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예약(豫約)과 계약(契約)에 관한 단상
2017-12-27 17:21:04

우리 민법에는 일방예약에 관한 제564조의 규정이 있다. 여기서 일방예약이라는 개념이 참 묘한데, 이 개념은 특이하게도 독일민법이 아니라 프랑스민법에서 유래되는 개념이라고 한다.

실제로 예약의 요건과 효과에 관하여 프랑스민법은 제1589조 제1항에 규정을 두고 있다. 이 규정은 예약 전반에 관해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무적으로 중요한 유형, 즉 매매의 예약만을 다루고 있다. 그 문언은 다음과 같다:

"la promesse de vente vaut vente, lorsqu'il y a consentement réciproque des deux parties sur la chose et sur le prix." (매매의 예약은 양 당사자가 물건과 가격에 대하여 쌍방 합의를 갖는 때에 매매가 된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법상 매매의 예약(promesse de vente) 가운데 일방예약(promesse unilatérale)은 우리 법상 매매의 청약에 다름 아니고 매매의 쌍방예약(promesses synallagmatiques de vente)은 우리 법상 이미 유효하게 성립한 매매계약에 다름 아니다. 우리 법은 독일법을 본받아 청약의 구속력을 인정하고 있고, 채권계약과 물권계약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매매계약을 예로 들어보자. 프랑스법에 있어서 부동산매도인 또는 매수인의 청약은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 따라서 상대방이 승낙하기 전까지 언제든지 청약의 의사표시를 철회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법에 있어서 부동산매매계약은 당사자의 합의만 갖고 성립하지 않으며, 그 유효요건으로 관청의 허가(autorisation)를 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청약에 구속력을 부여하기 위해 일방예약을 하고, 아직 관청의 허가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청약과 승낙의 합치에 일정한 구속력을 부여하기 위해 쌍방예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 법과 독일법에서 청약은 그 자체로 구속력이 있다. 상대방이 승낙하기 전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철회하지 못한다. 그리고 부동산매매계약은 채권계약으로서 쌍방 간의 합의만 있으면 바로 유효하게 성립한다. 물권법적인 효과를 발생시키려면 부동산등기까지 하여야 하지만, 그 전에도 채권계약으로서의 매매계약은 이미 성립해 있다.

다시 정리해보자. 프랑스법에서 일방예약이란 상대방이 예약완결권을 행사하는 그 즉시 쌍방예약이 될 수 있는 의사표시이다. 여기서 상대방의 예약완결권 행사는 사실상 승낙(acceptation)이나 다름 없다. 예약완결권을 행사하면 합의에 구속력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청약을 해도 되는데 굳이 일방예약을 하는 이유는 프랑스법상 청약에 구속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프랑스법상 일방예약이란 우리 법상 상대방의 승낙에 의하여 완전히 유효한 채권계약의 성립으로 귀결되는 의사표시, 즉 채권계약의 청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프랑스법에서 쌍방예약은 우리 법상 채권계약 그 자체가 된다. 물론 프랑스법에는 채권계약과 물권계약이 구분되지 않는다. 특히 부동산매매계약은 관청의 허가를 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쌍방예약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바로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프랑스 부동산계약실무상 쌍방예약이 이루어지면, 양 당사자는 관청의 허가를 득하여 본계약(contrat définitif)을 완성하고 소유권을 이전할 의무, 즉 우리 법으로 하면 부동산물권행위에 관한 이행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일방이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상대방은 그 불이행자에 대해 소유물인도청구권이 아니라 손해배상청구권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우리 민법상 채무불이행(채권계약위반)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 법해석상 예약개념의 혼란이 발생한다. 프랑스법이나 영미법에서는 부동산매매계약과 같이 관청의 허가를 요하는 계약의 경우, 관청허가 및 소유권이전 전단계에서 일방 또는 쌍방에게 일정한 특별구속을 인정할 필요에서 예약 개념이 발달해왔다. 그들의 법체계에서는 청약이 있더라도 청약에 구속력이 없고, 당사자 간에 합의가 존재하더라도 아직 계약이 성립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계약 전단계에서 일방 또는 쌍방 당사자를 구속하기 위한 법적 장치로서 예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청약에 구속력이 인정되고, 채권계약과 물권계약이 구분되며, 낙성-불요식계약의 원칙이 확고한 독일법계 국가에서는 예약의 개념이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일정한 청약에 대해 상대방이 승낙만 하면, 그 사이에 청약자가 변심했어도, 관청이 아직 허가해주지 않았어도, 계약은 이미 성립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위반자에게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민법에서도 예약이 채권계약의 청약으로부터 독립한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식계약(contrats solennels)의 경우가 그러한데, 가령 연대보증계약과 같은 요식계약에서 양 당사자가 방식을 갖추지 않아 계약이 아직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채권적 합의에 일정한 구속력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계약의 전단계로서 예약을 성립시키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실무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그러한 가능성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양 당사자는 이 경우 정지조건부 계약을 체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특정 매물이나 좌석, 객실, 면담시간 등에 대해 다른 잠재적 채권자들보다 우선하는 권리를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예약이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의 쌍방예약은 그 급부의 종류 및 수량, 그리고 반대급부의 액수가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경우 쌍방 모두에게 급부의무를 발생시키는 본계약이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듯 본계약의 예비약정이 아니다. 프랑스법에서는 이를 'pacte de préférence (우선권의 합의)'라 일컫는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특수한 계약(contrat spécial)의 일종이라 보지만, 우리 교과서에서는 이것이 마치 본계약 체결 이전의 예비약정인 것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급부 및 반대급부 내용에 관한 합의가 이미 확정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반의 효과에 대해 이행이익설이니 신뢰이익설이니 하는, 불필요한 학설대립이 발생한다.

우리 민법규정을 읽다보면 이게 대체 뭔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법개념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알고 보면 독일법과 프랑스법의 기본구조를 잘 살피지 않고 양국 법을 무차별적으로 혼합해서 민법을 입법한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요즘 자주 깨닫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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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