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사주

○ 李承晩

이승만의 사주는 乙亥年柱, 己卯月柱, 丁亥日柱,庚子時柱이다. 天元坐祿한 白虎持勢格이니 영리하고 임기응변과 謀事에교묘하며, 官殺混雜하니 잔꾀에 능하고 인품이 비천하다. 혹자는 그의사주를 去官留殺의 大貴格이라 하나, 拓合의 原理를 모르고서 하는 말로,그가 궁정정치가 스타일이라 하여 그의 인품이 고귀한 것처럼 말할 수는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정부나 경찰 및 군대에 친일파를 기용하고, 장기집권을 위해 변칙적으로 헌법을 개정했으며, 전쟁이 터지자 자기만 살자고 한강을 건너고 다리를 폭파한 것 등은 그가 교활하고 무원칙하다는 뜻이니, 그의 官星이 혼잡하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身强인 데다 偏印이 官殺의 도움을 받아 사주가 강력했던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술, 담배, 커피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해도 82세때 북한산을 등반했을 정도로 건강했던 것이나, 투옥을 무릅쓰고 고종황제에게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미국과 방위조약을 협상하면서 단독북진을 협박했던 것은 그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偏印이 食神을 충극하고 財星을 둔하게 한 것은 그가 物事에 무심했음을 뜻하니, 그의 통치기간 우리 경제의 파탄적 상황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농지개혁을 그 정도나마 실시하고 경제성장률을 5%정도로나마 유지한 것은 그가 나라경제를 아주 말아먹은 것까지는 아님을 보여준다. 최소한 그의 사주에 김영삼과 같은 群比爭財는 없는 것이다.

또한 月時支가 相沖하고 偏印이 중첩한 것은 성질이 냉혹하고 마음이 독한 것이니, 반공법 등을 통한 반대세력 거세 및 거창양민학살사건이 그러한 성질로부터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羊刃이나 劫殺 같은 흉살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간사할지언정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을 조종하고 한국전쟁을 유발한 것도 그의 의도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분단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고, 김구 암살은 미국 CIA의 소행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한국전쟁은 일단 김일성과 소련정권이 먼저 터뜨린 것이었다.

이승만의 用神은 時上의 庚申金이니 비록 36세에 벌써 국내최초의 미국박사로서 각광받는 존재였고, 이미 45세때부터 임정의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用神運이 오기 전까지는 그의 인생도 그리 풀리는 편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용신운이 돌아오는 1930년대(나이56세∼65세)부터 미국정부의 주목을 받아 운이 열리기 시작했으며, 用神이 祿을 얻는 1940년대(나이 66세∼75세)에 일본이 패망하자 기회를 잘 잡아대통령까지 되었다. 만주나 중국땅에서 그보다 더 고생한 독립운동가도 많았는데, 고 장준하 선생의 말씀마따나 '정치가로서 드문행운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50년대에는 최고의 대운(辛未運)을 맞았으니 國父로 군림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최고의 대운이 끝나는 1960년에 용신이 午火의 공격을 받아(火克金) 곧바로 실각했다.

사주에 전반적으로 간악함과 고집스러움은 있을지언정 과격함이나흉포함이 없고 기본적인 의리 정도는 있는 사주라 망신은 했어도 비참은면했다. 12년 집권기간 동안 언론에 비교적 관대했던 점이나, 4.19때 형세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자 재빨리 자진하야한 것 등이 그 예이다. 그 밖에 時支絶에 桃花殺이 있어 음란한 성격에 색정도 밝혔겠으나 財星이순수해 여자문제와 금전문제는 비교적 깨끗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時支가 用神의 死地가 되니 평생 공들여 쌓은 명예를 다 날렸을 뿐아니라 後嗣도 없었다. 82세 이후 노욕에 이끌려 3선개헌을 하고, '인의 장막'에 가려 비극적 종말을 맞은 데다 자식도 없고 양자까지 총 맞아 죽은 것이 그 예이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것이니 사주에서 時支가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國父로 숭앙하기엔 너무 약삭빠른 사주의 소유자이지만, 그나마건국초의 혼란기에 이렇듯 영특하고 눈치 빠른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만난 것은 우리 민족 나름의 福이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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