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시장경제 논쟁 (4)


- 이하의 글은 2004년 2월 13일부터 2004년 2월 23일까지 저의 "개인낙서장"에 게재했던 저의 잡글 "사회적 시장경제"와, 그로 인해서 2004년 2월 24일부터 2004년 3월 9일까지 제 홈페이지 방명록에서 벌어졌던 여러 손님들과의 논쟁글들을 발췌, 요약해서 옮긴 것입니다. -


고래 wrote:

2. 4. 사회적 시장경제는 우리나라의 좌파, 진보주의자들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사실 나는 '사회적 시장경제'가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편이지만, 많은 분들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영화와 규제철폐와 복지축소, 노동시장 유연화를 부르짖는 '신자유주의'보다는 그래도 '사회적 시장경제'가 더 인간적이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실 수밖에 없을 것이라 믿어진다.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낮추고, 사회복지혜택도 더 줄이자는 주장에 다름 아닌데, 우리나라와 같이 노동자들의 생활상이 비참하고 빈민이나 실업자에 대한 구제제도도 미흡한 나라에서는 어쨌거나 '신자유주의'보다는 '사회적 시장경제'가 더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차 강조했듯이 '사회적 시장경제'가 '신자유주의'와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쉽게 답변을 해드릴 수가 없다. 본래 Alfred Müller-Armack과 Ludwig Erhard가 자기들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론적 기반을 Walter Eucken류의 '질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독일버젼)에서 찾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한때 Alexander Rustow 같은 질서자유주의자는 자기 스스로는 물론이고 자기 동료 Walter Eucken까지도 '신자유주의자'에 속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이런 점에서 Alfred Müller-Armack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Walter Eucken의 '질서자유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모두를 다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질서자유주의자' Walter Eucken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창시자 Alfred Müller-Armack은 똑같은 'Freiburg학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이들 모두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자신들이 더 가깝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국가의 개입에는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1920년대 전세계 대공황사태 등을 목격하면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방임(Laissez-faire)'원칙을 폐기하고 그 대신 시장질서의 제도적 테두리를 창출하고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예외적 개입을 긍정하는 등 '신자유주의'(1940~1950년대적 의미)의 기본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사람들이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또한 아무래도 Nazi시절에 비한다면 Ludwig Erhard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보다 폭넓게 자유시장원리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Ludwig Erhard와 Alfred Müller-Armack의 Nazi경력을 이유로 그들을 무조건 반자유주의자로 몰아붙이기도 힘들다. 예를 들면 Nazi시절에는 상품가격들을 정부가 일일이 다 지정해주었지만, 2차대전후 수립된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가격결정기능 등이 시장자율에 폭넓게 맡겨졌다는 사실만 봐도 '사회적 시장경제'가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경제모델'인 것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질서자유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는 '신자유주의'보다 'Keynes주의'에 더 가까운 경제모델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정부가 시장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시장개입을 하되 오로지 시장에 적합한 방법(예를 들면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으로만 개입을 한다는 사고방식 등이 'Keynes주의'와 유사성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eynes주의자'들 역시도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부르고 다녔던 것은 마찬가지이고, '신자유주의'라고 해서 위에서 보듯 정부의 개입을 완전히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므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Keynes주의'에 가깝다는 이유로 '신자유주의'와 무조건 대립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자'들 가운데서 최고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Hayek의 저서를 읽어볼 때 그의 생각이 과연 '신자유주의'인지 'Keynes주의'인지 아니면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인지 혼동스러운 부분이 많이 발견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Nichts durfte der Sache des Liberalismus so sehr geschadet haben wie das starre Festhalten einiger seiner Anhanger an gewissen groben Faustregeln, vor allem an dem Prinzip des Laissez-faire. (그 어떤 것도 자유방임의 원칙 같은 거칠고 조잡한 규칙에 자유주의의 추종자들이 얽매였던 것만큼 자유주의의 본질에 해를 입힌 것은 없었을 것이다.)"

* Friedrich A. Hayek, Der Weg zur Knechtschaft, Olzog Verlag, S. 37

"Die Aufrechthaltung des Wettbewerbs ist sehr wohl auch mit einem ausgedehnten System der Sozialfursorge vereinbar - solange dieses so organisiert ist, daß es den Wettbewerb nicht weitergehend lahmlegt. (만약 그것이 경쟁을 계속 마비시키지는 않게끔 조직된다면, 광범한 사회보장체제 역시도 경쟁원칙의 견지와 매우 잘 부합될 수가 있다.)"

* Friedrich A. Hayek, Der Weg zur Knechtschaft, Olzog Verlag, S. 38

물론 1980년대 이후 Margaret Thatcher나 Ronald Reagon 같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주장했을 때의 '신자유주의'는 Hayek나 Eucken식의 '신자유주의'와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신자유주의'의 개념을 오늘날 정치적 의미로만 쓰기로 결심해본다면, 예를 들어 미국의 Milton Friedman 이후 Chicago Boys들이 주장해서 Margaret Thatcher나 Ronald Reagon에 의해 실현되었던 '신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자유주의는 Hayek나 Eucken의 신자유주의와는 달리 대기업의 독과점이나 시장지배, 제3세계의 독재정권, 강대국의 침략전쟁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별로 갖지 않은 이념이었고 그저 미제국주의자들과 미국의 대규모 다국적자본만을 위한 '신자유주의'였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볼 때, 이제 '신자유주의자'라 함은 이런 미국식 극우세력들과 똑같은 부류인 것으로 묶어서 조금 험하게 욕을 퍼붓고, Hayek나 Eucken은 그러한 부류에서 약간 분리를 시켜줄 필요가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를 '변질되고 타락한 자유주의'로 개념짓고, '신자유주의'와 '원(源) 자유주의'를 서로 분리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Alfred Müller-Armack과 Ludwig Erhard가 말했던 '질서자유주의'와 Walter Eucken이 말했던 '질서자유주의'도 서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짚고 넘어갈 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Alfred Müller-Armack과 Ludwig Erhard는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와 '질서정책(Ordnungspolitik)'의 이름으로 수많은 정부개입과 시장통제를 정당화했지만, Walter Eucken은 통화조절과 독점규제 이외에는 정부가 절대로 시장에 개입하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Alfred Müller-Armack과 Ludwig Erhard가 필요이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국가보조금의 액수를 늘리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재벌규제정책에 대해서는 미온적이었던 것에 Walter Eucken은 개인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자유주의는 원래부터 정경분리를 핵심으로 아는 이념이다. 본래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절대권력이란 마치 정치적 절대권력처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위험요소로서 이해되며, 이러한 절대권력들은 당연히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절대 서로 친해서는 안되는 필수분리대상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Nixon정권이나 Reagon정권에 부역했던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나, 독일의 Alfred Müller-Armack과 Ludwig Erhard 같은 '사회적 시장경제'주의자들은 출발때부터 정경유착을 기본수단으로 하여 대자본과 국가권력간의 협력을 위주로 독과점적 시장경제를 이끌어나가려 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왜곡된 자유주의자'로서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1958년에 제정된 독일의 Kartell금지법(GWB = Das Gesetz gegen Wettbewerbsbeschrankungen)에서 Kartell금지의 요건 역시도 원래는 기업담합 그 자체를 완전히 금지하는 내용으로 법안이 제출된 것이었지만, 당시 독일대기업 경영진들이 이에 반대하자, '사회적 시장경제'를 신봉하던 CDU소속의 정치가들은 이를 기업담합의 '남용'만을 금지하는 수정안으로 교체해버리는 등 '사회적 시장경제'주의자들은 시장경쟁보다 오히려 더 대기업의 이익에 열심히 복무했던 사람들임이 분명했었다.

사실 자유주의자들(그 중에서도 Die Linksliberalen들이나 Walter Eucken류의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원래 '국가경쟁력'이나 '국가적 경제성장'보다 '개인의 실질적인 경제적 자유보장' 및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개인적 자유의 제한'을 더 많이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자유주의좌파들이나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국가의 개입은 검열과 같은 직접적 개입도 물론 나쁜 것이었지만, '국익'을 이유로 대기업의 시장독점을 국가가 조장하는 간접적 개입 역시도 그 이상으로 나쁜 개입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Ludwig Erhard나 Alfred Müller-Armack과 같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주창자들은 명목상으로야 자유주의자를 자처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개인의 자유'보다도 '국가의 경제성장'이나 '국가경쟁력'을 더 중요시하였던 국가주의자들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 CDU 경제관료들은 독일의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 대기업이나 거대장치산업의 육성을 통해 국가적으로 더 규모의 이익(scale merit)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대재벌을 해체하긴 커녕 오히려 재벌기업들에게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그들간의 합병과 담합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의 이상을 배신하는 데 오히려 더 힘을 기울여왔던 것이다.

그밖에도 그들 '사회적 시장경제'주의자들은 대부분의 경제정책을 우리나라 민주노동당의 강령 그대로 "국민경제를 기획하고 사회적으로 조절하는 경제정책위원회"에서 대기업 경영진, 대기업 노조대표, 농민대표 등과 함께 공동결정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러한 경제정책위원회는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나오는 그대로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다양한 소유와 시장적 조절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경제 전체의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자원의 배분과 소득의 분배가 효율성과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시장을 감시,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경제정책위원회들은 실제의 경우 공동결정에 참여한 자들의 뜻에 따라 그들만의 이권과 독점을 위해 국가의 예산을 공동으로 담합해서 끌어다 쓰는 결정만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그 결정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을 그만큼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역할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러한 위원회들을 통해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던 독일의 역대정부들은 - 우파정권이건, 좌파정권이건 -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조금을 그러한 공동결정에 참여한 경제주체들에게 쏟아부어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과연 사회적 정의에 합치되는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높은 수입관세를 통한 국내산업자본 및 국내농업자본 보호정책과 함께 중요산업에 대한 보조금과 면세혜택, 융자의 편의 등 모든 형태의 지원을 '공동결정'의 이름으로 집행해줘야 했던 것은 '공동결정'의 지나친 비대화를 초래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의 것이 아닌 남의 것에 대해 단지 자기들이 뭉쳐진 힘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공동결정에 참여하여 혜택을 입은 대기업들은 그 대신에 노동자들의 의료비와 실업보험 기타 여러가지 부담을 떠맡는 '사회적 연대'의 모습을 자발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기업이 일어서고 망하고, 노동자가 임금을 얼마 받고, 농어민이 농수산물값을 얼마 받고 하는 것이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유관단체대표들간의 공동결정에 의해 판가름나며, 국가의 모든 자원이 시장에 의한 조절이 아닌 정치력과 조직력에 의해서 배분되는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소수의 이익집단 대표들에게만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집중시키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의사결정이 국민들의 투표와 대자본의 기부금에 의해서 선출된 의회권력(보수적 양대정당)에 의해서 내려졌지만, '사회적 시장경제'에서는 이러한 결정이 '경제정책위원회'나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수많은 위원회들의 이름으로 내려졌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 경제적 의사결정을 경제적 원리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원리에 의해서 해결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나 '사회적 시장경제'나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처럼, 독일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의 반경제적 모습에 대한 책임은 우파정당인 CDU, FDP 뿐만 아니라 좌파정당인 SPD 역시도 똑같이 부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전세계최고를 자랑하는 독일노동자들의 고임금을 바탕으로 엄청난 조합원수와 자금동원력을 과시하며 막강한 경제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던 독일노총(DGB)과 독일금속노조연맹(IG Metall)은 사민당 정치인들을 통해서 '조합주의(Korporatismus)'적인 이익의 관철을 언제나 기도했으며, 사민당 정치인들은 이러한 노조들의 요구를 대기업들의 요구와 적절히 타협시키며 거대노조와 대기업으로부터 동시에 정치자금을 받아먹고 살아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CDU, FDP와 달리 SPD는 노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대기업의 돈에 그리 얽매일 필요는 없었고, SPD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정치자금의 수수는 CDU에 비해 비교적 투명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정권을 잡는다면 대략 SPD 정도의 깨끗한 모습을 보이게 되지 않을까 나도 개인적으로 기대해보게 될 정도이다. 또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은 미국보다 더 높은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약속해주었으며, 노동자들을 해고의 공포로부터 거의 완전히 해방시켜준 긍정적 측면도 없지 않았다. 아무리 거대한 독점적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더라도 그 거대한 독점적 권력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한 권력이라면 이러한 권력은 긍정되어야 한다는 노조측의 주장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노.사.정.협조주의와 공동결정제도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따뜻한 공동체주의의 성질을 갖는 면도 없지 않았다. 대기업들이야 국가가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이상 파산당하거나 퇴출당할 염려가 없어서 좋을 것이고 (大馬不死라고 하나?), 노동자들이야 한번 취직만 하면 기본적인 생계가 죽을 때까지 보장되는 데다가 다른 나라 노동자들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도 있으니 국가나 기업이 고맙기만 할 것이고, 대학생들이나 교수들, 의사들, 농민들 역시 이러한 사회보장체제 속에서 안정적인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 기분이 좋을 것이고, 한마디로 이러한 '공동결정'에 참여하기만 하면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쌍방향 의사소통'이 실현되는 데다가 그만큼 짭짤한 경제적 이득도 챙기고 하니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끼리끼리 사이 좋은 쿵작작 연합체의 바깥에 놓이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독일에서 무려 5백만명의 숫자에 육박하고 있지만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그 어떤 이익단체도 갖고 있지 못한 다수의 실업자들을 생각해보자. 지금 독일의 실업률은 10%에 달하고 있고, 특히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20%를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실업자들을 대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고교나 대학졸업 이후 취업 한번도 못해본 청년실업자들은 실업수당도 받을 수가 없으니 이들에게 언제까지 최저생계비만 받고 견디면서 극빈자생활을 해나가라고 독려할 수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대학이든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이들이 취직을 하든 박사과정을 밟든 뭔일을 할 수 있을텐데, 이미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나 교수들은 기업경영진이나 교육담당관 등과 담합해서 어떻게 하든 노동자나 교수의 신규채용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를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들 실업자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임금 같은 것 60~70%만 받아도 상관이 없다. 일자리만 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업가들은 '우리야 물론 너를 싸게 쓰면 좋지만, 노조때문에...'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다. 노조의 철밥통때문에 취직이 안되는 것이다. 어차피 취직이 안되어서 장사라도 해보려고 하지만, 경기는 언제나 침체상태다. 경제가 침체돼있다 보니까 가계소비는 꽁꽁 얼어붙어서, 취직을 안하는 대신 청년실업자들이 장사를 하려 해도 장사가 될 턱은 없고, 같은 나이또래에 대기업에 취직해 고소득노동자가 된 친구녀석들은 쉽게 돈을 잘 벌기만 하고 바캉스도 좋은 데 가고 장가도 잘 가고 하는데 장사란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만큼 돈을 많이 벌 수는 없으니, 열은 열대로 받고, 정말 대책이 서지 않게 된다.

물론 '사회적 시장경제' 특유의 방대한 국가예산을 이용하여 국가가 대규모의 재정지출과 공공사업의 확대로 경기를 부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고 직장도 많이 생기고 그로써 취직을 하게 된 노동자들이 국가에 세금도 많이 낼 수 있어서 국가의 조세수입도 늘어나고 결국 모두가 이익을 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특단의 대책에도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1980년대까지 미국의 연방정부를 짓누르고 있던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자와 지금 현재 독일정부의 골치를 썩히고 있는 재정적자의 상황을 눈여겨보시라. 특히 1990년대 통독 이후 독일정부의 재정적자는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2006년이면 그 액수가 약 1조 2,600억 유로(약 1,650조원)에 달할 전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렇게 재정적자가 늘어나게 되면 세율과 이자율이 함께 올라서, 민간투자가 위축되고, 경기가 부양되긴커녕 오히려 침체되어 실업자가 더 늘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또한 독일의 노동자들 역시도 임금은 높은 반면에 다른 곳에 취직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까 기존의 직장에 싫든 좋든 계속 붙어 있어야 하고, 기업은 기업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못하고 계속 고용하면서 사업을 벌여야 하다 보니까 비대한 조직의 살을 뺄 수가 없어서 업무상 비효율은 여전하고, 기업의 순이익도 거의 남지 않아 국가에 세금을 잔뜩 뜯기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노동자의 임금외 혜택만 계속 깎아대거나 노동자의 업무강도만 계속 높일 수밖에 없게 된다. 공동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실업자들 뿐만 아니라 공동결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과 기업들도 사실은 '사회적 시장경제' 특유의 '사회적 연대'때문에 미칠 지경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인들도 이러한 쿵작작 연합체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대기업들이야 워낙에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확실한 발언권을 갖고 있고 예산의 덩치도 크고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는 확실한 아이템과 판로들도 정부와의 인맥에 힘입어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보니까, 노동자들에게 고용과 임금인상의 혜택을 베풀고 정부나 각종 보험기금, 연금기금에 막대한 액수의 세금, 연금 등을 납입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중소기업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소기업들은 워낙에 소득이 불확실하고 경기변동에 영향도 크게 받아서 노동자들에게 그만큼의 높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독일의 경직된 노동법규정이나 세법규정들을 그들은 도저히 감당해낼 수가 없다.

특히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부에 납입해야 하는 그 막대한 세금이 이만저만 부담되는 게 아니다. 사실상 벌어들인 것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정부에 납입해야 하고, 그 대신에 정부에다가 각종 보조금을 신청해서 다시 받아쓰는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데, 스피드를 생명으로 알아야 하는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든 절차가 이만저만 귀찮은 노릇이 아니다. 더군다나 독일의 관청은 뭐 그렇게 일처리가 느리고, 뭐 그렇게 허가를 받아야 할 곳, 신고를 해야 할 곳, 싸인을 받아야 할 곳이 그렇게도 많다는 말인가? 그리고 어렵게 그런 식으로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대기업의 시장진입장벽은 뭐 이렇게 높으며, 뭐 그렇게 복잡한 법률규정들이 많아서 그러한 규정들이 대기업들의 이익을 교묘하게 옹호해주고 있단 말인가? 독일이란 나라는 언제까지나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하청이나 받아서 시다바리나 하다가 끝나야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직도 독일은 중세봉건시대의 영주-기사-농노와 같은 신분계급제와 분봉제 질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라란 말인가?

그러다 보니까 머리가 좋은 인재들은 가급적 대기업에 취직해서 그곳의 철밥통 같은 관료조직에 흡수되는 것만을 선호하고, 새로운 사업을 일으켜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볼 생각은 하지 않으며, 기존의 중소기업들은 자꾸 망하기만 하다 보니까, 독일에서 중소기업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줄어들기만 하게 된다. 당연히 그만큼 일자리도 줄어들며, 창의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영국을 앞질러 한때 미국과 정면대결하기도 했던 옛날 독일경제의 산업경쟁력(이러한 기술력과 영업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부분 옛날의 유태인 사업가들과 과학기술자, 상인들에 의해 독일경제에 형성되고 축적되었던 것들이다) 역시도 계속 떨어지기만 하게 된다.

이는 독일경기의 침체와 실업자수 증가를 부추기며, 어려서부터 개성과 독립심이 강해 대기업의 거대한 관료조직에서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많은 독일인들에게 이러한 공동체적 담합과 정치-경제간 유착의 문화는 정말 심각한 절망감을 유발하게 된다. 일찍부터 시장에서 곧바로 통할 수 있는 뛰어난 개인적 실력(예를 들면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독일이란 나라에서 그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단 대기업회사의 두터운 관료조직을 뚫고 들어가 뛰어난 정치가적, 행정가적 수완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오직 좌절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쿵작작 연합체로부터 소외되는 주체 가운데에는 국립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던 학생들도 포함이 된다. 그들은 자기 부모들이 국가에 사실상 자기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갖다바침에도 불구하고 단지 Abitur(대입자격시험)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정규 국립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사립 전문학교에 진학하여 비싼 등록금을 지불해가며 공부하거나, 그냥 고등학교 졸업직후부터 저소득노동자가 되어, 자기 대신 놀고 먹으며 국가의 투자를 받는 대학생들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지불해가며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돼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이만저만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느끼는 절망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정말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오죽하면 지난 2002년 5월 독일 Erfurt의 한 김나지움에서 이미 두 차례나 Abitur시험에 떨어진 한 19세 학생이 Abitur시험장에 무단난입해 무차별 총기난동을 벌여 14명의 교사를 사살하는 일까지 벌어졌겠는가?)

사실 대개의 경우 고등학교때 공부 잘하여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애들은 부유하고 교육수준 높은 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아이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능지수 높은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 뿐만 아니라 지적인 교육환경에서 자라나는 것 역시 대학진학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유하고 지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국가가 무상교육의 전폭적인 투자혜택을 베풀어주며 그들의 고소득기회를 더 확실히 보장해주는 반면에 (독일 역시도 대졸자들이 고졸자들보다 임금을 훨씬 더 많이 받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 만나 고등학교때까지 공부 못해서 국립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 건설노동이나 하게 된 아이들은 국가에 세금만 열심히 납입하고 국가로부터 별다른 혜택을 못받은 채 영원히 무식한 노동자(그리고 그보다 더 심한 경우엔 영원히 무식한 고졸실업자)로만 머물게 될 뿐이다. 아무리 대졸 고소득자들이 액수상으로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고졸 저소득자들 입장에서는 국가가 사회적 정의를 위해 소득을 재분배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대학생이나 대졸자들만 더 배려하며 사회적 정의를 더 해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얘기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쿵작작 연합체로부터 가장 심하게 소외를 당하는 것은 바로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독일의 높은 사회복지수준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에는 외국회사들한테서 비싼 로열티를 받거나 외국시장에 비싼 가격을 받고 고부가가치의 물건을 팔아서 벌어들인 소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 그러한 고소득을 바탕으로 높이 올라간 독일의 고임금이 부러워서 '그 임금의 50%만 받아도 좋으니 나 좀 채용해주세요'하고 다가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독일정부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독일의 노동자들이 외국인의 유입으로 인해 노동력의 공급이 늘어나 독일노동자들의 임금이 하락할 것을 두려워하고, 자기들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 역시도 꺼려해서, 국가에 압력을 넣어 외국인노동자들이 더이상 못 들어오게끔 진입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인노동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똑같은 인간인데도 누구는 부자나라에서 태어나 높은 임금 받고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고, 누구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낮은 임금 받고 쾌적하지 못한 환경에서 고생하며 살아야 하다니, 독일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가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국가, 같은 민족내에서의 차별만 차별인가? 다른 국가, 다른 민족간에 이루어지는 차별도 어쨌거나 차별이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차피 고국에는 일자리가 없고, 독일에서라면 더 싼 값에 더 열심히 일해볼 자신이 있는데, 왜 독일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자리를 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회복지혜택? 독일국적? 그런 것은 안 받아도 상관이 없다. 그냥 일자리만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안되는가? 독일인들만의 복지혜택과 독일인들만의 일자리를 위해? 이런 게 그 잘난 '사회적 정의'요 '사회적 시장경제'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독일 사회는 별탈없이 잘 굴러'갔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능력에 따른 경쟁보다 정치적 담합과 독과점, 그리고 국가개입과 강제성의 원리가 많이 작동하긴 했어도, 그 대신에 독일인들은 김아무개 교수말마따나 '사회적 연대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적 평화와 안정을 얻'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독일은 세계 제3위의 경제대국이자 복지대국이며, 미국 역시도 독일과 거의 비슷한 복지혜택을 베풀어주고 독일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정경유착에 의존하는 사실상의 '사회적 시장경제'이면서도 세계최고의 선진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적 시장경제'는 충분히 우리의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사회적 시장경제가 지향하던 국가권력과 대기업, 그리고 거대노조간의 유착경제 시스템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경제학적인 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후기Keynes주의 경제학자였던 미국 Carnegie-Mellon대학의 Franco Modigliani 교수 같은 사람은 국가간접자본에 의한 대규모 차입과 대규모 투자로 중화학공업분야에 소수의 대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규모의 경제(Großeneffekte = economic of scale)를 실현할 수 있게 되어 상품들의 생산단가를 떨어뜨리고 막대한 국내수요를 유발하는 등 경제전반에 긍정적인 Synergie효과를 일으켜서 국가경제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이론은 실제로 1950~1970년대의 미국, 독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여 기적적인 고도성장을 하는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정권이 이러한 원리에 따라 현대신화, 대우신화 등을 일으키면서 영남지역에 대규모 장치산업을 집중육성해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경제개발에 성공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73년의 제1차 석유위기, 1979년의 제2차 석유위기 이후 장기불황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불균등발전이론(우리나라에서는 '서강학파'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론을 대표했음)은 그저 단기적으로만 효과를 볼 수 있을 뿐 장기적으로는 시장경쟁구조를 악화시키고 국가경제를 금융공황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제학자들간에 점차로 인식이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OPEC의 유가담합행위가 성행하면서 '공동결정'과 '독과점', '대규모 차입'과 '집중투자'의 정당성에 관한 여러 문제점들이 전세계적으로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실제로 1970년대부터 선진각국들은 그 후유증으로 고성장시대의 막을 내리고 일제히 저성장시대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당시 대규모의 차입에 의한 과잉투자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서구경제상황처럼 장기적으로 심각한 지불불능사태와 은행파산, 재정적자, 이자율상승, 민간투자위축, 대량실업, 그로 인해 핏발이 선 여러 국가들간의 정치적 파워게임 등의 사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며, 특히 제2차 석유위기가 일어났던 1979년 즈음에 각 선진국들은 거의 1920년대와 맞먹을 만큼의 재정파탄과 민간투자위축, 대공황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당시(1979년) 우리나라는 공장가동률이 거의 50% 이하로 떨어지는 등의 경제파국상황에 직면하여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각 선진국들은 이때 제3차 세계대전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확대일변도로만 치닫던 각국의 공공사업분야들을 구조조정하고, 정부의 비중을 줄이고, 뼈를 깎는 공기업민영화작업과 감세정책, 복지축소정책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독일기업과 일본기업들은 국가의 세금과 노동자의 임금을 계속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노동자의 신규고용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였으며, 마치 세계 제2차대전 직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독일정부(Helmut Kohl수상이 이끌던 우파정부)는 국가적 간섭의 비중을 줄이긴커녕 공공부문과 독과점재벌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늘리는 방향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회적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심화시켰다. 물론 미국정부와 영국정부 역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 이들 두 나라는 1980년대 이후 '작은 정부'를 실현한다면서 복지혜택을 대폭 감축하는 등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했지만, 실제로는 세금만 감면하고 국방예산은 계속 늘려대는 바람에 재정적자는 더욱 늘어났고, 실업문제와 빈민문제는 더욱 더 악화되었으며, 국내수요는 더욱 위축되는 등 독일과 비슷한 여러가지 문제점을 노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Clinton-Blair의 신좌파정권기에 이르러 미국과 영국에서 정보화혁명에 의해 대규모장치산업이나 군수산업의 경제적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비로소 미국과 영국에서는 '작은 정부'의 이상이 제대로 실현되었고, 시장전반에 완전에 가까운 경쟁시스템이 정착되면서 국가적 후견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IT산업분야, 지식산업분야 등에서 소형벤처기업들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좌파정권하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생산적 복지예산이 다시 크게 늘어나면서 중하류층을 중심으로 한 국내소비수요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자, 그로 인한 내수증가와 세수증가가 동시에 이루어졌고, 그 밖에 공공사업분야의 계속적인 민영화로 인해 재정적자 역시 큰 폭으로 줄어들자, 그로 인해 이자율이 대폭 떨어지면서 민간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등 국민들의 추가적 세부담 없이 기록적인 경제성장이 미국과 영국에서 재개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의 조그마한 나라들까지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여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이제 '큰 덩치의 후견적 정부' '사회적 연대' 같은 것을 지향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보다는 '작은 정부'와 '정보기술혁명' '생산적 복지' 등을 지향하는 신경제체제가 전세계적인 대세로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흐름에 일본과 독일은 약간 뒤쳐져 있던 편이었지만, 일본 역시도 2001년 이후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한 결과 지금 현재는 경제가 점점 살아나고 있는 중이라고 하며, 독일 역시도 지금의 사민당 정권하에서 과감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조만간 경제가 살아날 조짐이고, 브라질도 2002년에 출범한 룰라 좌파정권에 의한 자유주의적 개혁 덕분에 만성적 경기침체와 실업사태가 개선될 전망이다. 이렇듯 현재 세계적으로 큰 흐름은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신 자유시장경제모델'이 더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들은 좌파와 우파를 떠나, 미국과 독일을 떠나 세계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에게 공통적인 인식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은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현하기 이전에도 충분히 부유했던 나라들이었으므로, 과거 그들의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은 우리에게 충분히 대안이 될 수 있지 않냐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독일이 비대한 정부기구와 정경유착의 시스템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세계 1위, 3위의 경제력과 함께 높은 국민생활수준을 자랑할 수 있었던 비결은 소위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보다도 오히려 미국이나 독일의 다원주의적 정치시스템과 분권화된 사회시스템 덕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게 된다.

특히 독일은 한국처럼 서울과 청와대와 서울대학 하나로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Berlin, Hamburg, München, Koln, Frankfurt, Stuttgart 등으로 모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언론권력, 문화권력, 학술권력 등이 분산되어 있고, 국민의 실생활에 있어서도 한국, 이태리식의 끈끈한 가족주의, 단결주의가 아니라 합리적 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엄격한 선거관리와 청빈한 정치인의 육성을 통해서 돈 안 드는 정치풍토가 조성되어 있고, 이념정당구조와 정당명부제를 통해서 지역주의 선거구도도 거의 극복돼있어,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성과 독립성, 자발성이 충분히 보장될 수 있는 기본이 갖춰져 있었다. 설령 경제적으로 독과점적 대기업과 거대노조, 이해단체의 협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정치시스템, 사회시스템을 독일이 갖추고 있었던 이상, 권위적 독재정치권력이 국민의 경제생활, 사회생활, 문화생활 전반을 권위적,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위험을 줄일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물론 미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될 수가 있다. 비록 미국은 나라의 면적이 너무 광대하고 인구도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선거비용도 그만큼 비싸져서 고비용의 정치구조가 온존하고 있고, 정당분포 역시 보수양당제가 아직 흔들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매년 선거가 정책대결, 이념대결로 흐르기 보다는 자질구레한 인물대결, 이미지대결 위주로 흐르고 있으며, 남부와 북부로 갈라지는 지역주의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긴 하지만, 독일처럼 미국도 연방제 국가로서 지방자치제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고, New York, Washington, Philadelphia, Boston, Chicago, Detroit, Atlanta, Miami, Dallas, Houston, Los Angeles, San Francisco, Seattle 등으로 경제권력과 문화권력 등이 폭넓게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독점자본과 독점노동이 미국에서 하나의 카르텔로 집중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합리적 개인주의문화와 토론문화 역시도 미국이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실생활 속에 거의 세계최고수준으로 자리잡혀 있어서, 석유재벌과 군산복합체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계열의 보수권력층이 시민사회 속에서 충분히 견제되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특히 독일이건 미국이건 명문대학들이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상호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와 그 나라들간에 매우 분명한 차이점을 찾아볼 수가 있게 된다. 물론 미국에서는 Harvard와 Yale을 비롯한 상위 10개 대학의 힘들이 나머지 다른 대학들에 비해 너무나 강한 것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미국에서 Harvard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한국에서 서울대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비해 거의 초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단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각료의 50~70%, 국회의석의 40%, 대기업임원직의 40% 가량을 항상 점유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점적 기득권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에서 Harvard대 출신들이 정부고위직, 국회의석, 대기업임원직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겨우 2~3%에 불과하고, 이러한 각 분야에서의 명문대출신 비중은 미국의 상위 10개대학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다 합친다고 하더라도 겨우 10%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미국이나 독일의 명문대학들은 우리나라 명문대학들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은 '우물 안 개구리'식 안락감에서 벗어나 치열한 상호경쟁 속에서 세계 최고수준으로 발돋움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독과점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미국과 독일이 아무리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원래 대기업의 과점(Oligopoly)은 거의 항상 국가의 독점(Monopoly)보다 그래도 훨씬 더 나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라 하겠다. 아무리 '사회적 시장경제'가 소수의 대기업이 거의 다 헤쳐먹는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 내에서 각 대기업에 최소한 하나 이상의 동등한 경쟁상대가 존재하고 있다면 (예를 들면 Mercedes Benz가 아무리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BMW나 Volkswagen의 견제를 받는다거나, GM이 아무리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Ford나 Chrysler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 기업의 효율성이 독점국영기업일 때보다 최소한 두세 배는 더 상승하지 않을 수가 없게 돼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나 독일식의 독과점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무리 나빠도 소련이나 북한식의 국가독점적 계획경제 시스템보다는 어쨌거나 몇배나 더 나은 시스템이어서, 공산주의 국가독점 시스템과의 체제경쟁에서 그러한 과점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쨌든 승리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민주, 공화 양당제가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 소련이나 북한식의 일당독재 시스템보다는 그 정당성과 효율성이 두 배나 더 낫다고 말할 수가 있으며, 삼김정치가 아무리 나빠도 Stalin, 김일성, 김정일식의 신격화된 '어버이수령님' 정치에 비하면 그 폐해가 훨씬 더 적다고 할 수 있고, 조중동식의 과점적 수구언론시스템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 북한 로동일보식의 관치적 독점언론시스템보다는 그 공정성이 두세배나 더 낫다는 얘기를 할 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과점체제 내에서는 상호경쟁과 견제가 어쨌거나 독점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점시스템이 통할 수 있던 시대도 이제는 거의 끝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에 동구공산권이 붕괴하고, 중국경제가 시장자본주의에 편입되고, 정보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전세계가 무한경쟁의 상태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그 스피디함을 무기로 경제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소규모의 정보산업들은 경제분야에서 더욱 더 자율적이고 속도감 있는 의사결정시스템을 요구하게 되었고, 기존의 독과점적, 정경유착적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은 이러한 상황에서 완전히 낡은 것으로 치부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은 경쟁을 둔화시키고, 경제문제를 끊임없이 정치문제로 전화시키며, 관료적 간섭으로 생산성을 하락시키고, 복지수혜자들의 끊임없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며, 두터운 사회복지와 공동결정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자에 대해 배타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므로, 오늘날 더이상 진보적 의의를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운운하면서 합리적이고 개인독립적이며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른 자원분배 대신에 권력적이고 정치적이며 집단주의적인 힘겨루기와 타협에 따른 자원분배를 선호하고, 시장을 통한 각 개인들의 개별화된 의사결정이 아닌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상명하달적인 의사결정을 선호하며,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이고 정경분리적인 경제체제 대신에 국가주의적, 독점자본주의적, 정경유착적인 경제체제를 우리나라에 계속 유지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며 개념 없는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특히 독일이나 미국처럼 분권화되고 다원화된 사회문화를 갖고 있지도 않은 우리나라의 상태라면,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는 박정희 정권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완전히 척결되지 못한 우리나라의 관치적, 중앙집권적, 봉건적, 타율적 관리시스템으로부터 전국민을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물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따른 경쟁체제가 극단화되어 인생의 패배자에 대한 그 어떤 배려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옳다고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질서 내에서 지나친 경쟁의 부작용은 '부의 한계효용'과 '투자의 한계효용' '경쟁의 한계효용' 등의 작용에 의해 대부분 시장경쟁질서 내에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될 수 있는 반면, 군대식 관료질서 특유의 적당주의와 보신주의에 대해서는 감시와 처벌 이외에 다른 내부적 치유기제가 있을 수 없다. 특히 이런 관료제적 피라미드 시스템 내에서 한번 찍히거나 '시범케이스'로 걸린 자에게는 영원한 파멸만이 주어지게 될 뿐이니, 이러한 결과는 차라리 지나친 경쟁의 폐해보다도 더 끔찍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장하시는 분들께서는 '민주적 통제'로 관료제적 폐해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시겠지만, 설령 이러한 관료주의, 국가주의 경제체제에 '민주적 통제'라는 요소가 가미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체제가 '자유'나 '다양성'보다 '정치적 통제'나 '행동통일'를 우선적인 원리로 삼고 있는 한은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그로 인해 언제나 국가나 다수자가 소수자의 기본적인 사생활까지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간섭하고, 다수자가 소수자의 독특한 취향이나 비전형적인 의사까지도 마치 중국의 문화혁명때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집단비판하며, 그러한 획일적 결정에 반대하는 소수자를 집단성토하거나 생매장하는 방식으로 소위 '민주적' 의사결정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이상, 경제적 효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통제적 시스템하에서는 소수자의 인권 역시 심각하게 위협받는 것을 어쩔 수가 없게 된다.

또한 설령 이러한 정치적 통제시스템에 '소수자배려'라는 요소를 가미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소수자배려의 문화는 '배려'라는 비합리적 재화를 분배하기 위한 제2의 암시장이나 높은 진입장벽을 만들어, 장기적으로는 경쟁이 없어지긴 커녕 국가나 공동체나 기타 배려의 주체로부터 더 많은 특권과 배려를 얻어내기 위한 또다른 형태의 비합리적 경쟁(대개의 경우 아부경쟁과 엄살경쟁, 끌어들이기경쟁, 받아쓰기경쟁)들을 거듭해서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러한 비합리적 경쟁과 단결과 공동결정의 시스템은 시장질서가 보장하는 정정당당한 합리적 경쟁과 달리 사회적 정의를 더 허물어뜨리게 돼있고, 결국엔 소수자들에게 더 해를 끼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를 위한 예를 들어본다면, 노동시장에서의 소수자들을 보시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능력은 있으나 기존 노동자들의 담합때문에 정식으로 취업이 되지 못하는 청년실업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철~의~ 노~동~자' 노래를 외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과연 동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철~'밥통을 끼고 살려는 적들이 될 것인가? 솔직히 그들 실업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정당당한 경쟁을 원하겠는가, 아니면 '사회적 시장경제'식의 불확실한 배려를 원하겠는가? 왜 그들 실업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자유롭게 저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권리, 자유롭게 정규직노동자들과 개인경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시장이 더 합리적으로 움직이게 하질 못하는가? 왜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기 임금이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됨으로써 자신이 능력에 맞는 임금을 받게 되고, 자유롭게 직장을 옮길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는 못하는가?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부자나라에 몰래 흘러들어와서 구직활동을 하게 된 외국인노동자들을 생각해보시라. 능력과 저임금의 측면에서 국내노동자들보다 더 경쟁우위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노동자들의 담합으로 역시 정식취직이 되지 못하고 불법딱지를 붙인 채 노동착취를 당해야 하는 그들은 과연 국적을 초월한 자유경쟁을 원하겠는가, 아니면 '사회적 시장경제'식의 민주적 공동결정을 통한 국가적 배려를 원하겠는가? 그들에게 '철~의~ 노~동~자' 노래를 외치는 국내노동자들은 과연 그들의 동지들이겠는가, 아니면 '철~'밥통을 끼고 살려는 적들로 보이겠는가? 왜 그들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시장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저임노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지 못하는가? 왜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물가와 상품가격이 더 떨어지고 우리나라 상품의 수출이 더 늘어나고 경제활성화로 인해 국가의 세금수입도 더 늘어나서 모두의 삶이 더 풍요롭고 윤택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가?

과연 무엇이 좌파이고 무엇이 우파일 수 있겠는가? '사회적 시장경제'는 좌파적 가치이고, '자유적 시장경제'는 우파적 가치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만약 '사회적'인 것은 좌파적인 것이고, '자유적'인 것은 우파적인 것이라면, 왜 '사회적 시장경제'는 애초에 좌파 사민당에서 만들지 않고 우파 기민련에서 사실상의 국가주의자 Müller-Armack과 Erhard가 만들었단 말인가? 왜 우파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잔악한 우파들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Nazi들은 스스로를 국가'자유주의자'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신에 국가'사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렀는가? 왜 오늘날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질적으로 해체하는 개혁은 독일의 우파정당 기민련이 추진하지 않고 좌파정당인 사민당과 녹색당이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한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법현실을 보면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1995년 7월 21일 한국영화쿼터제에 대한 합헌판결에서 '우리나라의 객관적 법질서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라고 하는 과감한 발언으로 한국영화쿼터제를 옹호하는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던 바가 있으니, 이미 우리나라는 '사회적 시장경제'인데 뭐하러 새삼스럽게 서구식 '사회적 시장경제'를 대안으로 삼느냐는 의문까지 들게 된다. 그 판결문을 한번 읽어보시면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충분히 '사회적 시장경제'여서 국내 변두리의 영세 3류극장주들이 외국영화 좀 더 많이 상영해 돈을 벌고 싶어도 국내 메이저영화사, 메이저배급사들의 기름진 배를 더 많이 채우기 위해, 그러한 가난한 극장주들의 자유영업행위는 '사회적'으로 통제받지 않을 수 없게 돼있다는 것인데, 어떤가? 이걸 보면 우리나라도 '사회적 시장경제'가 확실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더군다나 판결문에 따르면 '민족공동체의 문화적 창작력'과 '공공복리' 같은 가치들이 개인의 자유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 우리나라의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것인데, 이걸 보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독일이나 미국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보다도 더 집단주의적인 형태가 아니겠는가?

거기다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직 헌법전공 교수이자 한국헌법학의 최고권위자 가운데 하나로 불리우는 허영 교수는 그의 저서 '헌법이론과 헌법'에서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체제 또는 민주적 시장경제질서는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기본권 상호간의 이른바 Synthese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으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아예 법철학적, 변증법적인 개념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 솔직히 나는 과연 이런 말이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기로 '사회적 시장경제'가 만약 무슨 'Synthese'라면 기껏해야 Alfred Müller-Armack의 말대로 '경제적 자유와 국가적 책임의 Synthese' 정도로나 볼 수가 있는 것인데, 여기서 '국가적 책임의 Synthese'라는 말조차도 결과적으로는 '국가적 개입'을 우회적으로 정당화하는 말인데다 개념한계가 모호한 말이라고 해서 오늘날 강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독일의 현실이 아닌가?

그런데 허영 교수식의 '기본권 상호간의 Synthese'라는 말은 대체 무슨 확고한 국가개입의 한계를 설정해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국가의 특별한 시장개입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경우에 따라 외국영화도 상영하고 싶은 가난한 극장주들의 '싸가지없는' 영업자유권, 이윤추구권과 한국영화계 종사자들의 '숭고한' 생존권적 기본권, 전통문화 계승 및 발전을 위한 기본권,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기본권이 충돌해서 그 변증법적 Synthese로 나오게 된 것이란 말인가? 혹시 우리나라 헌법학자들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말하는 이유는 적당적당히 중간에서 이렇게 변증법(?)적인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타협적 줄타기를 해야 국가로부터 그들의 밥그릇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고 만약의 문제시에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때문에 그런 어려운 말들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애매모호한 말장난에 열렬히 환호하시는 수많은 국내 진보좌파 지식인들께서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름으로 진보를 실현하신다면서 실제로는 자기들이 완전한 주도권을 쥔 폐쇄와 관리와 통제의 경제를 실현하려 하시는 것이 아닌가?


4. 이러한 상황하에서 내가 또다시 옛날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 그리운 386 선배들과 386 동기들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날의 숱한 고생을 뒷전으로 하고, 이제는 어느덧 권력의 핵심이나 사회 곳곳의 요직, 포스트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하며 조금씩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가 있게 되자, 민중들의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옛날 군사독재정권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가부장제, 권위주의, 그리고 군바리식 상하서열주의와 강제명령주의의 메카니즘을 추구하며, 국민들의 피와 같은 세금을 걷어다가 거대한 국가관리시스템을 만들고, 그 와중에서 심지어는 시대착오적 민족주의나 집단주의, 노동자중심주의의 이념에 빠져들어 아직도 '남한사회의 자주적 민주적 변혁'을 꿈꾸고 있는 그들의 이념적 좌표는 지금 현재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령 그들이 독일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에서 그들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연 우리나라의 진보와 국민 개인들의 인권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인가?

물론 그들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해서 나름대로는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자유'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 시스템에 강제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할 수 있으며, 그것이 깊은 층위에서 민중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민중들이 처음에 그 시스템을 선택할 때 자유로 선택하기만 했다면 나중에 설령 그 시스템에 의해 전국민적인 강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은 강제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스템이라고 정당화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눈으로 보건대 그들이 말하는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자유'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국가권력의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개입과 강제, 소수의 엘리트집단이 선도하는 경제통제와 사회통제가 있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다른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어린 시절 아주 소박한 꿈에서 출발했던 그들의 순수한 뜻(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들의 소유물을 강제로 빼앗아 골고루 나눠준다는 뜻)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들의 그런 소박한 꿈에서 어느새 답답하고 꽉 막혀진 형태로 꽁꽁 뭉쳐진 그들의 반자유주의적, 반개인주의적 망상을 발견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에게서 옛날 그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박정희정권이나 전두환정권의 망령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그들이 자유주의와 시장경쟁을 그토록 단호히 반대하고 있는 한 박정희정권이나 전두환정권 이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뭔가 경제적 잉여물을 주게 될 리는 없다고 생각되며, 오히려 그들은 그동안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나마 있던 자유조차도 실질적으로 더 많이 빼앗아가버리게 될 공산이 높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민족에게 자주를, 민중에게 권력을, 인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부여한다면서 수많은 엄청난 비젼을 제시하고, 그 비젼대로 민중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유혹하면서 그를 위해 일단 자신들에게 민중들이 여태까지 갖고 있던 자유 중 많은 것을 위임하라고 권유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내가 문득 Goethe의 희곡 'Faust'의 악마 Mephisto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너무 극단적인 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386 여러분들께 내가 또다시 '친독파 사대주의자'나 '인간쓰레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Mephisto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를 참고삼아 들려주게 된다면 대충 다음과 같은 구절이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이 말을 듣고 그 분들께서는 나를 '인간쓰레기'라고 욕하시기에 앞서서 먼저 스스로를 되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Das Erste steht uns frei, beim Zweiten sind wir Knechte. (첫번째 발걸음에 우리는 자유롭다, 그러나 두번째 발걸음에 우리는 모두 노예가 될 것이다)"
(* Goethe, Faust I, C.H.Beck, Studierzimmer, S. 49, 1410)




2004. 2. 23.

김상훈 wrote:
경일이형 잘 읽었어요. 논문 쓰느라 바쁠텐데 장문을 쓰셨군요. 저도 늘 고민하던 문제라 재미있게 읽었어요. 결국 우리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거는 사회복지 예산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너무 작다는거 같은데..좀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지

김상훈 wrote:
만...그게 제일먼저 떠오르네요. 좀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제 친구들을 위해 글을 퍼갈수 있을까요? 제 고등학교 동기 게시판인데 비공개고, 더이상 퍼뜨리지 말라고 하고 올릴수 있을거 같아서요. 물론

김상훈 wrote:
원치 않으면 아쉽지만 관두구요. 그럼 좋은글 잘 읽었어요~

의문 wrote:
도대체 위의 분은 어떤 차원에서 좋은글이라는 건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논리가 완전히 뒤죽박죽인데.

고래 wrote:
김상훈씨 오랜만이네요. 비공개면 퍼가셔도 괜찮지요. :-) 미국에서 계속 유익한 시간 보내시고 좋은 의견도 많이 주시길 바랄게요. :-)

jake wrote: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논점에 대한 진지한 긴 글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차근차근 읽으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jake wrote:
그리고, 이 글의 논리적 부정합성에 대한 의문님의 구체적인 지적을 - 간략하게라도 - 듣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비판을 통해 원래 글의 논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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