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tana에 대하여

산타나 밴드의 역사는 밴드의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가 멕시코의 아웃란이란 마을에서 다섯살의 나이로 멕시코의 전통음악을 접한 데서 시작된다. 그에게 음악을 소개시켜준 것은 그의 아버지 호세였는데, 그는 원숙한 마리아키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대부분의 무명예술가들이 그렇듯,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를로스에게 음악이론의 기초를 가르쳐주었으며, 그에게 단 몇 개의 음정을 조합시킴으로써 얼마나 많은 의미를 음악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곧 멕시코 전통음악형식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원하게 된 카를로스가 빠져든 것은, 당시 그가 라디오에서 열광적으로 듣고 있던 사운드, 바로 록큰롤이었다.

1955년 그의 가족은 멕시코 북부의 지저분한 국경도시 티후아나의 붐타운으로 이사한다. 당시 여덟살이던 카를로스는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 시절 라디오전파를 지배하고 있던 비비 킹과 티본 워커 그리고 존 리 후커의 음악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바로 그는 그 마을에서 날리던 밴드인 "T.J.'s"에 가입하게 되는데, 거기서 50년대 록큰롤의 인기곡들을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터취로 연주하게 된다. 그는 그 이후로 수많은 그룹을 전전하며 그의 스타일과 사운드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간다.

1960년에 카를로스의 가족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한다. 한동안 그는 티후아나에 남아 그의 음악적 능력을 현지의 클럽에서 더욱 단련했지만, 결국 1년후인 1961년에 열네살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학교에 가 영어를 공부하면서도 계속 기타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기타테크닉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동시에 록과 재즈, 블루스를 넘나들면서 라틴음악의 거장들인 티토 푸엔테, 레이 바레토 그리고 몽고 산타마리아의 음악들을 융합시키는 그만의 독특한 감각을 길렀다.

동시에 카를로스는 샌프란시스코의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가지 문화와 음악적인 스타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카를로스의 운명이 제때에 제곳을 찾아가게끔 그를 몰아붙인 것과도 같았다. 그 이후의 5년간 그는 계속해서 그의 독창적인 음악스타일을 정교화했는데, 이 스타일은 록의 역사에서 라틴록이라는 새 쟝르를 확립시킨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1966년 그의 나이 열아홉살 때 그는 최초로 자기가 주도하여 조직한 밴드인 산타나블루스밴드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범시켰다. 그 밴드는 기본적으로 블루스와 재즈와 록을 지향하는 밴드였지만, 거기에 쿠바음악적인 구슬픈 흥과 혼이 담겨져 있어 일약 미국 록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밴드의 특징은 기타와 퍼쿠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흥겨운 라틴리듬을 타고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밴드는 백인과 라틴계가 한데 뭉쳐 만든 밴드였지만, 밴드의 리듬섹션만은 전적으로 카를로스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음악가들에 의해 담당되고 있었다.

그 콤보(재즈 앙상블)는 출발부터 성공적이었다. 한마디로 록큰롤의 테크닉과 아프로쿠바니쉬의 리듬이 공존하는 전혀 새로운 음악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1968년 산타나밴드는 당시 매우 유명하던 클럽인 "필모어 웨스트"에 화려하게 등장하였고, 1969년에는 역사적인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지미 헨드릭스, 존 바에즈, 죠 카커, 더 후, 제퍼슨 애어플래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여기서 산타나는 그의 전설적인 연주곡 "Soul Sacrifice"를 신명나게 연주했는데, 그의 현란한 기타멜로디와 연주기법은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그의 이름을 성공적으로 각인시킨 후 산타나는 같은 해 셀프 타이틀 앨범인 "Santana"에서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사이키델릭 음악에 라틴 비트, 아프리카 리듬, 그리고 블루스를 이입한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서서히 퇴조하자 산타나는 라틴 리듬과 정통 로큰롤을 뒤섞은 이른바 라틴록으로 변환을 시도하였다. 1970년에 발표되어 지금도 명반의 칭호를 듣고 있는 제 2집 앨범 'Abraxas'가 바로 라틴록의 시초라 불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노래 "Black Magic Woman"과 맘보의 제왕 티토 푸엔테의 곡을 재해석한 'Oye como va'는 각각 빌보드 차트 4위, 13위에 랭크되어 히트했다. 이때 산타나가 록음악에 접목한 라틴 아메리카의 리듬은 록사운드에 강력한 파워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2백만장이 넘게 팔린 데뷔 앨범 "Santana"와 4백만장이 넘게 팔린 후속앨범 "Abraxas" 이후로도 그의 밴드 음악은 그러한 화려하고도 강렬한 리듬감을 일관되게 지켜갔다.

물론 그의 음악은 모든 것을 너무나도 혼란스럽게 뒤섞어버린 잡탕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세계는 그러한 산타나밴드의 음악을 열린 팔로써 받아들였다. 모든 음반은 크게 힛트하여 8개의 골드음반과 7개의 플레티넘을 따내었다. 히트곡도 수없이 나왔는데, "Evil Ways", "Jingo", "Samba pa ti", , "She's not There" "Europa" "Everybodys Everything" 등은 모두 록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들이다. 특히 "Jingo"는 노래 초반부터 울려나오는 동아프리카 타악기의 울림, 전체적인 리듬을 조율하고 있는 사이키델릭한 기타 사운드에 신디사이저가 훌륭히 어우러져,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음악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산타나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시점인 1973년, "Love Devotion"에서 펼쳐진 카를로스 산타나와 존 맥랄린의 기타듀엣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후 기타 매니아들이 산타나 최고의 앨범으로 꼽는 1976년의 앨범 "Europa"는 그해 일본 평론가협회가 주는 최우수 앨범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명성이 최고에 달했을 때에도 산타나밴드는 그들의 사회적 앙가쥬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지진피해복구를 돕기 위한 "Blues for Salvador"공연을 열기도 했고, 티후아나의 고아소년들을 돕거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돕거나 라틴아메리카의 빈민소년교육 등을 원조하기 위한 공연을 끊임없이 열었다.

특히 카를로스 산타나는 1992년에 그의 아내 데보라와 함께 밀라그로 재단을 설립했는데, 그 재단은 라틴아메리카의 고질인 가난과 절망과 폭력의 악순환을 깨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를 위해 그 재단은 멕시코와 미국내에 있는 무주거자와 고아인 멕시코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거액의 출연을 지금도 소리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미 우드스톡에도 참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산타나의 사상은 록음악의 정신에도 매우 철저하다. "비가 내릴 때 모두가 젖지 않을 수 없다. 창녀로부터 교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음악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라는 메시지를 나누는 것이다."라는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타나의 사상은 과격하리만큼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계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해답도 산타나는 어떤 고상한 철학에서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데서 찾고 있다. 마치 급사들이 싱싱한 꽃을 손에 들고 탁자에 다가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타인을 존중하면 인간은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승승장구만을 거듭하던 산타나의 인기는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들어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가 취한 절충주의 혹은 합종연횡의 작업들은 비난을 받기 시작했고, 80년대는 이래저래 그에겐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자 그는 또다른 변화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 발표한 "Zebop!" 앨범을 통해, 산타나는 여전히 아프리카 쿠바리듬을 고수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기타선율을 강조하는 멜로딕한 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팝뮤직에 좀더 근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1994년의 "Ballads"나 1995년의 "Dance of the Rainbow Serpent", "Light Dance"는 산타나의 스타일변화, 산타나음악의 대중화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사실 산타나의 음악은 1980년대부터 많이 쉬워지고 대중과 가까워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1987년에는 영화음악 "La Bamba"를 담당했고, 1988년에는 카를로스가 재즈섹소폰연주자 봐이네 쇼터와 투어를 가졌으며, 아메리카-러시아간의 이념을 뛰어넘는 최초의 록콘서트에도 참여했다. 앨범판매와 세계순회콘서트도 꾸준히 가져서 도합 4천만장의 앨범 판매고와 2천만명의 콘서트인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록팬들은 그들이 더이상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었고, 그들의 콘서트장은 "한때 우드스톡에 참가했던 전설적인 그룹"을 보려는 옛세대들에게나 약간의 향수를 던져줄 뿐이었다.

그러던 1999년에 산타나는 아리스타 레코드의 클리브 데이비스와 계약을 맺고 초현대적인 앨범 "Supernatural"을 제작하였다. 이 앨범은 음악 자체로서나 참여한 인원의 면모로서나 발매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고, 예상했던대로 산타나는 다 늙은 오십줄의 나이에 다시 세계정상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세계무대에 데뷔한 지 30년이 지난 산타나이건만 조금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채 꾸준히 현대적인 감각을 보완하여 "Maria, Maria", "Smooth"를 전세계적으로 히트시킨 것이다.

500만장이라는 기록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앨범 "Supernatural"로 산타나는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포함, 무려 11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뉴 밀레니엄을 전후로 빌보드 차트를 장기간 점령한 빅히트 싱글 'Smooth'는 전세계의 음악클럽에서 연주되었고, 음악성의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미 산타나는 전통적인 록큰롤이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기타사운드와 융합되면서 새로운 경지를 열었을 때 라틴리듬이라는 새로운 에너지를 록테크닉에 가미시켜 감정적인 깊이를 더한 것만으로도 록 역사에 길이남을 밴드였다. 하지만 매년 100회의 콘서트를 가질 정도로 정력적인 음악활동을 꾸준히 펼치던 산타나가 "Supernatural"을 통해 다시 한번 전세계에 건재를 과시했다는 것은 라틴록, 아니 록음악이 시간의 풍화력을 이겨낼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것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블루스의 열두박자와 불타는 록리프 그리고 관능적인 아프리카쿠바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산타나의 음악은 구슬프고 마음을 움직이는 듯한 도입부에 이어지는 카를로스의 인상적인 기타솔로와 그 특유의 오래 끄는 듯한 음률이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산타나의 음악은 평화와 공감, 기쁨 그리고 이해심으로 충만한 깊이있는 리듬감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으며,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인간존중과 보편적인 형제애를 기리는 축제의 장을 지금도 마련하고 있다.

2000.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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