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nford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Paul Romer는 아직 젊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경제성장론 분야에서는 거의 세계 최고의 대가라 할 수 있는 학자이다.
그는 1986년에 쓴 유명한 논문 "Increasing Returns and Long-Run Growth"에서 개별 기업의 수익체감과 경제 전체의 수익체증이 양립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한 기업에서 축적된 지식이 다른 기업의 생산성까지 높이는 파급효과 때문이다.
그가 후속 연구에서 더욱 선명하게 제시한 것은 지식의 비경합성이었다.
지식은 한 사람이 사용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사용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 한 대를 동시에 여러 공장에서 사용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설계와 알고리즘은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성장의 원천은 자원을 더 많이 투입하는 데만 있지 않고,
같은 자원으로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지식과 기술에도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자원의 유한성만으로 성장의 종말을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토지와 영토가,
그다음에는 기계와 금융자본이 부의 중요한 기반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지식과 기술, 그것을 결합하고 활용하는 역량이 더욱 중요해졌다.
토지와 자본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의 가치마저 지식과 제도의 영향을 점점 더 크게 받는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나라 재벌가들이 행사하는 막대한 지배력을 본다면,
다국적기업과 금융기관이 투자와 인수합병을 통해 움직이는 힘을 본다면,
그리고 여전히 강고한 ‘부동산불패’의 관념을 본다면,
지식경제의 발전이 소유의 권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낙관적일 수 있다.
이미 1910년에 Marxist 경제학자 Rudolf Hilferding은
그의 저서 '금융자본론'에서 (나는 이 책을 아예 독일어원서로 갖고 있음)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
카르텔과 기업집단을 통한 경제력의 집중,
그리고 그러한 집중이 국가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그의 금융자본은 단순한 ‘돈놀이 자본’이 아니라,
금융과 산업의 지배관계가 결합된 자본이었다.
오늘날에도 부동산 담보와 신용의 팽창은 서로를 강화하고,
자산가격 하락과 부채 축소는 서로를 증폭시킨다.
버블의 붕괴가 곧 자본주의의 필연적 종말을 뜻하지는 않지만,
과도한 차입과 금융기관의 상호연결이 그 위기를 실물경제 전체로 전파할 수는 있다.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 이러한 금융적 취약성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존재만으로 지식에 의한 생산성 향상까지 환상이라 할 수도 없다.
성장의 원천에 관한 문제와 소유·분배·금융안정에 관한 문제는 구별해야 한다.
자본의 소유만으로 모든 생산활동을 지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문지식과 현장의 경험, 판단과 협업의 능력은
소유권을 확보했다고 곧바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은 지식의 저장과 전달 비용을 낮추었지만,
모든 지식을 명시적 정보로 바꾸어 중앙에 집중시키지는 못했다.
의사의 임상적 판단, 연구자의 문제 감각, 조직 안에서 형성되는 신뢰처럼
문서와 데이터만으로 이전하기 어려운 암묵지가 여전히 존재한다.
정보량이 늘어날수록 그 진위를 판별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도 중요해진다.
정보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은 정보화 이후에 비로소 생겨난 문제가 아니다.
Arrow–Debreu 모형의 완전경쟁·완비시장 아래에서 도출되는 효율성 명제를,
현실의 시장이 언제나 효율적이라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가격은 분산된 정보를 전달하지만 모든 정보를 담지는 못하고,
국가 역시 그 정보를 완전하게 수집하고 처리할 수는 없다.
전문지식과 창의적 판단의 가치가 커지는 흐름,
교육과 연구, 소프트웨어와 문화콘텐츠의 비중이 높아지는 흐름,
소유한 자산만큼이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결합하는 능력이 중요해지는 흐름.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식경제가 곧 기업의 소규모화나 자본권력의 쇠퇴를 뜻하지는 않는다.
플랫폼의 네트워크 효과와 데이터의 집중,
지식경제 인프라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처럼,
지식과 자본이 결합하여 새로운 독점과 진입장벽을 만들 수도 있다.
기술은 전문가의 능력을 높이기도 하고, 일부 전문업무를 대체하기도 한다.
지식이 누구의 힘을 키우는지는 기술 자체만이 아니라,
경쟁질서와 소유구조, 교육기회와 협상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가능성을 외면한 채,
신분과 계급은 불변이고,
경제는 언제나 제로섬이며,
기득권은 결코 패배하지 않고,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생산과정의 혁신으로 늘어난 전체의 부를 분배하는 절차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성장의 가능성과 분배의 갈등은 함께 존재한다.
어느 한쪽만으로 세계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정신과 진리의 부정으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모든 학문과 신념을 계급이익의 위장으로만 취급하는 태도라면,
그 태도 자체도 같은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분산된 경제주체의 판단을 중앙의 명령으로 광범위하게 대체한다면,
현장의 지식은 누락되고 실패의 책임은 흐려지며,
자원의 배분이 정치적 영향력에 좌우되어 버릴 수 있다.
시장의 실패를 교정한다는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관료제의 실패와 권력집중의 비용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대선이 가까운 무렵,
신문도 읽기 싫고, 텔레비전은 더더욱 보기 싫다.
국가정책이니 정치니 하는 말에서 잠시 벗어나,
어둠침침한 골방에서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을 뿐이다.
문국현이 어떤 사람인지,
권영길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보다,
지금 내게는 다른 것이 더 궁금하다.
그저 내 머릿속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
내 주위를 지나가는 풍경 속에
부자연스러운 것,
일그러진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마음속에
나 자신조차 회피하려 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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