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é Saramago, '눈먼 자들의 도시'
2020-03-01 05:12:08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는 갑작스런 전염병으로 인한 전세계 문명의 마비상을 그린 소설입니다. 시력을 잃게 하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모든 사람의 눈이 멀어버리는데, 이런 갑작스런 사태로 인하여 결국 전 세계가 지옥화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도시의 아침 출근길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멈춰 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운전자는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고 말하고, 결국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운전자를 집에 데려다 줬던 사람 역시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고, 그 운전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급히 찾아간 병원의 의사 역시 시력을 잃게 됩니다. 마침 그때 그 병원에 같이 있던 사람들도 시력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눈 앞이 뿌연 우윳빛으로만 보인다고 호소하는데, 그 원인과 치료법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시력을 빼앗는 전염병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정부는 일단 환자 발견 및 격리 치료, 환자 이동경로에 따른 접촉자 추적 및 자가 격리 등 고전적 방역방법으로 대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환자는 폭증하니,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나머지 사람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전염병에 걸려 눈이 멀어버린 자 모두를 격리 수용소로 보내어 가두고, 그들을 치료 없이 방치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눈 먼 자들이 격리 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죄수처럼 갇혀 살게 됩니다. 처음으로 눈이 멀었던 자를 치료하려다가 그에게서 감염되었던 안과 의사 역시 그러한 운명에 처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의사의 아내(Mulher do médico) 또한 남편인 의사를 따라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그녀는 남편이 끌려갈 때까지 눈이 멀지 않았지만, 자기도 눈이 멀었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남편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사와 그 아내가 끌려 들어간 수용소는 모든 감염자들을 사실상 중죄인이나 포로처럼 다루고 있었습니다. 수용소를 빙 둘러싼 군인들은 감염자들이 외부 시민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담장 가까이 접근하는 감염자들을 가차없이 총 쏘아 죽여버렸고, 감염자들끼리 서로 싸우며 죽이든 말든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는 점점 몰려오는 눈 먼 자들로 곧 포화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그 수용소에 갇힌 수감자 대부분은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생리적으로도 처치곤란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신체적 제약과 완벽하게 폐쇄된 격리생활 모두를 처음으로 겪게 된 그들에게 간호를 해주거나 심리상담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수용된 공간의 청소나 환기를 해줄 사람도 없었고, 그들 사이에 최소한의 질서를 잡아줄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수감자 가운데 혼자 앞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즉 의사의 아내는 수용소 내에서 기꺼이 눈 먼 자들의 눈과 손발이 되어 줍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 전파력 높고 실명률 높은 신종감염병 환자들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끝내 감염되지 않고 자기 시력을 보존합니다.

물론 그녀는 수용소 내의 모든 맹인을 다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왜 눈이 멀게 된 것일까요?(Por que foi que cegámos?)" 하며 한탄해도,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앞을 못 보게 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눈이 멀어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렇죠?" 하며 체념해도, "당신은 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나요?" 하며 질문해도, 그녀는 그저 침묵을 지키기로 합니다. 대신 그녀는 자기 비밀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지혜를 짜내서 감방 동료들을 돕고 이끌어줍니다.

그녀의 감방 동료들 가운데는 처음 거리에서 운전하다가 눈이 멀었던 최초 발병자와 그 아내도 있었고, '어두운 안경을 쓴 여자(Mulher dos óculos escuros)'라 불리는 창녀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태에 관해, 그리고 지나간 삶과 앞으로의 희망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의사 아내는 그들과 정서적 공감대를 이뤄가기 시작합니다.

불행히도 수용소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량의 식료품과 생활필수품만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눈 먼 수감자들은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발을 씻지도 못하고 옷도 전혀 갈아입지 못하는 등의 불편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똥오줌도 수용소 바닥 아무데나 싸갈기며 악취와 비위생과 굶주림 속에 뒹굴며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사 아내의 리더십 덕분에 의사 아내와 같은 방에 있던 수감자들만은 나름의 조직을 만들고, 그들끼리 서로 도우며 재난을 이겨내기 시작합니다. 그 소수의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떤 신분도 없고 계급도 없고 경쟁도 없고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물질적 제약으로 인해 풍족과 안락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그 지옥 같은 수용소 내에서 오히려 더 큰 상호인정과 깊은 깨달음, 그리고 최소한의 윤리적 자존을 지켜가며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용소 내에 사람이 너무 많아지고 식량은 부족해지면서, 수용소 내에서도 권력관계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소수의 폭력배들이 조직을 이루고 물리적인 힘과 권총 등의 무기를 앞세워 수용소 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잔인한 구타와 총기살인으로 공포심을 조장한 다음,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독점하고 수감자들을 노예처럼 부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러한 행동은 명백한 불법으로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사회기능 전체가 마비되었고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이상, 이러한 범죄자들을 제어할 만한 공권력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수의 수감자들은 이들 소수의 눈 먼 폭력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합니다. 물론 의사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아 운신의 폭이 넓은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물리적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폭력배들에게 대항할 용기를 갖기는 힘들었습니다.

급기야 폭력배들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독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용소 내 모든 여성들에게 성상납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요구였지만, 그걸 거절할 경우 남녀 할 것 없이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끊기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판국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수많은 여성들은 폭력배들에게 끌려가 윤간을 당하고, 그 대가로 얼마의 식량을 받아오게 됩니다. 의사 아내도 동료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끌려가 폭력배들에게 윤간을 당합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이러한 치욕을 당하는데도, 남편인 의사와 다수의 남성들은 여기에 비겁하게 굴복해버립니다. 그들은 여성들의 희생 덕분에 자기들이 생존을 이어간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절대적 폭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러한 치욕을 그냥 받아들여 버립니다.

그런데 폭력배들에게 윤간 당한 여성 동료 중 하나가 그 충격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자, 의사의 아내는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력배 두목을 살해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죽는다는 절박함도 물론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비굴한 삶을 더 이상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번 성상납 대상으로 폭력배들에게 끌려갈 때 몰래 가위를 숨겨 갖고 갔다가, 자기를 강간하는 데 열중해 있는 폭력배 두목을 재빨리 가위로 살해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여기에 광분한 폭력배들이 무기를 들고 덤벼오자, 의사 아내는 신속히 남성 동료들을 규합하고 여기에 맞서 싸우게 합니다. 그때까지 비굴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남성 동료들은 이제 의사 아내의 용기에 감동했는지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맹인들이 한데 뒤엉켜 서로 때리고 찌르는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어느새 수용소에는 화재가 일어나 건물이 붕괴하게 되고, 이 틈을 타서 의사 아내와 동료들은 수용소를 탈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용소 밖도 모든 사람들이 시력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망연자실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전기와 수도는 끊긴지 오래되었고, 식량은 바닥났으며, 애완견들은 모두 버려져서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모든 도시가 완전히 감염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의사 아내처럼 미지의 병에 감염되지 않고 끝까지 시력을 보존한 사람은 수용소 바깥에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일단 동료들을 이끌고 '어두운 안경을 쓴 여자' 집으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그 집이 그 수용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집에도 물, 전기, 난방, 식량은 없었지만, 일정한 안전이 보장된 그 공간에서 의사 아내와 동료들은 비로소 야만적 폭력에 대한 걱정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아내는 근처에 있던 어느 마트의 창고로 가서 식료품을 가져와 남편을 비롯한 동료들을 먹입니다. 운 좋게도 그 창고는 눈 먼 자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의사 아내는 이제 동료들의 끼니를 계속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날엔가는 하늘에서 고마운 비가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의사 아내는 여성 동료들과 함께 벌거벗고 밖으로 나가 그 비를 맞으며 몸을 씻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녀와 동료들은 문명의 혜택이 거의 사라진 환경 속에서도 점차 생존에 필요한 물질조건들을 되찾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자기가 모든 수감자들을 구하지는 못했다는 무력감, 자기 동료들을 먹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외면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 합니다. 이 세상에 오직 그녀 혼자만 시력을 보존하였다면, 이건 그녀에게 그만큼 큰 사명과 책임이 주어졌다는 의미일 텐데, 과연 자기 자신이 그 사명과 책임을 다했는지 의문이라 생각하면서 그녀는 반성과 자책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녀는 거리를 헤매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성당 안에는 수많은 눈 먼 자들이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신음하며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당의 예수상 눈에는 안대가 씌워져 있었습니다. "하늘이 보지 못한다면,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라(se os céus não vêem, que ninguém veja)"는 문구와 함께... 이렇게 예수에 대해서조차 수많은 민중들이 원망하고 있는데, 그 마음이 오죽할까를 헤아리던 그녀는, 결국 우리 인류 모두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하는 것인가, 신께서 우리 인류를 정말로 버리시는 것인가 고뇌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미지의 감염병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처음에 눈이 멀었던 그 남자(Primeiro homem cego)가 다시 시력을 찾은 것입니다. 이에 동료들 모두는 기뻐하고, 그 최초 발병자가 시력을 되찾은 것처럼, 인류 모두가 점점 시력을 되찾을 거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뿌연 우윳빛에 점점 사물의 윤곽이 보이는 대목에서 이 긴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시종일관 치열하게 다루는 주제는 바로 "인간의 원시적 특성(características primitivas do ser humano)이 과연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법률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우리 문명(nossa civilização representada pela lei e ciência)이 과연 도덕적인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기초적, 육체적, 물질적 조건(condições básicas, físicas e materiais)이 뒷받침되지 않는 인간의 삶이 과연 존엄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입니다. 작품 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모두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나 끔찍한 상황에 빠지고, 그에 관한 작가의 묘사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며 실감나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숨 막힐 정도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역시 주인공인 '의사 아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만적 폭력과 이기주의, 그리고 일차원적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온전히 자기 혼자에게 무겁게 주어진 책임을 다 하고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 윤리를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성서 창세기 제19장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에 따르면 신에 의해 이미 선택된, 구원이 예정된 자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료들이 당하는 극도의 치욕을 자기도 자청해서 당하는 등 롯보다도 훨씬 더 험한 꼴을 기꺼이 뒤집어 씁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미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롯보다도 훨씬 더 고뇌하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근대 시민의 관점으로 보건대, 법적으로 정당방위를 했으면 그 이상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텐데, 그녀는 어쨌든 자기가 어느 한 목숨을 끊어버렸다는 사실에 끝까지 괴로워 합니다. 이미 수많은 목숨을 살렸고, 그 정도면 인간으로서 할 만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괴로워 합니다.

그녀는 유일하게 시력을 보존한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가장 힘들고 무서운 일을 혼자 떠맡아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대가는 모두와 똑같이 나눕니다. 심지어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어두운 안경을 쓴 여자')와 잤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여자와는 마치 친자매와도 같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까지 합니다.

작품의 해석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바로 그녀의 선한 마음 덕분에 이 세계가 판데믹에서 벗어나 제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 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헤아려보면, 그녀는 자기와 자기 동료들만 구한 게 아니라, 우리 세계 전체를 구원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그녀는 창세기 롯의 수준이 아니라, 거의 예수에 버금갈 수준까지 고양된 존재이며, 인간이 아니라 아예 신의 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하지만 작품 막바지에 동료 여인 두 명과 함께 빗속에서 벌거벗고 함께 몸을 씻으며 해방감을 느끼는 장면을 보면, 그녀는 신이 아니라 분명히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장면은 몇십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약한 인간으로서 그 엄청난 고통과 치욕을 당하고 그 끔찍한 광경을 모두 자기 눈으로 지켜봐야 했으면서도,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묵묵히 자기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자기 할 일을 다 해냈다는 점에서, 그녀가 얼마나 위대한 발걸음을 걸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설을 읽고나면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부와 경제, 권력과 명예, 시각적 아름다움과 화려함, 생활의 편리와 안락, 사회적 진보와 발전 같은 것들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망한 것들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고작 의인 열 명이 없어서 그렇게 처참히 멸망하고 파괴되었다는데, 이걸 보면 우리 물질문명이란 게 그 얼마나 연약한 토대 위에 서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마음과 세상을 진정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YUMYUM
길지도 않은 글에 강간과 윤간이란 단어가 몇번이나 등장하는지, 주인공 여성을 성녀로 올려치기하고, 성녀와 창녀의 남성 모두에 대한 사랑 용서 평화를 노래하시려는 거 같아 ㄹㅇ 현웃이 터져나옵니다. 엔만하면 그냥 전형적 중년 한남 가톨릭 꼰대 교수의 코르셋 씌우기 개소리로 봐드리겠는데, 이 홈페이지 다른 글에서도 공통으로 보여지듯이, 지극히 잔혹하고 폭력적 가학적 선정적인 서사를 펼쳐대며 저질 잡스레기 수준의 맨스플레잉을 시전하시니까 그로테스크한 혐오감을 넘어 측은감만 일어납니다.
주인공 의사 아내처럼 남편을 위해서라면 강간 윤간도 기꺼이 당하고 남편과 그 성별의 모든 것을 용서하며 절대적으로 희생하는 순응 봉사의 여성상을 딴엔 이상화하고 싶었던 듯? 근데 거기서 더 나가 비 오는 날에는 바깥에서 발가벗고 춤까지 추라고, 그게 몇십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 될 거라고 하니 이젠 남성의 관음을 위한 섹슈얼리티까지 내면화하란 말인지 어의상실.
먼저 너님이야말로 성남인지 창남인지, 여성의 시선에서는 너님이 어떤 대상이 될지 되돌아보고 부디 조신해지기를 충고 드리고 싶음. 영화 블라인드에서도 이 대사가 나오죠. "니가 뭔데 여성을 가르쳐?"
윗글처럼 여성을 대상화 타자화하고 성녀-창녀 이분법으로 남성 중심 시스템에 길들이려 하는 모든 서사는 여성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 평생 남성을 위해 서포터 개념으로 갈려나가야 한다고 여성들한테 가르치려들기 전에 먼저 너님이 그동안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아왔는지를 인정하고 제발 아닥해주시길 이 여대에서 밥 빌어먹고 사는 한남교수 양반아.
2020-11-25
19:33:40




단비
여성들의 희생 덕분에 자기들이 생존을 이어간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남성... 남성들의 희생 덕분에 생존을 이어가는 것은 부끄럽지 않고 여성들의 희생 덕분에 생존을 이어가는 것은 부끄럽다는 뜻인지? 정작 대부분의 남성들은 순전히 여성들의 희생 덕분으로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일단 본인부터가 여성이 설립한 대학에서 여성이 낸 등록금으로 먹고 살아가면서 그런 자기 삶이 죄다 부끄럽다는 건지? 게다가 문장 하나하나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녀'라는 표현어에도 기가 찹니다. 영어 he와 she를 모두 합쳐 차별 없이 '그'라고 쓰거나 '그이'라고 쓰게 된지가 언제부턴데 아직도 '그녀'라는 성차별적 용어를 쓰고 있다니. '그녀'라는 말 자체가 영어 'she'를 번역한 일본어 '피녀(彼女)'가 어원이고 남자를 중심에 두고 여성을 비하하며 여자는 남자의 종이라는 성차별적 의식의 잔재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여대 교수를 하고 있다는 건지 정말 충격적입니다.
2021-01-14
01:27:41



다음글
  2020/03/12

이전글
  202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