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累積)에 대해서


공부에는 누적(累積)이란 것이 필요하다. 누적되어 지층을 이루고 산의 모양을 형성시키는 정도의 두께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렇게 겹쳐지고 포개어지고 쌓여서 단단해진 것이 아니면 어두운 시간의 바다에 휩쓸려 무의미의 영역으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하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반짝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시간의 힘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만다. 학문이란 곧, 시간의 파도, 무의미의 파도와 싸우는 행위이다.

현실의 쾌락과 성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불멸의 우물로부터 단 한 모금의 물을 얻어마심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달고 맛있는 물이라 할지라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갈증에 허덕이며 더 달고 맛있는 물을 원하게 된다. 더러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자기가 얻어마신 물이 더 달고 맛있는 물이라며, 다투는 상황에도 빠지게 된다. 학문의 세계는 호수이며 바다다. 그 깊게 누적(累積)된 물 속에 푹 잠겨서 들어가면, 누가 무슨 물을 얻어마셨는지, 일일이 따지는 것 자체를 우습게 알게 된다.

숙달과 단련의 세계가 있다. 음악처럼, 검술처럼, 무용처럼, 정치처럼, 인간의 감각에 의해 일순간에 달성되고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것으로서 그 성질상 지속과 확정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재주의 세계이며 공부의 세계가 아니다. 이것은 술(術)의 세계이며 학(學)의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숙달과 단련은 이 세계에서, 이 우주에서, 무슨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숙달과 단련에 의해서 창조되는 추상은, 마치 하루살이와 같은 단명의 생물처럼 덧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 오묘한 절정의 순간만 지나면 그뿐이고, 완전한 전수도 불가능하며, 그 후로 역사적 기록과 껍데기 같은 조형물 이상의 다른 것을 남기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물론 이를 무가치하다고 잘라 말해버릴 수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생명의 고귀하면서도 연약한 속성과 가장 닮아있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찰나에 지나가버리며, 그 창조자의 노화에 의해 쇠퇴하고, 창조자의 사망으로써 소멸해버리는 속성을 갖는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더욱, 숙달과 단련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 숙달과 단련이란 게 영원히 누적(累積)될 수 없는 것인 한, 이를 영원불멸의 우물로부터 퍼올린 단 한 바가지의 물이 결국 땅에 떨어지고 말라 없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고 본다. 학문은 숙달이 아니다. 학문은 단련이 아니다. 학문은 그 이상의 보편적 법칙이 누적(累積)된 것이다.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을 겹치고 포개고 쌓아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다.

따라서 학문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모욕한다. 학문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모독한다. 하지만 그로써 교만심과 자고심(自高心)을 없앨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학문의 가치는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모든 학자가 학문의 세계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세계는 비정하여, 단 1%의 천재만을 기억하고 나머지 99%의 범재는 홍수에 쓸려가든 가뭄에 말라죽든 상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기 공부가 진리의 누적(累積)에 비록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부함으로써 자기를 수행(修行)할 수만 있다면, 학문의 세계에 입문한 보람이 있다고 할 것이다. 권세나 부귀에 학문의 보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의 진정한 보람은 자기를 갈고 닦아,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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