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i Frauen


- 이하의 글은 2003년 10월 20일 저의 "개인낙서장"에 게재했던 저의 일기 비슷한 잡글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1. 요즘은 신문도 읽기 싫고 TV도 보기 싫고 저녁때 집에 오면 그냥 음악만 많이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한국가요와 Chanson을 많이 듣게 되어, 며칠전에는 신형원의 '커피향 가득한 거리'란 노래를 몇번이나 되풀이해서 들어보았고, 또 며칠전에는 Alain Barriere의 'Un poete'란 노래가 마음에 들어 몇번이나 듣고 또 들어보았다

이런 노래들을 들으면서 가만히 노래의 연도를 따져보니까 어떻게 된 게 모두가 다 10~20여년이나 지난 옛날노래들이었다. 아,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러버렸다니... 얼굴에 주름살이라곤 하나 없던 내 대학초년생 시절 가을 대학로에 놀러갔다가 어느 아마츄어 가수가 기타를 치며 혼자 부르던 'Un poete'를 듣고 감동에 감동을 받았던 그때의 일이 벌써 14년전의 일이라니...


2.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잠을 네 시간 이상 한꺼번에 잘 수가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요즘은 밤에 자다가 깨면 무조건 책을 꺼내서 다시 잠이 올 때까지 읽는 게 버릇이 되어가고 있다. 주로 읽는 것은 시집이나 소설책 따위들이지만, 어떤 때는 이 책들이 너무 재미있어 밤을 꼬박 새울 때도 있다.

어제 문득 잠에서 깨어 읽었던 소설책은 Robert Musil의 'Drei Frauen'이었다. 역시 Musil의 명성 그대로 보석같이 아름다운 표현들이 곳곳에 깔려 있어 나를 감탄케 했는데, 그 표현들 중 일부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그때 그는 도장이라도 찍듯이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입술을 마치 컵의 가장자리처럼 탐욕적으로 물고 있다가 만족스럽게 떼내고서 입맛을 다셨다. (Nun kußte er sie auch zum Siegel, und ihre Lippen schnalzten danach, so wie sich Lippen befriedigt von einem Trinkgefaß losen, dessen Rand sie gierig umfaßt hielten.)

사람은 원칙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방금 겪은 일은 하나의 심미적 농담에 불과한 것이다. (Man mag Grundsätze haben, dann ist es nur ein ästhetischer Scherz, den man eben mitnimmt.)

그녀는 무엇을 물어보는 데 있어 하나의 독특한 방식을 갖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위탁된 어떤 것에 대해서 물어보듯이, 경외심을 갖고서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이 물어보았던 것이다. (Sie hatte eine eigene Art, sich danach zu erkundigen: so voll Respekt wie nach etwas, das ihr anvertraut war, und ganz ohne Selbstsucht.)

"사람들은 떠들고 개울은 흐르는 법이니, 그냥 내버려두세요." ("Die Leute reden, und den Bach rinnen, muß man lassen.")

대기는 완전히 차가워진 향료였다. 모든 것이 낯선 초록색깔의 금이 간 커다란 항아리 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Voll kaltgewordener Wurze war die Luft, und alles war so, als ritte man in einen großen zerborstenen Topf hinein, der eine fremde grüne Farbe enthielt.)

무지개 끝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 높은 담 너머를 바라보는 데 성공한 사람 역시 아직 한명도 없었다. (So wie noch keiner den Fuß des Regenbogens erreicht hat, sollte es auch noch nie einem gelungen sein, über die großen Steinmauern zu schaun.)

상처와 떠돌이생활이 그 딱지와 함께 그를 뒤덮고 있었다. 마치 지친 사람이 앉으면 안되는 것처럼 그는 자기 집에서 더 오래 묵는 것을 차라리 두려워하고 있었다. (Schrammen und das umherziehende Leben bedeckten ihn mit ihrer Kruste. Er fürchtete sich wohl, langer zuhause zu bleiben, wie sich ein Muder nicht setzen darf.)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구나." ("Du tust das nicht, was du willst, und tust das, was du nicht willst.")

달리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기적이 일어나야만 하며, 운명이 침묵하려 할 때는 운명에게 말하라고 해서는 안되고,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것에 귀기울여야 하는 법이라는 기분이 그에게 들었다. (Ihm war zu Mut, es mußte ein Wunder geschehen, weil sonst nichts geschah, und man darf das Schicksal nicht reden heißen, wenn es schweigen will, sondern soll horchen, was kommen wird.)

하지만 고통 역시 그의 방식은 아니었다. (Aber auch Leiden war nicht seine Art.)



3. 바로 어제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을만큼 무료하고 권태로운 삶을 사는 중이지만, 14년전 대학 초년생 시절, 그 어린 시절의 일들은 단편적으로나마 아주 또렷이 기억나는 것들이 많다. 그 가을 대학로를 거닐던 때 거리에 서있던 가로수들과 가게 진열장에 걸려 있던 그림, 친구들의 운동화 색깔, 아주 많은 것들이 눈 앞에 보듯 생생하게 회상된다.

그때 나의 느낌은 나의 생이 한 곳에 머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 모든 노래들이 나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 같았고, 나는 그저 재수가 좋은 놈이며, 당장은 힘들지라도 그 뒤로는 나에 관한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려갈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감정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모든 걸 잊어야 하고, 다시는 생각지 않아야 하지만, 결코 그 감정의 마지막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요즘은 신문도 읽기 싫고, TV도 보기 싫어진다. 그저 옛날에 자주 듣던 그 시절의 노래만 되풀이해서 듣게 될 뿐이다.

200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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