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rnhard Schlink는 독일 Humboldt대학교 법과대학의 공법/법철학 교수이고, 독일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소설가이기도 하다. 나이 38세에 법과대학 교수생활을 시작하였고 나이 44세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추리소설을 쓰다가, 언젠가부터는 자기 삶의 숨겨진 단서를 찾아가는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굉장히 심오한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The Reader"는 그의 나이 52세 때인 1995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이 소설은 법대생 Michael이, 어린 시절 자기가 사랑했던 연상의 여인 Hanna가 Auschwitz의 여자 간수였음을 알게 되면서 겪게 되는 번민, 그러니까 독일인들이 집단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죄의식과, 개인적으로 그 역사적 책임에 대해 갖고 있는 억울함, 그리고 이전의 전쟁세대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비겁한 탈(脫)역사적 정서와 그에 대한 반성 등의 내용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대 Berlin. 15세 소년이었던 Michael은 우연한 기회에 36세 여성 검표원 Hanna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녀를 통해 성(性)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Hanna에게는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Michael과 관계를 갖기 전, Michael에게 자꾸 책을 읽어달라고 졸라댔던 것이다. Michael이 책을 가져다가 Hanna 앞에서 다정하게 읽어줄수록 둘의 사랑은 점점 더 깊어져 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Michael 앞에서 보여주는 Hanna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Hanna는 말 한마디 없이 Michael의 주변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로부터 8년 후, Michael은 첫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채 Heidelberg대학교의 법대생이 되어 재판정을 견학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Michael은 형사법정에서 Hanna가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원래부터 Michael 앞에서 자기 옛날 일에 대해 전혀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던 Hanna는, 사실 Nazi시절에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몰아넣었던 수용소 감시인으로서의 엄청난 전력(前歷)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의 그녀는 그저 위에서 시킨 대로 일했을 뿐, 자기가 주동적으로 그러한 일들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Hanna에게 그것 외에도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무엇인가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Hanna가 문맹(文盲)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죽음보다도 더 부끄러워했던 Hanna는 결국 법원에서 요구하는 자필대조를 거부하며, 그로 인해 그 모든 학살극의 보고서를 자기가 작성했다는 허위자백을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 결과 Hanna는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Michael은, Hanna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언을 하지 않아버린다. 그 이유는 아마 당시의 반Nazi적 분위기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Hanna의 일에 괜히 얽혀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기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옛사랑 Hanna의 입장을 Michael이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Michael은 Hanna에게 내려지는 그 가혹한 재판결과를 방치하고, 해소할 길 없는 그녀에 대한 미련과 애욕을 괜히 다른 여자한테 풀다가, 결국 그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리고 만다. 그 다른 여자는 Michael의 법대 동창이었고, 나중에 잘 나가는 검사가 될 만큼 장래가 기대되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 전치(轉置)된 욕망으로 인해 얼결에 해치워버린 결혼생활이 그리 오래 갈 리는 없는 법. 결국 Michael은 아내와 이혼해버리고 만다. 그러한 인생파탄의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자 이제 Michael도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기 인생이 그처럼 뒤틀리게 된 것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는가? 왜 그는 남들처럼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가지 못하고, 항상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야만 했는가?
그러다가 결국 그 모든 원인은 어린 시절 Hanna와의 사랑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Michael은 그때부터 Hanna와의 아름다웠던 과거를 하나하나 복기(復棋)하기 시작한다. 이미 자기가 무기징역 선고를 방치했던 여자이지만, 그래도 자기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임에 틀림없는 Hanna에게 일방적으로 책 읽기 Tape를 보내는 식으로 Michael은 '지난날의 추억 되찾기' 놀이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무심한 문맹으로만 남아있을 줄 알았던 Hanna가 그 사이 글자를 알게 되고, 편지를 보낼 수도 있게 되고, 그를 통해 Michael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되자, Michael은 다시 두려움을 느낀다. 옛 환상과의 일면적 관계에만 익숙해져 있던 그로서는, 갑작스럽게 옛 사랑과 쌍방향의 의사소통까지 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그 부담스럽고 벅찬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자기 마음 속에서 이미 이상화(理想化)된지 오래인 Hanna와의 옛 추억을 새삼 더럽히거나 망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Michael은 Hanna가 계속해서 보내오는 편지에 답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편지들을 버리지도 않으면서,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Hanna가 모범수로 석방된다고 하자, Michael은 이제, 그동안 20년 넘게 책 읽기 Tape와 편지로라도 그나마 이어오던 Hanna와의 관계를 완전히 끝맺어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이미 백발의 할머니가 된 Hanna와 오래간만에 만난 자리에서, Michael은 그녀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를 건네기는커녕, Hanna의 옛 죄목(그것도 옛날에 자기 곁을 말 없이 떠났던 죄목이 아니라 느닷없이 '유태인을 학살한' 그 죄목)을 상기시키고, 그녀와 더 이상의 관계는 있을 수 없음을 매정하게 통보한다. 그리고 이에 절망한 Hanna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생을 마감하고 만다. 사랑으로부터 버림 받은 충격도 컸을 테지만, 그동안 읽어온 책들 속에서 점차 깨닫게 된, 옛날 자기 스스로 저지른 죄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다가온 충격도 컸을 것이다.
이렇게 Hanna가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오열하던 Michael은 문득 Hanna가 남긴 유서를 읽어보게 된다. 그 유서의 내용은, Hanna가 자기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Auschwitz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을 위해 써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Michael은 이 돈 전부를 들고 어느 유태인 여류작가를 찾아간다. 그 여류작가는 옛날의 형사법정에서 Auschwitz 희생자를 대표해 Hanna를 단죄하기도 했던 그 여자였다.
하지만 New York의 호화저택에서 여왕처럼 살고 있던 그 유태인 여류작가는 Hanna가 문맹이었으며, 자기 죄를 참회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Hanna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개인적으로 Hanna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일말의 동정심과 연민조차도 끝내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자 Michael은 이 모든 이야기를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펜을 든다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사실 이 스토리를 그냥 단순한 연애스토리,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로만 보면, 이 소설은 참으로 볼품없고 씁쓸한 사랑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평생을 투쟁했던 한 여자'와 '한때는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했지만, 자기의 세속적 야망과 소심함을 이겨내지 못해서 그녀를 방치한 어느 범생이'의 일그러진 사랑 이야기 정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그 어느 쪽도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보기가 힘들다. 우선 Hanna에게는 문맹이라는 콤플렉스가 너무나도 강하였기 때문에, 누군가를 자유롭고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법대생 Michael 역시 Hanna를 제대로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Hanna를 사랑했었고, 그녀에게 일방적인 애정공세를 펼치기도 했었지만, 그녀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그녀의 과거를 알고 난 뒤부터는, Michael에게도 Hanna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을 순 없었다. 결국 Michael은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 Hanna를 도와주지도 않고, 나중에 자기 인생이 헝클어진 후에야 (이미 감옥에 있는) Hanna와의 옛 관계를 복원하려 하지만, 그나마도 그 관계를 일방적인 틀 안에만 가두어두려 하였다. 이 정도면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옹졸하며 소심한 사랑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 소설을 역사적이고 사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소설의 내용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문맹의 Hanna 개인에게 정말로 죄가 있었는지, 아니 Hanna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독일의 전쟁세대 전체가 과연 그렇게 엄청난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좀 더 깊이 검토해볼 여지가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맹의 Hanna라는 은유는 사실 너무나 극단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Hanna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부분의 선량했던 독일인들은, 정말로 악(惡)해서 그런 역사적 범죄들을 저질렀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지(無知)했기 때문에, - 물론 다들 문맹들까지는 아니었겠지만 - 책(冊)의 세계, 인문교양과 사색의 세계,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지성(知性)의 세계로부터 당시 대다수의 인구가 거의 소외되어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선진 국민으로만 보이던 독일인들도, 그러한 유태인학살 등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실제 이 소설의 주장하는 바인 것이다. (반면 홀로코스트를 아직까지 팔아먹으면서, 자기들의 비대한 부와 권력을 교묘히 정당화하고 있는 유태인들에 대해서는, 이제 그때의 그 일을 그만 좀 우려먹으라는 논리도 - 이 소설에 따르면 - 그대로 성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생각도 해볼 수가 있다. 인간은 진정으로 무사유(無思惟)나 무지(無知)를 이유로 면책을 주장할 수가 있는가? 단지 제대로 교육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잘못을 모조리 용서받을 수가 있는가?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다. 하지만 다들 한편으로는 '적당히 나쁜 사람(Moderately Bad Person: MBP)'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MBP들은 대부분 질서를 잘 지키고, 살인이나 방화, 절도 등과 같은 반사회적 범죄와는 애당초 거리가 멀게 살아가며, 윗분들께서 시키시는 여러 가지 명령들이나 수행하며 그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데만 급급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 아니 그렇기 때문에 - 이들 MBP들은 남들이 다 같이 하는 일인 경우, 그 분위기에 휩쓸려 별다른 죄의식 없이 불법을 저지른다. 예를 들면 음주운전을 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다 하면 종종 불법 유턴을 저지르기도 하고, 회사 돈을 횡령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다 하면 회사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소액의 회사 예산을 개인 용도에 지출하기도 하며, 남들이 다 하면 주식 내부자거래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남들이 다 하면 길거리의 불법 DVD를 구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도 막상 큰 재벌기업이나 유명 정치인의 불법사례에 대해서는 비난의 열변을 토해대곤 한다. 남들이 다 하면 거래처와의 불법거래에 참가하기도 하고, 동료들이 다 하면 상사들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적극 돕기도 하고, '회사를 위해' 분식회계에 가담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대해 거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남들에 대해서만 엄격하고 가혹한 잣대를 갖다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책임능력(責任能力)에 대해 법(法)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과연 어떻게 이론적 정리를 해야 하나, 하는 것이 문제된다. 무사유(無思惟), 무성찰(無省察) 또는 무지(無知)는 면책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면책이 된다고 하면 그 사람들로 인해 피해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 모든 문제들이 교육(책 읽기)을 통해서 밖에는 달리 해결될 방도가 없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장기적 해결책일 뿐이고, 법에서는 어쨌든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법적으로는 면책이되 윤리적으로는 면책이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법과 윤리의 차이점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법률가는 그저 법의 구성요건과 위법성의 여부만을 따져서 '편협하게' 법을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이렇듯 난해한 법철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놀랄 만큼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독일어권 소설 최초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오프라윈프리쇼'의 '북 클럽'에 소개되면서 미국 내에서만 1백만 부가 넘게 판매되기도 했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이 소설은 노벨상 수상자 Günther Grass의 '양철북(Blechtrommel)' 이후 현대 독일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년에는 Stephen Daldry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이 영화로 Kate Winslet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나는 약 2주 전에 이 영화를 보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받은 느낌은, Hanna가 결코 자기 열등감 때문에 그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쓴 것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는 글자조차 읽지 못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자기가 어떤 행동을 저질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상, 유태인학살의 엄청난 죄를 자기가 어쨌든 다 피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그녀는 다른 독일인들처럼 자기 잘못에 대해 핑계를 대려면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Hitler가 시켜서 다 했다"는 식으로).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죄를 그것 자체로 인정하려 했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음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Kate Winslet이 워낙 강렬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펼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 눈에, 이 영화에서 Hanna는 결코 불쌍한 존재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 죄에 대해 정직했고, 그 죄의 대가를 자기 반평생에 걸쳐 톡톡히 치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에, 인생의 최후에 있어서는 다른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당당한 여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녀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역사적 죄의식을 간단히 털어버리려 했던 다른 독일인들이야말로, 사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진하게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Bertolt Brecht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Ich, der Überlebende)'이라는 詩가 생각난다.
Ich, der Überlebende (살아남은 자의 슬픔)
Bertolt Brecht
Ich weiß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았던 덕택에)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Aber heute Nacht im Traum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이 친구들이 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Die Stärkeren überleben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Und ich hasste mich.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The Reader (2008)
감독 : Stephen Daldry
원작 : Bernhard Schlink
배우 :
Kate Winslet (Hanna Schmitz),
Ralph Fiennes (Michael Berg),
David Kross (Young Michael),
Lena Olin (Rose/Ilana Mather),
Bruno Ganz (Prof. Rohl)
[re] 책이란 안 읽으면 안 읽을수록 좋은 거입니다.
eccentricer에 대해서는 저도 약간 할 말이 길긴 한데, 댓글로 달기보다는, 걍 독립된 글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
\'단군세기\' 에 보면, 아술은 왕이었어도 거의 병신 수준의 왕이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丙辰 元年 단제(檀帝)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를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진 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 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丁巳 二年 청해(靑海)의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常春)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 궁궐을 구월산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于支)와 우율(于栗) 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庚寅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魯乙)이 즉위하였다]
고대의 일이니 연대는 크게 믿을 것이 못 되지만, 35년을 재위했다는데 치적이 거의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되고, 왕자가 아닌 노을이 즉위했다는 건 농경세력(우가) 이 정권을 잡았다는 뜻이므로 아술 일족은 권력에서 내쫓겼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술은 즉위하자마자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때도 있는 법이다' 하며, 그 동안 죄 지은 자의 죄를 다 용서해 준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아술이 \'어질어서\' 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였다고 봐야 합니다.
오사함도 즉위 8년만에 하나라를 치려다가 별다른 설명없이 급사하였는데, 오사함이 하나라를 쳐서 이기면 힘이 강해질까봐 농경세력들이 암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술은 이들 농경세력들이 분탕치는 것을 벌할 힘이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코 그들이 예뻐서, 혹은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죄는 그냥 둘수록 더욱 강해지지만, 벌할 힘이 없으면 아무 수 없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법을 만들기 때문이니까요.
즉, 아술 뿐만 아니라 다른 자 (우착) 도 단군을 칭하였다 이런 소리입니다. 왕이 힘이 없으니 힘있는 자가 왕을 하시겠다고 나섰다는 얘기이지요.
아술은 숙부 우지, 우율과 농경세력들의 도움을 얻어, 유목세력들의 힘을 빌린 우착을 멸하기는 하였으나 (우착 우지 우율 모두 우서한과 같은 우씨 성을 쓴 걸로 보아 형제거나 의형제였던 듯), 이미 자신의 힘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냥 앉아서 죽기보다는 피눈물을 흘리며 옛날 황궁환인이 도망쳐 왔었던 중동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자손들은 조상인 아술이 힘이 없어서 당하였기 때문에 절대로 지지 않는 전투기계들로 훈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앗시리아와 거란족, 모두 잔인하기로 소문난 종족들이었지요. 지금도 쿠르드족의 잔인성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죄인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회, 죄가 죄가 아닌 사회는 난맥의 사회이며, 군주, 즉 집권세력이 이를 벌할 수 없으면 이를 벌할 수 있는 세력에게 권력이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KNura도 그걸 잘 알텐데, eccentricer의 분탕질을 가만 내버려두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본인이 힘이 없거나, eccentricer의 지도교수가 엄청난 사람이거나, eccentricer가 힘 있고 배경 좋은 녀석이거나, 뭔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KNura도, 홈페이지 문 닫을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듯하군요, 하하하하.
자기도 언젠가 그런 토사구팽의 운명에 처하지 말란 법 없습니다. 강한 자들만 살아남고 약한 자들은 모두 버로우되며, 살아남은 강한 자들끼리 남은 자원들을 놓고 죽자사자 싸우다가, 그 강자들 가운데서도 최강자들의 자손들만이 살아남아, 새로운 역사, 새로운 승리자를 만드는 것이고, 그런 생존경쟁의 순간 속에서 일순간이라도 방심하면 X 된다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남자들이 짝을 얻더라도, 거의 대부분 이들과 사는 여자들은 자식을 낳지 않습니다. 이유야 많지요. \'자유로운 삶에 방해되니까\' \'자연에 피해를 끼치기 싫어서\'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간혹 이런 여자들이 남자와 헤어지고, 맹수처럼 드세게 사는 \'정상적\' 인 삶을 사는 남자와 재혼이라도 하게 되면 꼭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게 다 핑계에요, 핑계.
그들은 역사와 미래에서는 배제되는 것입니다.
승자이거나 뭘 이룬 사람일수록, 위기상황에서는 대단히 랭정해집니다. 여러 번 말했지만, 유방은 자신의 생존에 방해가 되자 자기 아들딸도 수레 밖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이런 사람이었기에 황제가 된 것입니다.
살아남는 자들은, 남을 죽여서라도 이 위기에서는 탈출해야겠다, 즉 \'나\'는 무조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고 승자가 되는 거입니다. 상류층들이 총 들고 오지 같은 데로 들어가서 모험을 즐기는 이유도, 이런 것을 몸으로 직접 익히기 위한 생존술 중의 하나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기가 닥쳐 오더라도, 주위에 가장 만만한 넘 하나 골라잡아서, 그 넘을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살아남더라도, 기어이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지, 그냥 가만히 주저 앉아 있으면 얌전히 남의 밥이 될 뿐입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런 슬픔은 그냥 사치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긴 그 詩를 쓴 브레히트도, 뒤로 돌아서서는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았겠지요,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