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과 그리스인
2013-02-23 00:14:02


유대인들은 요청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는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요청에 부응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정치가들이나 비즈니스맨들의 인간관계가 그와 같다. 반면에 일찍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문하는 민족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는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학문하는 자들의 인간관계가 그와 같다.

유대인은 표징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그의 저서 '사도 바울(Saint Paul)'에서 썼다.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에서 이 구절을 두 가지 말의 방식으로 읽었다. 그리스인은 세상의 질서를 꿰뚫는 지혜에 기대고, 유대인은 그 질서를 넘어서는 기적의 표징에 기댄다. 이는 두 민족의 성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하고, 누구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두 방식은 서로 반대되는 듯하지만, 그 끝에는 모두 주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한쪽에서는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다른 쪽에서는 신의 뜻을 해독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는 말할 자격을 독점하고, 나머지는 그의 설명이나 계시를 기다린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이 인간을 나누는 경계가 된다.

바디우가 주목한 바울은 바로 그 경계를 가로지른다. 바울이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부활했다는 소식이다. 바디우는 그 부활을 신앙의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 선언에서 이전의 질서로는 헤아릴 수 없었던 시작을 읽는다. 그것은 이미 현명한 자에게 주어지는 결론도, 선택받은 자만이 알아보는 표징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건네지는 소식이며, 그 소식에 응답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가만으로 더 이상 규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제 무엇에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이다.

바디우가 특별히 강조했던 갈라디아서 제3장 제28절의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Hier ist kein Jude noch Grieche, hier ist kein Knecht noch Freier, hier ist kein Mann noch Weib; denn ihr seid allzumal einer in Christo Jesu." (여기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여기서는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여기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제2장 제10~11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도 음미해본다:

"Preis aber und Ehre und Friede allen denen, die da Gutes tun, vornehmlich den Juden und auch den Griechen. Denn es ist kein Ansehen der Person vor Gott." (보상이지만 그리고 명예와 평화가 거기서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 있으리니, 이는 유대인을 비롯하여 그리스인에게까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겉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들이 가리키는 자리는 어디일까?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살아온 서로 다른 삶이 사라지는 곳은 아닐 것이다. 그 차이로는 더 이상 누군가를 구원의 바깥에 세워둘 수 없는 자리일 것이다. 종을 새로운 주인으로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가 위에 앉을 것인가를 다투는 동안, 아래에 앉아야 하는 사람의 자리는 그대로 남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그를 어떻게 대할지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가졌는지, 얼마나 배웠는지, 어느 편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그를 이해하려는 물음 속에 이미 그에게 허락할 자리의 크기를 재는 마음이 숨어 있다. 만남이 시작되기도 전에 만남의 한계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순서가 달라진다. 자격을 갖추었기에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된다. 은총이라는 말에는 값을 치르기 전에 이미 주어졌다는 놀라움이 있다. 자신을 증명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도 시작은 허락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문을 닫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이어진다.

사랑과 소통도 그러한 것일 수 있지 않을까? 상대가 나를 설득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관계에는 언제나 조건이 남는다. 그 조건이 사라졌을 때에도 그 사람에게 건넸던 말을 거두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아는 말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그 이해의 바깥에 그를 버려두지 않을 수 있는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묻고, 배운 사람이 덜 배운 사람의 말을 기다리는 일은 그래서 단순한 겸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내가 가진 힘과 지식이 이 만남의 주인일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상대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그 고통을 다 안다는 뜻은 아니며,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삶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베푸는 사람으로만 남아 있는 동안에는 아직 만나지 못한 그의 얼굴이 있다.

제자의 질문 앞에서 자신의 오랜 설명을 멈추는 교육자, 신도의 고통 앞에서 준비해온 설교를 잊는 종교인, 시민의 삶 앞에서 자신의 명분을 다시 묻는 정치가를 생각해본다. 그 순간 그들은 답을 가진 사람의 자리에서 잠시 내려온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고 여겼던 사람과, 아직 답을 얻지 못한 같은 자리에 선다. 새로운 말은 어쩌면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가 같은 지식과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차이 가운데 어느 것도 너를 내 삶의 바깥에 버려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뜻일 것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그 말에 기대어 살면서, 그 말이 요구하는 바를 조금씩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렇게 한 번의 만남을 오래 살아내는 일이다. 그 만남 이후에는, 그가 없었던 때의 나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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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뿌
Everybody's friend is nobody's friend.라고 했습니다. 작년에 안철수 현상이 일어나면서 '소통'이란 말이 대단한 화두처럼 번지기도 했었는데, 물질적 계급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끼리의 소통이란 건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단 걸 다들 모르고 헬렐레 하는 것 같더군요. 솔직히 지배계급에서 잘 나가는 인간들이 모든 인간들과 소통하겠다고 앞발을 내밀 때면 그 이면에 숨겨진 음흉한 의도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진정한 소통은 오로지 같은 계급,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민중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민중들과 똑같이 풍찬노숙하는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소위 우리나라의 지배계급이라고 하는 인간들도 먼저 물질적인 면에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민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본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될텐데 그들이 자기 기득권을 포기할 리는 만무하죠. 주인장 같은 교수들이라면 먼저 교수직부터 벗어던져야 광장에서 민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본자세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 그렇게 하지 않는 이상, 소통 소통 하는 건 온전히 공염불에 불과하겠지.
2013-02-26
11:22:40




Stift
바디우가 어떤 맥락에서 그 구절을 인용했나요?
2013-02-27
10:25:37




랑이아빠
그리스로 대표되는 총체성(totalité)의 담론, 유대로 대표되는 초월성(transcendance)의 담론이 모두 지배담론의 일환에 불과함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인용했습니다. 정체성(identité)을 지향하는 담론이 아닌, 보편성(généralité)을 지향하는 담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에서도 인용했구요. : )
2013-02-27
23:28:28




Stift
그럼 이 글의 맥락과는 다른 맥락이네요. 난 또 바디우가 어디 나 모르는 데서 이런 얘기를 했나 하고 의아해서 ㅎㅎ 답변감사합니다.
2013-02-28
18:32:00




랑이아빠
다 알고 계시면서 질문하셨네요. ^^;
2013-03-01
00:40:33




노광균
바디우가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라는 존재는 정말 그 시대에 특별하고도 혁신적인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나 '예언자'로서 온 것도 아니었고, 그리스인이 존경하던 '철인'이나 '현자'로서 온 것도 아닌... 실제로 예수가 인간들과 맺는 관계는 권력과 지식을 매개로 한 관계가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을 전제로 한 관계였죠.
2013-03-04
11:3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