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글은 2004년 2월 13일부터 2004년 2월 23일까지 저의 "개인낙서장"에 게재했던 저의 잡글 "사회적 시장경제"와, 그로 인해서 2004년 2월 24일부터 2004년 3월 9일까지 제 홈페이지 방명록에서 벌어졌던 여러 손님들과의 논쟁글들을 발췌, 요약해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1. 최근 들어 내 홈페이지에 방문하신 분들 가운데 자기 자신을 '386'으로 지칭하시던 분이 한 분 계셨다. 그 분께서는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 '그날이 오면'과 같은 옛날 내 귀에 익던
여러 구호들을 외쳐대시더니만, 갑자기 나더러 '자신의 젊은 날을 부끄러워
할 염치조차도 없는 자'라고 단죄하시다가, 급기야는 '청년극우' '신자유주의자' 등의 거친 규정까지 내리셨는데, 그런 폭언들을 정신없이
듣고 나니까 옛날 학생운동한다고 뛰어다니시던 여러 선배들이나 동기들의 모습이 내 눈 앞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그 선배들과 동기들의 철저한 점조직성향, 지하로 파고들면서 자기자신을 숨기고 익명과 가명을
즐겨쓰던 은둔과 음모의 경향, 내부의견통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습성, 자기조직 밖의 사람들에 대한 잔혹할
정도의 공격성과 가학성, 자기발언이나 행동들이 몰고올 대외적 피해들에 대한 철저한 정치적 무책임성과 무관심성
등의 여러 문제점들이 십여년만에 다시금 생생하게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소위 '386' 선배들과 동기들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이번에도 다시 내게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달까?
물론 나는 소위
'386'세대란 사람들에 대해서 반드시 나쁘게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쨌거나 옛날의 폭압적인
군부독재에 맞서서 거대한 전선(戰線)을 형성했던 사람들로서 존경을 받아야 할 점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정권폭력에 반대하고, 자본독점이나 정경유착, 부정부패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특유의
사회비판적 사고를 대학문화 속에 확립해갔던 사람들이었으며, 예전의 4.19세대나 6.3세대가 그러한
사회비판의식을 급속히 상실하며 기성세대에 무력하게 흡수돼갔던 반면에 그들 386세대들은 자기 젊은 날의
사회비판적 사고를 아예 자신들 각자의 일상생활 속에 뿌리내리도록 하면서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진보적 에너지를
형성하고, 그 집단적인 열정으로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을 연달아 탄생시키면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키는 등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큰 역할을 맡아 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아니
여태까지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들의 역할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내가 우리나라의
현실을 아직까지도 많이 낙후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여전히 냉전적 사고나
소수지배계층의 특권, 독점자본주의, 지역주의의 폐해 등이 온존하고 있는 한 이들의 젊고 순수한 열정은 아직도
더욱 발휘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고 나는 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386세대가 독재정권과 너무나도 힘겨운 폭력적 투쟁을 벌이다 보니까 자기들도 부지불식간에 적들의 모습을
닮아가서 폭력적 군사독재정권과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한마디로 운동에 가부장제, 권위주의,
그리고 군바리식 상하서열주의와 강제명령주의의 메카니즘을 끌어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피와 같은
학생회비를 걷어다가 거대한 대중쇼를 벌이고, 심지어는 주체적 수령관에 매몰되어 초기의 소박한 자유주의적
문제의식에서 벗어나(87년 6월 항쟁은 사실 군정종식이라는 자유주의적 과제를 위한 투쟁이었다) 시대착오적 민족주의나 권위적 집단주의, 노동자혁명주의의 이념에 빠져들어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에 도움이 되긴 커녕 오히려 심각한 걸림돌로 자리잡게 되었던 측면도 이들에게는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386세대들 가운데 상당수는 1994년 이후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서 일정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 대신에 21세기 이후부터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제3의
모델로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Sozialdemokratismus)와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에 천착해 들어가는 새로운 전향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자기들의
이상향을 북한에서 독일로 바꾸는 대전환을 감행하기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과연 이들 386세대들이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된 지식을 갖고서 대안을 찾으려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들 386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좌파지식인이며 인터넷공간의 대표적 좌파논객이자
독일유학출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똑똑했던 사람으로도 일컬어지는 진중권의 글을 읽어보면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적 시장경제'에 관한 대목들이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그 중에
하나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진중권 wrote: 사회주의의 여러 가지 실험 중
그나마 생존가능성을 현실적으로 검증받은 것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뿐이다. 중국이나 쿠바나 북한의 체제는 그
내부의 문제점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한 우리 나라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의 선택은 명확하다. 진보정당은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장래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대체할 대안체제가 탄생하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좌파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사회주의적 계획을 혼합한 '사회민주주의' 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사회민주주의'를 진중권처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사회주의적 계획을 혼합한' 것으로 쉽게 정의할
수가 있는 것일까? 솔직히 이런 식으로 사민주의를 정의하면 이 세상에 사민주의 아닌 정치시스템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원래가 '혼합'이라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잡탕'을 의미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처럼 서로 완전하게 대립되는 것을 그냥 이렇다 할 기준 없이 '혼합'
내지 '잡탕'으로 뒤섞어서 이것을 마치 그럴싸한 대안체제인 것처럼 대중에게 선전하려 한다면, 진중권 그는
학자로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정치이론가로서도 그 기본적인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진중권 그는 유시민이 'social liberal'을 얘기하자 이를
형용모순이라면서 즉각적으로 반박을 해대고 있는데, 그 와중에서 그는 자기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말을 유시민에게 퍼부어서 나로 하여금 쓴웃음을 자아내게도 하고 있다. 한번 진중권 그가 했던 구체적 발언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진중권이 유시민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들이 진중권 그 자신에게도 그대로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확인해볼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진중권 wrote: 실제로 그 표현(social liberal)은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그 자체가 형용모순이어서 도저히 "학술적인 개념"이 될 수가 없다. 한 마디로, 그것은 학적
개념이 아니라 어떤 실용적 목적을 가진 정치적 레토릭에 가깝다. 논리학적으로 그 표현은 '리버럴리즘'이라는
낱말이 가진 두 가지 다른 의미를 슬쩍 섞어놓는 '애매구의 오류'에 속한다. [...] 이념적 의미에서의
'리버럴리즘'은 정치적 차원에서는 공동체주의, 경제적 차원에서는 사회(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이런
이념적 의미의 '리버럴리즘'이라면 한 정당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 경우
'리버럴'이라는 말은 그 앞에 붙은 '소셜'이라는 말과 충돌하여, 결국 형용모순이 될 수 밖에 없다.
유시민씨는 "이게 가능하다"고 말하나, 네모난 동그라미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경험적 불가능이 아니라 논리적 불가능이다.
유시민의 'social
liberal'이 진중권 말마따나 '네모난 동그라미'라면 그럼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적 시장경제'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중권 자기 말대로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사회주의적 계획을 혼합한' 것이라면 그 '사회민주주의'는 '네모난 동그라미'가 아니고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social liberal'이 '형용모순'에 속한다면, '계획적 시장경제'나 '시장적 계획경제'란 말
역시도 '형용모순'에 속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심각한 자기모순을 저지르면서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적 시장경제'를
말하는 사람은 비단 진중권 한사람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의 글을 보게 되면 거의 단순, 과격, 무식하게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를 개념정의해대고 있는 것이 눈에 띄고 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대충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가 있다:
김누리 wrote:
스탈린식 소련 모델은 도식적인 평등의 이념이 자유의 이념을 질식시킨 경우이다. 평등의 광장이 자유의 밀실을
황폐화시킨 것이다. 반면 미국 모델은 허구적인 자유의 이념이 평등의 이념을 왜소화시킨 경우이다. 자유의
밀실이 평등의 광장을 동공화시킨 것이다.
이에 대한 제3의 길로서 독일 모델은 도식적인 평등과
허구적인 자유를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평등에는 탄력을, 자유에는 실체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사회, 경제적인 실현이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이다. 탄력적 평등과
실체적 자유에 기초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동공화된 평등과 허구적 자유에 바탕을 둔 미국의 자유시장
경제 모델에 대한 현실적 대안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원리상의 차이가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우선 미국과 독일의 대학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의 경우 이른바
'일류 대학'들은 대부분 학비가 엄청나게 비싼 사립대학들이다. 미국에선 좋은 대학일수록 등록금이 비싸기
때문에 대학의 우열은 대체로 학비의 다소와 일치한다. 한 예로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와 현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를 배출한 명문여대 웰슬리의 경우 1년 학비가 2만 4,000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3,000만 원에 이른다.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등 유명한 명문 사립대학의 학생들은 이보다도 훨씬 더
비싼 학비를 내고 학교에 다닌다. 미국이 아무리 잘 사는 나라라 해도 1년에 3,000만 원 이상의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모를 가진 복 받은 학생은 그렇게 많을 수 없다(어떤 사람은 미국 대학엔 장학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어 사회적 관계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육의 기회를 장학이라는 '시혜'로 바라보는 시각과 개인의 당연한 '권리'로 바라보는 시각 사이에는
원칙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내 돈 내고 내가 질 좋은 교육을 받겠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가'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미국식 '자유'의 모습이다. 한편 이러한 '자유'를 누릴
사회적 기반을 애초에 상실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신화가 제공된다. 그 신화의 이름은 '아메리칸
드림'이다. '접시 닦기 이데올로기', '마이클 조던 현상' 등은 이 신화가 낳은 자식들이다.
이에 반해 독일에는 대학에 학비라는 것이 없다. 1년에 대학생이 지불해야 하는 돈은 고작해야
학생자치회비 100마르크, 그러니까 6, 7만 원 정도이다. 게다가 학생들의 생활비는 정부에서 장기 저리로
대부해 준다. 이것이 바푀크이다. 이러한 제도는 평등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육은 아버지 돈지갑의 부피에
'자유롭게' 내맡겨질 개인적인 사안이 아니라, 사회가 연대 책임을 져야 할 사회적인 책무라는 생각이 그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또한 독일에선 대학 입학 시험도 없고, 소위 일류 대학도 없으며,
누구나 마음대로 학과와 대학을 선택하고, 또 마음대로 대학을 옮길 수 있다. 이런 제도도 일정한 학습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모두 공평한 학습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평등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 독일의 경우 의료, 유치원, 주거 등 사회 생활의 기본 인프라에
해당되는 것들의 비용은 일정액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재분배의 정신에 따라 부담금이 책정된다.
구체적으로 필자의 체험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추상적 이론이나 논리보다 더욱 생생하게 독일의
사회체제를 보여 줄 터이니까.
프랑크는 필자의 친구로 같은 아파트 바로 위층에 살며,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둔 월수입 4,000마르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다.
필자는 당시 학생이었고,
월수입은 1,500마르크였다. 그런데 프랑크와 필자는 월수입이 거의 세 배 가량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 수준은 비슷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선 의료보험. 필자의 보험료는 50마르크,
프랑크의 보험료는 약 600마르크였다. 독일에서 보험료는 원칙적으로 수입의 14퍼센트이다. 필자의 경우는
최저 소득자에 해당되므로 이 원칙과 관계없이 최저 보험료를 냈다. 보험료의 차이에 따른 의료 서비스의 질적
차이는 전혀 없으며, 추가 진료비나 약값도 없다.
다음으로 유치원. 필자의 아이와 프랑크의
아이는 동네의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 우리 아이는 한 달에 34마르크, 프랑크의 아이는 305마르크를 냈다.
수입과 가족 수에 따라 유치원비가 결정된다. 필자는 당연히 최저 요금이다. 유치원비의 차등에 따른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전혀 없다.
끝으로 집세. 독일의 주거 방식은 월세를 내는 임대 주택이
대부분이다. 주거비 또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입에 따라 다르다.
프랑크와 필자는 똑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았지만 지불하는 월세는 달랐다. 프랑크는 원래 집세인 1,400마르크를 다 냈고, 필자는
400마르크를 냈다. 필자는 저소득자이기 때문에 주 정부로부터 집세의 절반이 700마르크를 보조받았고,
그래도 필자의 수입에 비해 집세가 상대적으로 비싼 점을 들어 주택청에 별도로 주택보조비를 신청하여
300마르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한 달 간의 기본 생활비를 합산해 보면 필자의 경우 의료보험료
50마르크, 유치원비 34마르크, 집세 400마르크를 모두 합쳐 484마르크이고, 프랑크는 의료보험료
600마르크, 유치원비 305마르크, 집세 1,400마르크를 모두 합쳐 2,305마르크이다. 프랑크가
필자보다 대략 2,000마르크를 더 낸 셈이다. 그 결과 프랑크에게는 약 1,600마르크가 남고, 필자에게는
1,000마르크 정도가 남게 되어, 결국 서로 비슷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독일에서는 '사회적 재분배'라고 부른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실제 모습은 이런
것이다.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수입이 배분되지만, 국가가 기본 생활 경비를 차등 책정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수입을 재분배함으로써,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 평등하게 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체제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사회가 가능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7년 간의 독일 생활 내내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물음이었다. 사회체제로서의 독일 모델은 유럽 계몽주의의 합리성의 원리, 기독교의 '사랑'의 계율,
장구한 노동운동의 연대 정신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는 것이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사회적 시장경제' 원리의 창안자가 독일 사회민주당이 아니라, 기독교민주연합의 수상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단순히 노동운동만의 성과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요구가 기독교적 사랑과 '합리적으로' 결합한 결과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잠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와 우리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서의 실업 고통의
체감도를 비교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슈뢰더는 실업 문제를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정책 과제로 보면서 고용창출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지만, 실업으로 인한 실제적인
고통의 강도는 독일과 우리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독일에서는
실업자도 최저 생계에 필요한 실업수당을 지급받고, 질적으로 차별 없는 의료보험의 혜택을 누리며, 실업자의
자식들도 대학교육을 받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 우리 나라 실업자들의 참담한 현실과 비교해 보면 슈뢰더가
실업의 고통에 대해 늘어놓는 탄식은 사실상 거의 '엄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로서는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지도 모른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소득을 그런 식으로 결국 사회에 '빼앗긴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하지만 독일 사회는 별탈없이 잘
굴러간다. 그들은 사회적 연대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적 평화와 안정을 얻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가릴 것 없이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전형적인 정서가 불안감이라면 독일 사회의 특징적인 정서는 안정감이다. 자신의 소득을
투명한 조세 체제를 통해 사회적으로 나눔으로써,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정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 "게르하르트 슈뢰더 지음/김누리 옮김, '아직도 시간은 있다',
생각의나무 펴냄"이란 책의 역자서문에서 발췌)
물론 이러한 김누리 교수식의 '사회적
시장경제' 개념이 일부 386 진보지식인들의 얼렁뚱땅 독일지식자랑에만 그친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냥 웃고
넘어가줄 수도 있는 노릇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회적 시장경제' 개념은 어느새 '민주적
경제체제'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우리나라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포함되었으며, 실제로 우리나라 노동조합들의
대정부 요구사항에서도 현실적인 기준으로서 사실상의 규범력을 갖게까지 되었으니, 이제는 386의 선두주자
김누리 교수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내가 그냥 웃고만 넘어갈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독자
여러분들께서 김누리 교수식의 '사회적 시장경제'가 민노당의 '민주적 경제체제'와 뭔가 다른 의미를 갖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아래의 민주노동당 강령 원문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라겠다:
우리는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이것은 '사회적 소유'를 바탕으로 하여 시장을 활용하는 경제체제로서, 경제의 효율과 안정을 추구함과 동시에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에 대한 평등한 분배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민주적 경제체제는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다양한 소유와 시장적 조절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한다.
그리고 직접 생산자와 생산 대중이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을 보장한다. '사회적 소유'는 국가적
소유, 공공적 소유, 협동조합 소유, 민주적 참여기업 등을 포괄한다. [...]
우리는
국민경제의 재생산에 있어서 시장을 활용하되 '민주적,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둔다. 이를 위해 국민경제를
기획하고 사회적으로 조절하는 경제정책위원회를 창설한다. 위원회는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대표'를 중심으로
하고 정부와 기업 경영자 대표가 참여하는 형태로 구성되며, 경제 전체의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자원의 배분과
소득의 분배가 효율성과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시장을 감시,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따옴표 찍기와 밑줄 긋기는 내 맘대로 했음)
물론 나는 요즘 박사논문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상황이다. 그래서 국내 어떤 학자가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soziale
Marktwirtschaft)'에 대해 완전히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를 하더라도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사회적
시장경제'와 독일의 현대경제사에 관한 글을 쓰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얼마전 내 방명록에 남겨진
jeff님이라는 어떤 손님의 다음과 같은 글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jeff님 wrote: [...] 너 독일유학생 맞기나 한건지 궁금하다. 니가 살고
있는 독일처럼 산업노동자와 공무원노동자(공공노동자) 모두가 기업경영과 국가정책을 공동결정한다고 생각해봐.
독일처럼 노동자중심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자본가들에 의한 소유편중 현상"과 "노동의 소외현상"이
시정돼서 국제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정치문제, 경제문제가 해결된단다. 그럼 국가와 국민 모두가
잘 살고 지난 월드컵때처럼 민족 모두가 기를 펴면서 신바람나게 살게 될텐데 니가 여기에 딴지걸려 한다는
거니? 너 군중한테 함부로 개기다가 뒤지게 줘맞는 걸 즐기는
변태니?
좀 치기 어린 발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분 말씀마따나 내가 '변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의 386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에 관한 글을 내 스스로가 쓰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물론 내가 너무 자세하게 쓰면 몇백 페이지 분량의 박사논문이 되어버릴테니까 (사실
이에 관한 내용들이 내 박사논문에서도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냥 간단간단하게 요점만 짚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만약 '사회적 시장경제'에 관해서 나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신 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여기서 내게 토론을 요청하시기를 바란다는 점도 밝혀두고자 한다. 하긴 그분들과 과연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부터가 회의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 그런데 지금은 잠이 몰려오고 있는
관계로 나머지 내용은 추후에 보충하기로 하겠다. 오늘은 그냥 이 정도에서 중단...
-_-;;
2004. 2. 13.
지나가다 wrote:
아직 전부 읽진 않았으나 공감가는 지적들인 것 같군요. 며칠전 특검 청문회인가에서 열우당 김근태의원이 자리를 점거하고 있는 것에서 똑같은 문화가 김의원같은 성품괜찮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깃들여져 있다는 걸 느꼈지요.
지나가다 wrote:
미국이 아무리 싫어도 그들의 합리주의, 그래도 대화로 상대를 설득하는 노력을 많이 하는 그 문화가 부럽습니다. 운동권의 문화는 바깥의 보통의 문화보다도 더 오염되어 있고 낙후되어 있었죠.
지나가다 wrote:
외면했었던 옛날의 운동권에 대한 기억은 그러나 차라리 요즘의 시민연대라는 실천가능한 위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다시 조금 참신함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추상적 이념논쟁보다 실천적이고 대중적인 일을 벌이는 그들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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