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법이론에 있어서 법률효과의 원인이 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법률행위이다. 법률행위는 최소한 하나 이상의 의사표시로 구성되며,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 의해 의도되지 않은 법률효과는 민법이론상 예외적인 것에 해당하게 된다.
이는 곧, 신(神)도 자연(自然)도 법률효과를 결정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인간의 행위에 의해 법률효과가 결정되는 게 원칙이라는 의미이다. 민법이론상 대개는 인간이라는 존엄한 존재가 의욕하고 행동한 바에 따라서 법률효과가 발생하며, 그러한 점에서 모든 인간의 행위는 신기원적이고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인간과 물건 간의 관계,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관계가 인간의 뜻에 따라, 인간의 유일무이한 의사, 행위,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도식은, 우리의 소박한 세계관에 비추어봤을 때, 좀 이상하지 아니한가?
옛날 힌두신화의 Vishnu가 바다의 밑바닥으로부터 새롭게 창조된 대지를 구하러, 한 마리의 멧돼지로 하강하여, 여신 대지를 구출하고 팔에 끌어안은 채로 올라갈 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매번 내가 이 길로 너를 데리고 간다. (Every time I carry you this way.)"
힌두 신화에 따르면, 신화 속에서 인간들이 그토록 대단하게 기술하고 격찬해 마지 않는 여러가지 사건들이, 43억 2천만 년마다 한번씩, 몇번이고 무한히 반복된다고 한다. 그 어떤 엄청난 사건도 억겁의 윤회순환 속에서 보면 이미 다 결정되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하물며 인간 개인 한 사람의 평범한 행위임에랴.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 예전의 다른 사람이 저질렀던 행위를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 역시, 언젠가 삼계가 소멸하는 그 순간이 오면, Brahma의 범천(梵天) 아래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져, 형체를 이루었다가 다시 해체되는 구름처럼 공허한 것이 된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법학이란 얼마나 덧없는 학문이란 말인가? 어차피 위대하신 Vishnu의 눈꺼풀이 한번 껌뻑일 때마다, 모든 법적 결과, 모든 법적 질서, 그리고 그것을 담고 있는 우주, 하나의 Brahma는 사라지게 돼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거대한 윤회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법률행위란 얼마나 하찮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런데 이에 대해 힌두신화는 이렇게 설명한다.
"'행위'로 인하여 사람은 행복과 고통을 보상받고 주인이나 종이 되는 것이다.
(It is by deeds that one merits happiness or anguish, and becomes a master or a serf.)
행위로 인하여 사람은 왕이나 바라문의 지위를 얻기도 하고, 어떤 신이나 인드라나 브라마의 대열에 오르게도 되는 것이다.
(It is by deeds that one attains to the rank of a king or brahmin, or of some god, or of an Indra or a Brahma.)
그리고 행위를 통해서, 사람은 병을 만나고, 아름다움과 흉함을 얻고, 괴물의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And through deeds again, one contracts disease, acquires beauty and deformity, or is reborn in the condition of a monster.)
이것이 그 비밀의 전체 요지이다.
(This is the whole substance of the secret.)
이 지혜는 지옥의 대양을 건너 참 행복에 도달하는 나룻배이다.
(This wisdom is the ferry to beatitude across the ocean of hell.)"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론(因果論)이다.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으며, 허무한 것처럼 보이지만, 각 개인은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지위(신이나 인드라나 브라마의 대열)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는 듯해도, 그 정해짐은 결국 나의 행위로 인한 것일 뿐이며, 그에 굴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면, 앞으로 두고두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
이로 인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 되며, 모든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자신의 뜻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설령 과거의 잘못이 지금의 나 자신을 옥죈다 하더라도, 언젠가 자기 의지에 의해 그 모든 업보를 죄갚음하고 자기 자신을 고쳐나가면, 더 좋은 미래를 개척할 수도 있다는 희망의 가르침.
그렇게 우주의 발생과 소멸조차도 초월해서 억겁의 시간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 행위 하나 하나의 무게와 중요성.
이래서 불교나 힌두교야말로 진정한 자유주의적 철학이라 일컫는 것인지 모르겠다. 삼라만상이 소멸과 재생을 반복할 지라도,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는 결정돼있지 않다는 진취적 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상적 확신.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