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사주

○ 朴正熙

박정희의 사주는 丁巳年柱, 辛亥月柱, 庚申日柱, 戊寅時柱로서 그 이름도 찬란한 帝王格의 사주이다. 地支全局에 寅巳申亥를 깔고 앉은 四孟格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런 사맹격이었는데, 정확한 명칭은 四位純全格의 四生格이라 한다.

물론 나는 帝王格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편은 아니다. '命理正宗'에서도 이를 고작해야 '남자는 大貴하여, 지위가 三公에 오를 것'이라 한 정도이고, '三命通會'에서도 '得時하면 영구히 大昌할 것이나, 不然이면 夭壽할 것'이라고 한 정도였다. 이인화교수의 말마따나 '현실에서는 재현되지 못할 신화적인 인물, 어떤 체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서기 위해 끝없이 투쟁한 천성적인 모반자이자 고통의 한국 현대사를 이겨내기 위해 악마적 카리스마를 휘두른 사람'인 박정희에게 잘 어울리는 뚜렷한 사주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사주를 백운산씨처럼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최고의 사주'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帝王格은 그 사주의 모양이 매우 멋있긴 하다. 하지만 내실을 보면 地支가 모두 刑沖破害하고 있으니 파란곡절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박정희는 白衣殺, 孤辰殺에 時支血刃을 보고 이를 또 刑沖破害로 마구 두들겼으니 아내를 먼저 보내 홀몸이 되고 자기도 말년에 피칠갑이 되어 죽을 팔자이다.

또한 時支에 隔角을 보고 이것까지 刑沖破害로 마구 두들겼으니 말년의 자신 또는 자식들은 모두 성격이 비뚤어지고 방탕·무뢰한이 된다. 이런 사주를 단순히 '帝王格'이라 하여 무조건 부러워만 할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박정희의 사주는 단순한 제왕격이 아니라 去殺留官까지 겹쳤으니 大貴格이요,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建錄, 暗綠에 十干祿까지 다 가졌으니, 몇십년 권력을 잡아 휘두른다는 것도 당연하다는 경탄이 절로 나온다.

또한 財星과 印星이 모두 淸秀하고 거기에 文昌도 들어 총명한 두뇌에다 풍부한 위트, 문장력까지 가졌다. 用神正官이 순수하니 의외로 성품도 온화했을 것이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 나름대로는 완벽하게, 성심성의껏 대하는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地支에 2개씩 들어있는 劫殺과 亡神은 그를 부정직한 賊徒로 만들었고, 사악하고 집요한 성질에 酒色에의 탐닉으로 부하로부터 신용까지 잃게 하여 결국 채홍사 노릇에 골머리를 앓던 그 부하에게 살해되는 惡死를 不免하게 만들었다.

그의 大運을 보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忌神運을 만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이렇게 대운을 좋게 타고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구미보통학교를 다닐 때나 대구사범학교를 다닐 때나 운은 결코 나쁘지 않았으며,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졸업하고,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를 거쳐 한국육군 정보장교로 일할 때도 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의 대운은 31세때까지는 土生金의 대운으로 일관하며, 이는 忌神인 水運을 방조하는 仇神運이므로 결코 좋은 운이랄 수도 없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라 할 정도로 뼈저리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나, 대구사범 재학당시 전교 꼴찌를 다툰 일이나, 일본군장교 다카키 마사오로서 일제패망의 굴욕을 당한 것이나,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 것이 모두 이때의 일이다. 그로서는 소위 운명의 극한, 정열의 극한, 감정과 모험의 극한을 체험한 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대운도 결국엔 확 트이기 시작하니, 그의 나이 32세때인 1948년부터이다. 丁未大運이 들어오니 丁火는 그의 用神이고, 亥未半合은 木으로 化해 喜神이 된다. 이때까지 어느 머리 좋은 빨갱이장교로서 형장의 이슬로나 사라질 운명이었던 그는 동료의 감형운동으로 석방되더니, 군문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고, 제5사단장과 제7사단장 등을 거치며, 후배들에 대한 영향력도 본격적으로 확보해나간다. 이 당시 그는 구정치인들을 '덮어놓고 흉내낸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보았고,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세력, 근대화혁명의 대상'이라고 파악했는데, 이러한 그의 사고는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갔던 것 같다.

1958년부터는 더욱 좋은 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양처럼 뜨거운 丙午大運을 맞아 그는 동지들을 차근차근 규합한 뒤 1961년 군사쿠데타로 남한정권을 접수하고 만다. 구미산골의 가난한 촌놈 자식으로 태어나 일제의 사냥개노릇을 하고 빨갱이경력까지 지녔던 그가 일약 군주의 位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부터 원조금을 받은 데 이어 월남파병으로 달러를 벌어 경제건설을 통해 '한 국가를 통째로 만들어내게' 된다. 이 당시 그는 유교의 실용성과 일제로부터 배운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했고, 이는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해 자전력을 얻어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1968년부터 그의 운은 약간 내리막을 타게 된다. 乙巳大運을 맞게 되니 기본적으로 용희신운이긴 하지만, 乙庚干合, 巳申六合하여 金으로 化해 젊었을 때의 仇神運이 조금 첨가된 것이다. 이때 우리나라 경제는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여 북한을 추월하고 최빈국의 바닥에서 대만 등과 함께 동아시아의 중진국으로 도약하게 되지만, 그의 운명 앞엔 점차 먹구름이 일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3선개헌을 밀어붙이고 유신을 강행한 데 이어 김대중을 납치하고 긴급조치를 연발하며 갖은 발악을 다한다. 대학 교정에 탱크가 밀어닥치고, 그에게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기세로 보아서는 죽을 때까지 해먹을 것 같던 그였지만, 그러한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는 차츰 마지막 숨을 내몰기 시작한다. 1974년(甲寅年) 그는 아내까지 피살 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되는데, 주지하다시피 그의 사주에서 甲寅은 白衣殺에 血刃殺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그의 비극적 종말에 있어 단지 서곡에 불과했다.

1978년(戊午年)에는 그의 사주에 있어서 최악의 대운인 甲辰大運이 들어온다. 甲木은 喜神이긴 하지만 甲己合化土하면 仇神으로 변하며, 辰土는 仇神이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천천히 주색에 탐닉하게 되고, 국정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시작한다. 제2차 석유파동은 그의 숨통을 죄어왔고, 북한 김정일은 땅굴을 파고 들어오며 그의 신경을 압박했다. 더구나 핵무기를 자체개발하겠다는 그의 집념은 미국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충분했다.

1979년(己未年)은 그에게 血支殺이 强旺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甲己合化土로 대운이 仇神一色으로 화했으니, 그의 생애 최악의 해였다. 이 해 7월에 미국대통령 카터가 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다량의 알코올과 니코틴에 쩔어있던 63세의 박정희는 젊은 카터를 깔보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도덕적 인권주의자 카터의 얼굴표정은 다분히 싸늘했다. 이후 8월에 YH사건이 발생하고,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협조를 요청한 김영삼(박정희의 판단에 따르면 조선조의 양반정치전통을 이어받은 사대적 정치인)은 내정간섭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박정희에 의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었다.

그러자 10월 17일에는 1년 뒤 광주항쟁과 맞먹는 파워의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10월 26일 그는 부하 김재규에 의해 총 맞은 걸레가 되어 죽었다. 이때는 甲戌月 辛酉日 戊戌時로 그의 생애 어느때보다도 土生金의 기운이 강한 때였다.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는 이때 그가 '전사'했다고 표현하며, 그가 일생 혁명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대주의, 위선적 명분론, 당파성과 미국식 민주주의가 그를 포위하여 집어삼켰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폭압정치로 제 무덤을 팠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죽인 것이었다.

결국 그는 '帝王格'의 사주답게 일생을 화끈하게 살다 갔지만,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입은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실상 씨앗을 뿌린 정경유착, 계량적 실적위주의 통치, 황금만능주의, 인명경시, 지역차별, 고문정치는 아직도 우리나라를 좀먹고 있는 해악이요 병폐라 할 수 있다. 조갑제 기자는 사후 지식인들의 격하운동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인정이 그를 부활시켰다 하나, 이는 기득권방어에 민감한 수구세력들의 불만스런 향수에 다름 아닌 것으로, 강준만 교수의 말을 따르자면 김영삼의 처참한 실패로 얼룩진 민주화와 개혁의 무덤 위에 잠시 떠도는 유령일 뿐이다. 김영삼도 영남패권주의와 정경유착을 답습했다는 점에서 3당합당 이후로 박정희의 아류가 되었다고 본다면, 오늘날의 정치파탄은 김영삼의 잘못 못지 않게, 박정희때부터 있던 문제점이 곪았다가 비로소 터진 측면도 크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는 민족사의 물질적 제약을 획기적으로 타파했다. 하지만 그 와중엔 수많은 전태일의 희생이 필요했으며,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는 한마디로 우리 현대사에 있어 악몽과도 같은 파시스트적 독재자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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