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5 12:25:33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세상을 떠났다. 96세. 20세기와 21세기를 가로질러 살아남은 거대한 지적 존재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어떤 사상가의 죽음은 하나의 개인적 생의 종료에 그치지만,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언어가 끝나는 사건처럼 다가온다. 독일 언론이 그의 사망을 두고 “하나의 시대가 끝났다(Sein Tod markiert das Ende einer Ära).”고 말한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전후 독일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의 형식 그 자체였고, 유럽이 민주주의와 통합, 역사와 기억, 시민성과 공적 이성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끈질기게 묻는 목소리였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한 철학자의 생애이면서 동시에 전후 독일 정신사의 축약판처럼 보인다. 그는 1929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는 나찌 시대와 겹친다. 독일의 많은 소년들이 그랬듯, 그 역시 어린 시절 히틀러유겐트 계열 조직에 편입되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독일은 패망했고, 전쟁이 끝난 후 드러난 나찌 범죄의 실상은 그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남겼다. 그는 훗날, 자신이 철학과 사회이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경험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신이 살아온 체제가 “정치적으로 범죄적인 체제”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그의 사유에서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평생에 걸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이성과 문명이 다시 야만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홀로코스트와 같은 파국의 반복을 방지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그의 세대 전체가 짊어진 역사적 짐이었고, 동시에 전후 독일 공화국이 자기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 외면할 수 없는 과제였다. 때로 독일 보수주의는 역사적 부담을 덜어내고 “정상 국가(Normalstaat)”로 돌아가고자 했었지만, 하버마스는 독일이 정상 국가가 되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과거와의 대면(Vergangenheitsbewältigung), 즉 과거청산과 기억의 내면화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단순한 통치 기술이나 선거의 절차가 아니라, 역사적 범죄를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공적 결의의 제도적 형식이었다.
그의 개인적 경험 가운데 하나는, 훗날 그의 사상의 핵심 주제와 놀랍게도 깊게 연결된다. 그는 선천성 구개열로 태어나 어린 시절 반복된 수술을 받아야 했고, 말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 경험은 아마도 그가 평생 언어, 의사소통, 상호이해라는 문제에 천착하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말의 중요성을 “개인들이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인 공동성의 층(層)”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사람은 단지 혼자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라, 서로 말하고 응답하고 오해를 풀고 타협하며 공동 세계를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한 통찰이야말로 하버마스 사상의 원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언어를 단순한 표현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언어는 사회를 구성하는 매체였고,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으며, 폭력과 지배의 세계에 맞서는 인간적 이성의 최후의 보루였다.
본(Bonn) 대학에서 철학, 경제학, 독문학 등을 공부한 그는 1954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초기에는 기자와 지식인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이렇듯 하버마스는 순수한 상아탑 철학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언론과 공적 담론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학문적 연구와 저널리즘, 철학적 추상과 정치적 논평이 그의 안에서 나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이끄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제의식에 끌렸고, 이후 그들의 뒤를 잇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었다. 계몽이 왜 야만으로 추락했는가를 묻는 1세대의 비판이론을 이어받으면서도,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재건 가능성, 합리적 의사소통의 제도화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는 강조했다: "비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이 무너졌는지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 어떤 조건 아래 인간은 서로를 설득하고 공존하며, 강제가 아니라 동의에 기반한 질서를 만들 수 있는가?" 하버마스는 이 질문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새롭게 했다.
그의 초기 대표작은 1961년 발표한 『공론장의 구조변동』(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이다. 이 저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대 정치철학과 민주주의 이론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그는 여기서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한 부르주아 공론장의 역사, 곧 사적 인간들이 공적 인간으로 등장해 권력에 대해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토론하는 공간의 형성과 변질을 추적했다. 커피하우스, 신문, 시민적 토론, 비판적 독서문화 등은 그에게 단순한 문화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토대였다. 민주주의는 선거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판단을 교환하고, 공적 문제를 논의하고, 국가 권력과 시장 권력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이 책이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소환되는 이유는, 오늘날의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도 여전히 똑같은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공론장(Öffentlichkeit)을 파괴하는가? 상업화, 선동, 이미지 정치, 권력과 자본의 침투, 대중의 수동화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공동의 자기입법이 아니라 관리와 조작의 체제로 바꾸는가? 하버마스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1964년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호르크하이머의 뒤를 이어 철학과 사회학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는 그가 독일 지성계의 중심으로 진입한 때이기도 하였다. 1968년 학생운동과의 관계는 그의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학생운동의 정신적 후원자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그의 사상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개방된 토론, 권위주의적 구조에 대한 비판을 고무했다.
그러나 그는 운동의 급진주의, 특히 폭력과 테러를 정당화하는 흐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리를 두었다. 이때 그가 사용한 “좌파 파시즘(linker Faschismus)”이라는 표현은 오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훗날 그는 이 표현이 다소 부적절했다고 인정했지만, 그가 말하려던 핵심은 분명했다. 해방을 외치는 운동도, 토론과 설득이 아니라 폭력과 적대의 논리로 넘어가는 순간 스스로의 정당성을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68 운동'이 독일 사회의 근본적 자유화를 촉진했다는 점도 인정했다. 이 양면적 태도는 하버마스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급진주의적 에너지를 이해했지만, 그것을 제도적 자유주의와 민주적 공론의 틀 안에 묶어 두고자 했다.
1971년 그는 슈타른베르크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로 옮겨갔고, 이후 자신의 사상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 절정이 바로 1981년의 두 권짜리 대작 『의사소통행위이론』(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를 단지 경제나 권력, 계급 투쟁의 범주로만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사회는 체계와 생활세계로 분화되어 있으며, 특히 생활세계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해와 언어적 소통을 통해 유지된다고 했다. 인간은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의 주장에 이유를 요구하고, 타당성을 따지며, 상호인정 속에서 공동의 규범을 형성하는 존재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사회의 병리는 돈과 권력이 생활세계를 식민화할 때 발생한다. 이 통찰은 법, 정치, 교육, 가족, 시민사회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응용될 수 있었다. 사회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효율성이나 명령 복종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의사소통의 구조다. 이것이 그가 평생 지킨 이성 개념이다. 냉혹한 도구적 합리성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하버마스의 명성은 이론가로서만이 아니라, 독일의 공적 지식인으로서도 공고해졌다. 그는 은퇴 뒤에도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과 신문 기고, 인터뷰를 통해 끊임없이 현실 정치에 개입했다. 1980년대의 이른바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에서 그는 중심 인물이었다. 에른스트 놀테를 비롯한 보수 역사학자들이 나찌 범죄를 스탈린 치하의 범죄 등과 비교하며 독일 과거를 상대화하려 하자, 하버마스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게 이것은 단순한 학술 논쟁이 아니었다. 독일의 자기이해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나찌 범죄의 독특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순간, 독일 민주주의의 윤리적 기초 자체가 흔들린다고 그는 보았다. 전후 독일의 양심이라는 그의 별칭은 바로 이런 장면에서 만들어졌다.
한편 그는 유럽 통합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EU는 그에게 경제동맹 이상의 것이었다. 민족주의가 다시금 유럽을 갈라놓는 것을 방지하는 민주주의적 방파제이자, 국민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형태의 실험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친유럽주의는 순진한 찬가가 아니었다. 그는 유럽 통합이 지나치게 엘리트 프로젝트로 진행되어 왔다고 반복해서 비판했다. 시민들이 충분히 논의에 참여하지 못한 채, 기술관료와 정치엘리트가 위에서 설계한 통합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유럽은 더 통합되어야 하지만, 그 통합은 공론장과 민주적 의사형성의 확대를 수반해야 한다. 그는 2010년대 유로 위기 국면에서 긴축 일변도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유럽 프로젝트가 단지 규율과 숫자의 언어로만 운영될 때, 시민적 정당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적 개입은 좌우의 경계를 넘나들며 종종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1998년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집권을 지지했고, 앙겔라 메르켈 시대의 기술관료주의, 비전의 부재, 대중을 잠재우는 정치 스타일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람들을 재우는 메르켈 정책의 거품 담요(die Schaumdecke der Merkel-Politik)”라는 그의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정치가 더 이상 시민을 사유하게 만들지 않고, 관리와 조정의 기술로 축소되는 현상을 우려했다. 특히 2015년 그리스 부채 위기 때 그는 독일 정부의 인색한 태도가 전후 독일의 도덕적 명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같은 시기 난민 위기 국면에서도 그는 망명권과 인도주의적 책임을 옹호했다. 우파 포퓰리즘과 배타적 민족주의가 득세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는 유럽과 독일이 스스로의 규범적 토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평생토록 젊은 세대에게 그렇게 환영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둘러싼 독일의 논쟁에서 그는 아날레나 베어복 외무장관의 언사를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고조된 것으로 비판했고, 가자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대응을 “원칙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후예들을 자처하는 젊은 철학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노철학자의 보수화라는 쉬운 설명에 기대고 싶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정리하면 충분하지 않다. 하버마스는 평생 규범적 보편주의와 정치적 책임윤리 사이의 긴장을 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감정의 정치, 도덕적 격앙, 정체성의 절대화를 경계했고, 아무리 옳은 대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공적 이성과 법적 질서의 중재를 떠나 순수한 도덕적 열정의 언어로만 번역될 때에는 매우 큰 위험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물론 이 태도는 때때로 둔감함이나 시대착오로 비칠 수 있었고, 실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평생 지켜 온 원칙, 곧 정치적 판단은 언제나 공적 정당화 가능성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단지 좌파 사민주의자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계보에 서 있었고, 자본주의의 병리와 사회적 불평등, 기술관료주의를 비판했으며, 대체로 사민주의적 개혁국가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하버마스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 더 정확히 말하면 공화주의적 요소를 품은 자유주의자, 또는 사회국가적 보정을 받아들인 규범적 자유주의자였다. 그가 평생 지키려 했던 것은 어떤 집단의 역사적 사명도, 혁명적 계급정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개인의 자유가 상호인정과 공적 정당화의 구조 속에서 보호받는 질서를 꿈꾸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토론의 자유, 시민의 정치참여, 법치국가, 권력의 정당화 가능성, 민주적 절차를 결과적 평등보다 더 중요한 근본가치로 보았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민법학자인 나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얼핏 보면 하버마스는 헌법이론이나 민주주의이론, 사회철학의 인물이고, 민법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사실 그의 사유는 민법학에도 깊은 통찰의 단서를 주었다. 민법은 사적 자치의 법이다. 근대 민법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계약과 소유, 책임의 규범을 통해 스스로 삶의 질서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이 사적 자치가 정말로 자유롭고 평등한 자들 사이의 상호인정 위에서 작동하는가, 아니면 시장 권력과 사회적 비대칭 속에서 형식적 자유만을 반복하는가 하는 질문은, 민법학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버마스는 이 문제를 민법 내부의 교리 언어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상호정당화의 틀을 통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논의했다.
계약은 단지 의사의 합치인가? 아니면 서로에 대한 이유 제시와 상호 승인에 의해 정당화되는 규범적 관계인가? 자유주의적 민법학자는 국가의 과도한 간섭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시장에서의 형식적 합의가 항상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하버마스는 사적 자치를 매우 중요시했다. 다만 그는 자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유가 상호 정당화 가능한 제도적 환경 속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계약의 자유,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모두 그 자유가 타인에게도 같은 자유로 승인될 수 있는 조건 속에서만 정당하다. 이 관점은 계약공정, 소비자보호, 불공정약관, 정보비대칭, 인격권, 사생활 보호, 디지털 플랫폼 질서 등 현대 민법의 수많은 문제를 다시 보게 한다. 하버마스는 민법학자에게 “국가냐 시장이냐”라는 이분법 대신, 어떤 절차와 어떤 공론, 어떤 상호인정 구조 속에서 사적 자치는 진정한 자유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또한 민법은 오랫동안 “사적 영역”의 법으로 이해되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가 이미 무너지고 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공론장(Öffentlichkeit)은 국가 바깥의 시민적 토론 공간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기반이다. 민법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 계약, 결사, 언론, 소유, 기업, 정보교환 등 민법이 다루는 모든 영역들은 다 공론장과 연결되어 있다. 사적 관계의 법이 공적 자유의 토대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사적 권력의 집중이 공론장을 왜곡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사적 자치를 단지 경제적 자유의 제도라고 이해할 게 아니라 민주주의적 시민사회 전체의 기반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하버마스는 법을 단지 명령체계로 보지 않았다. 법은 사실성과 타당성(Faktizität und Geltung) 사이를 매개하는 제도이며, 시민들이 서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복잡한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장치다. 법은 강제력을 갖지만, 그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공적 이유 제시와 민주적 입법과정에 의존한다. 이는 민법학에도 중요한 통찰이다. 민법 조문과 판례는 단순한 기술적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 사이의 상호기대, 책임, 신뢰, 자유의 배분에 관한 규범적 판단의 응축이다. 따라서 민법학자는 국가간섭을 무조건 줄이라고만 말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사회적 정의를 앞세워 사적 자치를 손쉽게 희생하려 해서도 안 된다. 민법학자는 언제나 두 가치를 함께 사유해야 한다. 자유와 연대, 자율과 정당화, 계약과 공정, 사적 영역과 공적 책임. 이 균형감각을 철학적 차원에서 가장 치열하게 사유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하버마스였다.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그는 이성의 역사, 민주주의의 가능성, 유럽의 미래를 사유했다. 사람들은 종종 냉소를 지혜처럼 여기지만, 하버마스는 달랐다. 그는 순진하지 않았지만 냉소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현실정치의 진흙탕스러움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으나, 그 때문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이 없다면 현실비판도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공론장(Öffentlichkeit), 소통(Kommunikation), 합의(Konsens), 민주적 정당화(Demokratische Legitimation), 유럽 통합(Europäische Integration), 역사적 책임(Historische Verantwortung), 시민적 참여(Bürgerschaftliches Engagement)라는 단어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착오가 아니라, 전후 유럽이 어렵게 획득한 문명적 성취를 끝까지 지키려는 그의 완강한 충성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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