위주의 정치가 불러일으킨 정치위기, 경제위기 속에 김대중은 정계에 복귀하고 만다. 이후 김대중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그저 세계화라는 명분하에 재벌위주의 경제정책을 재개해야 했지만, 이런 일관성 없는 정책기조 속에 우리 경제는 엔고의 호조건 속에서도 전부문에서의 퇴각현상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年運의 水氣가 모두 다 말라버린 1994년(甲戌年)부터 그의 정치적 운명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짧았던 그의 전성기도 결국 끝장을 보게 된 것이다. 육해공으로 대형참사가 번갈아 터지고 한보사태로 차남이 잡혀들어가더니 급기야 1997년(丁丑年)에는 强旺한 的殺을 맞아 기아사태에 이어 끝내는 換亂으로 대표되는 망국의 위기를 보고야 만다. 참고로 말하자면 的殺은 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사주에서는 대개 合去 내지 沖去되어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金泳三과 같은 四貴格의 사주에서는 말 그대로 的殺이 쥐약이다. 더군다나 1997년의 적살은 丁火의 도움을 받아 그 어느때보다도 힘이 강력해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통령이라는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해서 그 목표를 쟁취하는 데는 비상한 추진력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는, 곤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시절 민주화에 용감히 공헌했고, 문민정부의 새시대를 열었던 게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그가 세운 문민정부는 3당야합의 결과물이었고, 그가 펼친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정책과 그 뒤로 이어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 역시 그가 세운 정권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종전의 군사독재가 가진 물리적 효율성과 전체주의를 의리와 인맥에 기반한 깜짝쇼와 권위주의로 바꿔친 게 전부였을 만큼 예전의 틀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경제파탄의 책임을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우리 현대사에 자신의 무능 이상의 오점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을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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