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바깥은 여름'
2020-09-01 20:35:27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2010년대 중반부터는 세계 고전문학을 감상하기 보다 한국의 최신소설을 더 자주 찾아 읽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의 액정화면, 출근길마다 확인하는 미세먼지 농도와 차량 2부제 소식, SNS 공간에서 익명으로 퍼날라지는 사진과 영상과 뒷소문, 아파트 상가건물에 가득 들어찬 과외학원과 반찬가게와 치킨집, 지친 몸으로 밤늦게 귀가하다가 편의점에서 혼자 데워 먹는 혜자 창열 도시락, 인터넷 포털뉴스 댓글창의 욕설글과 추천수, 아파트 현관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삑삑 울려대는 공동비밀번호 터치음, 보편화된 1자녀 가정에서 외롭게 커가는 아이들과 그들이 온라인에서 몰입하는 연예인 팬덤 스밍 총공 문화, 어느덧 '우리 안의 타자들'로 곁에 선 외국인 노동자들의 서툰 한국말, 노량진 공무원학원가에서 기약없이 시들어가는 청년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싸구려 컵밥 컵반들, 그리고 거리와 상점과 아파트 곳곳에 설치된 CCTV의 차가운 감시안... 이런 것들로 꽉 채워진 21세기 대한민국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 이전 시대의 문학, 그것도 외국의 문학은 내 생생한 현실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어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들어 내 정신에 가장 큰 울림을 가져다준 문학작품들은 모두 최근 몇년 사이에 발표된 한국소설들임에 예외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첫손에 꼽고 싶었던 작품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소설집인데, 실제로 여기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2014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 아닌 게 없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단편은 '노찬성과 에반'이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노찬성은 한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열살짜리 초등학생이다. 찬성이의 아버지는 두 해 전 고속도로 갓길에서 소형 냉장트럭에 치어서 죽었다. 털 뽑힌 생닭을 가득 실은 트럭과 함께 낭떠러지로 추락한 아버지는 닭고기와 함께 불에 탄 채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시신을 보며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키득거렸다. 딱하게도, 아버지의 죽음 뒤에 찬성이와 할머니에게는 단 한 푼의 보험금도 지급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병인 골육종의 고통을 못 견디고 고속도로에서 트럭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몸을 던진 것으로 증명됐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기 전 고속도로 졸음 쉼터 바닥에서 커피를 팔던 할머니는 이제 고속도로 휴게소 분식코너에서 일했다. 이웃이라 해봐야 산자락에 띄엄띄엄 박힌 농가 몇 채가 전부인 동네였으므로, 찬성이는 오후 내내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혼자 놀았다. 하루 종일 힘든 노동에 지친 할머니는 저녁이면 집에 들어와 일찍 불 끄고 주무셨다. 코를 골고 주무시는 할머니 옆에 누운 채 어두움과 무료함을 참던 찬성은 매일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럴 때 나도 스마트폰 있으면 좋은데."

실제로 찬성은 친구들 사이에 커뮤니티가 작동하는 원리와 어휘로부터 소외돼 있었다. 작은 액정화면 안에서 기계인지 생물인지 모를 작은 것들이 바글대며 부서지는 모습을 친구들 어깨너머로 훔쳐보기만 했다. 친구들은 서로 스마트폰 문자로만 대화했다. 찬성이 용기 내 말을 건네도 그들은 스마트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한 찬성에게 드디어 친구가 나타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늙은 개였다. 처음에 기품 있는 자세로 먼곳을 바라보던 그 개는 반나절만에 시무룩해졌다. 찬성은 그 개에게 '에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집에 데리고 와 키우기 시작한다. 에반과 항상 함께 자면서 찬성은 누군가와 꼭 껴안고 자는 기분이 어떤 건지 처음 알게 된다. 그리고 찬성과 에반은 어느새 서로 가장 의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찬성의 유일한 친구였던 에반은 2년 후 암에 걸리고 만다. 동물병원 의사는 찬성에게 에반을 안락사시키라고 권한다. 에반은 이미 죽는 게 더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찬성은 에반의 안락사 주사 비용을 모으기 위해 하루 수십동의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일주일만에 전단지 오천 장 이상을 돌려 십일만사천원을 벌어들인 찬성은 그 돈을 갖고 에반과 함께 동물병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마침 그날은 동물병원이 문 닫은 날이었고, 에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찬성은 그 돈으로 자기도 모르게 싸구려 스마트폰을 사고 만다.

찬성은 그 스마트폰으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고 '터닝메카드'를 보고 스마트폰의 검은 액정표면에 닿은 빛이 물에 뜬 기름처럼 매끈하게 일렁이는 것을 즐긴다. 이제 찬성은 하루종일 스마트폰만 만지다가 충전하는 시간에만 잠시 에반을 살피게 된다. 애초에 찬성은 돈을 다시 벌어 에반의 안락사비용을 며칠 내로 반드시 마련할 참이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다시 전단지 수천장을 돌리려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쩌면 안락사에 대해 자신이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겨난다. 그리고 잠을 자다가 문득 이상한 기척에 깬 찬성은, 에반이 두 앞발을 찬성의 가슴팍에 올리고,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는 양, 찬성 얼굴에 자기 머리를 비비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그날 낮에 에반은 찬성 곁에서 사라진다. 찬성은 스마트폰 손전등 기능을 켠 채 사방을 수색해보지만 에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찬성은 휴게소 쓰레기통 옆에 에반의 시체자루가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형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아이, 진짜라니까. 그 개가 일부러 뛰어드는 것 같았다니까.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단편 '가리는 손'은 어느 다문화 싱글맘 가정 얘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대학 시절 어느 외국인 유학생의 영민함과 재치에 반해 그 외국인 남자와 사랑하였고 그의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남자는 주인공을 남겨둔 채 고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한 두 사람이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고유한 존재방식과 중력 때문에, 헤어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혼자서 아이를 낳은 다음 어느 요양병원 영양사로 일하며 외벌이로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다. 아이는 통통해졌다 홀쭉해지길 반복하면서 잘 자란다. 가끔은 키워주는 사람 좋으라고 선심 쓰듯 웃어주는 일도 잊지 않으면서.

그러나 아이는 커갈수록 자신의 다른 피부색으로 인한 주변 사람들의 차별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언젠가부터 썬크림을 과하게 바르기 시작하며, 익명으로 써갈긴, 자신에 대한 모욕적인 문구를 발견할 때마다 친구 중에 누가 자기를 욕했을까 의심하곤 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아이와 주인공 모두는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다가 아이는 어느 중학생들의 노인 폭행치사 사건에 연루된다. 십대 아이들 네 명이 편의점 앞에서 할아버지 한 명과 실랑이를 하다가 발로 걷어차 그 할아버지를 죽인 사건이었는데, 살해 당시 주인공의 아이는 멀리서 목격자로 있었다. 그러다가 주인공의 아이는 가해자들이 도망친 뒤에 시체 쪽으로 다가와 죽음을 확인하고 손으로 뭔가 자기 표정을 가린 다음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 모습은 편의점 앞에 주차된 자동차 블랙박스에 전부 찍히고 말았다.

불행히도, 그 동영상 노모 버전 파일은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얼굴이 그대로 노출된 아이는 다문화라는 이유로 더 심한 욕을 얻어먹었다. 주인공은 아이에게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아이는 이에 대해 침울하게 답한다. "엄마, 나 아니에요." "그렇지?" "응, 아니에요. 난 걔네들 알지도 못한다고."

하지만 주인공은 하루에도 수백번씩 뉴스 페이지의 댓글 칸 새로고침 단추를 눌러가며 자기 아들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비난과 저주의 말들을 읽게 된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모두 부당한 인신공격이었다. 주인공은 사이버수사대에 연락하여 동영상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무한히 복제되며 전달되는 그 모든 노모자이크 동영상들과 댓글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주인공은 아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는 모습을 보고 문득 소스라치게 놀란다. 여러 네티즌의 지적처럼, 아들이 노인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비명을 지른 게 아니라 실제로 웃었던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 인간 모두가 남의 살을 먹고 사는 포식 생물에 지나지 않는 거구나. 그리고 이 세계는 너무나 차가운 곳이라서, 그 차가움을 견디려 다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게 돼있는 것이구나.


또 다른 단편 '건너편'은 어느 공시학원 커플 얘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도화는 체대를 졸업하고 구립 스포츠센터에서 수영 강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경찰공무원시험에 응시하기로 하고 노량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도화는 이수를 만났다. 제대 후부터 줄곧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남자였다.

도화가 이수를 만난 날은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이 춥던 날이었다. 도화와 이수는 그날 같은 무게의 뷔페용 플라스틱 그릇을 들고 같은 줄에 서있었다. 도화는 '간통' '폭행' '강도' 등 영단어가 적힌 '경찰 영어 단어 총 정리, 범죄편' 인쇄물을 보며 된장국을 떴다. 그때 뒤에서 옆면이 새카매진 한국사 교재를 들고 서있던 이수가 도화에게 말을 걸면서 둘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도화는 스물아홉 때에 경찰시험 합격증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이수는 계속해서 7급 공무원시험에 떨어졌다. 세번 낙방할 때까지는 크게 낙담하지 않았지만, 4년, 5년을 넘어가자 어느 순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수는 도화가 경찰이 된 뒤로도 2년 동안 시험준비를 더 하다가 6년의 노량진 생활을 그만두고 부동산컨설팅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이제는 도화가 '어디 가자' 할 때 죄책감 없이 나서고, 친구들이 '놀자' 할 때 돈 걱정 없이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게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사생활은 실적 압박이 너무나 컸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거절과 모욕, 하대를 당할 때마다 이수는 자신이 '있을 뻔한 곳' '있어야 했던 곳'을 쳐다봤다. 그늘진 얼굴로 자기 인생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복기했다. 그리고 이수는 도화 몰래 회사를 그만두고 노량진 공시학원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무렵 도화는 이수와 이별하기로 결심한다. 이수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도화를 속여서가 아니었다. 그냥 도화 마음 속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별 결심을 하고도 도화는 이수 옆에 비스듬히 누워, 오랜 연인의 잠든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한다. 이불 밖으로 뻗어나온 이수의 맨발, 그동안 자신과 많은 곳을 함께 간 연인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도화는 결국 이수와 헤어지고 만다. 다닥다닥 붙은 상점 위에 일렬로 죽 늘어선 둥근 조명이 휘영청한 노량진 수산시장 안에서였다. 수백 명이 왕왕거리는 횟집에서, 모두 소리 높여 떠드는 가운데 도화와 이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이별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도화는 언제나처럼 자기 직장인 서울시경 종합교통정보센터에서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한다. 그런데 방송 중에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하다가 도화는 잠시 얼어붙는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그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두 연인의 옛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두 연인의 젊은 얼굴, 그 얼굴이 눈 앞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단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신혼기에 교사 남편을 잃은 어느 여성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 명지의 남편은 제자들과 현장학습을 떠났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부모도 없이, 반신불수 누나와 함께 살고 있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가 물에 빠지자, 그 제자를 구하려다 남편도 함께 숨을 거둔 것이었다.

장례식을 치른 후 명지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스마트폰을 들어 '시리'라는 인공지능 개인비서 앱과 대화를 한다. 시리에게 "나는 행복해요." 했다가 "아니에요. 슬퍼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시리는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라 답한다. 명지가 시리에게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물으면, 시리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라 답한다. 그리고 명지는 시리로부터 당시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었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한다. 그건 다름 아닌 '예의'이다.

명지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가서 옛 남자사람친구 현석을 만난다. 현석과 술을 마시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들, 시작도 끝도 목적도 방향도 없는 얘기를 나누다가 잠자리를 같이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접촉을 통해서도 명지는 자기 고통의 위로를 받지는 못한다.

명지는 다시 시리에게 묻는다. "고통이란 무엇인가요?" 이에 시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고통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라고 답하며 관련 사이트를 띄운다. 명지는 다시 시리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하고 묻는다. 이에 시리는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라고 답한다.

이제 명지에게 시리는 목적지로 가는 법은 말해줘도 거기까지 함께 가주지는 않을 친구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명지는 시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당신은 정말 존재하나요?" 그러자 몇 초 후 시리는 이렇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답변해드릴 수 없는 사항입니다."

그러던 명지를 드디어 위로해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 물에 빠진 제자의 누나가 보낸 손편지였다. 편지지 위에는 이제 막 한글을 뗀 아이가 쓴 것처럼 크고 투박한 글씨로 여러 감사의 말이 씌어져 있었다.

그 말은 시리의 말처럼 단정하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투박한 손편지를 읽고서야 명지는 드디어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남편을 보내고서 자기가 줄곧 궁금해 하고 기다렸던 그 무엇과 비로소 만난 기분이 된다.


이 단편집을 읽다보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21세기의 풍경은 그저 스산하고 심드렁하고 비정하고 무심한 것으로만 느껴진다. 생활은 훨씬 더 매끄러워지고 편리해졌지만, 삶은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삭막해지고 각박해졌으며, 인간의 마음은 조금도 더 발전되거나 진화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눈부시게 발전한 물질문명은 우리 인간을 자꾸만 세계의 중심 밖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화와 디지털화는 공간의 제약을 없애고 소통을 가속화시켰다. 하지만 정작 우리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에게서 얼마 안 남은 선의와 온기와 인정을 빼앗아가버렸다.

특히 스마트폰은 인간의 정신적 보호막을 완전히 거둬내 버렸다. 옛날엔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었다. 하지만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이 시대에는 모두가 24시간 외부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밥을 먹는 중에도, 잠을 자는 중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으며 피를 흘려야 하게 되었다.

이 단편집을 읽다보면 나는 이 21세기가 다른 '시대'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너무나 생경해서, 예전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전혀 다른 공간에 온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

그리고 손 안에 작은 수정거울처럼 번쩍이는 스마트폰과 살벌한 양극화와 암담한 저취업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 속에서, 내가 누리는 이 모든 편의와 안락은 이제 신기루처럼 아련하게 다가올 뿐이다. 마치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과도 같다. 때로 눈 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지만, 어쨌든 내 것 같지는 않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YUMYUM
심각한 악의적 왜곡이네요. 한남이 한남짓 하는거 하루이틀 보는 게 아니지만 김애란 작가님의 팬으로 '바깥은 여름' 같은 좋은 작품을 이렇게 폭력적 난도질해버리는 것에 참을수 없는 모욕을 느낍니다.
'노찬성과 에반'에서 아버지가 털 뽑힌 생닭과 불 탄 채로 죽어서 사람들이 시신 보면서 맛있는 냄새 난다고 키득거렸다고 했죠. '노찬성과 에반'을 다시 여러 번 읽었지만 그런 표현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생닭 싣은 트럭에 치어서 돌아가셨다 얘기만 있을 뿐인데요. 스토리를 일부로 선정적 왜곡해서 시체가 불 타 치킨 냄새 풍기는 모습을 자극적 전시하고 그 그로테스크한 걸 독자들께 보여주며 공포감 유발의 쾌감 같은 거라도 느끼셨나 봐요.
휴게소 쓰레기통 옆에 에반 피 묻은 시체자루가 놓여 있었다고 쓰신 것도 다시 확인해봤지만 그 비슷한 장면조차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에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열린 결말의 소설인데 왜 갑자기 에반의 끔찍한 시체를 등장시킨 건지 혹시 네크로필리아:시체성애 도착증이라도 있는건지.
'가리는 손'에서 주인공의 아이에게 사람들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는 얘기, 주인공의 아이가 노인 폭행치사에 가담해서 노인의 시체를 보고 웃었다든 얘기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결말부 우리 인간 모두가 남의 생살을 뜯어먹고 사는 포식동물이라고 말한 것도 새빨간 거짓말.
왜 이런 있지도 않은 가학적 섬뜩한 장면을 허위로 지어내고 김애란 작가가 쓴 것처럼 했는지? 왜 주인공의 아이를 실제와 다르게 차별 받아도 싼 아이로 몰아갔는지? 강약약강의 미개한 사고회로에서 비롯된 유색 피부 외국인에 대한 혐오증을 숨기지 못하는 듯.
'건너편'도 억측과 왜곡으로 일관하는건 마찬가지. '건너편'에서 도화는 이수의 맨발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고 구라쳤는데, 이건 또 맨발 패티쉬인가. 도화가 이수의 맨발에 성적으로 꽂혔다는 묘사로 남성들이 관음하기 위해 만든 여성 쾌락 판타지를 전시하고 싶었던 거 같은데 이게 누구의 시각으로 누구를 대상화하고 누구를 종속시키려 하는 건지 자문하시기 바랍니다. 소설에서 도화는 이수한테 헌팅 당하고 사기로 포획되어 있었지만, 끝내 종속되지는 않았고 대상화되지도 않았습니다. 이수의 개인 룸싸롱과도 같았던 그 더러운 혐애의 공간을 주체적으로 박차고 나왔으니.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또 명지가 현석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했는데 이것도 완전 개구라. 명지를 섹스를 탐하는 못된 창녀로 만들고 죽은 뒤에까지도 아내 명지의 몸에 대해 소유권적 집착하는 명지 남편 입장 감정이입을 하려 허위 서사를 지어냈음. 명지를 의인 남편과 대비된 이기적 색녀처럼 몰아갔다가 결국 죽은 남편의 정신적 노예로 귀착되게 하는 결말로 바꿀려고 여성혐오적 왜곡을 저지른 듯.
마지막으로 더. '가리는 손'에서 "아이는 커갈수록 자신의 다른 피부색으로 인한 주변 사람들의 차별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라고 했는데...
다문화 아이들이 차별받는 것은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는게 아닙니다. 차별은 차별 받는 자에게 내재하는 원인이 아니라 차별자들의 인종주의적 사고, 우월주의적 사고가 원인이에요. (진짜 이 인간이 글인지 똥인지 싸놓은걸 보면볼수록 평생을 PC함과는 담 쌓고 살아온 물건같이 보임.)
글 전체에 본인 잔인하고 살벌한 일상에 중독된 걸 자랑삼는 마초적 우월의식이 찌들어 있고 비뚤어진 자의식을 일부로 여성작가의 작품에 투사하여 멀쩡한 작품을 피흐르는 괴기물로 변질 후의 쾌감을 느끼려한게 분명해보여요. 너님이 평범한 한남이라 해도 목불인견일텐데 이걸 보면 한술 더떠 허언증 환자에다 싸이코패쓰, 쏘시오패쓰 모두를 겸비한 한남충인 듯....
ㄹㅇ 두손모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오늘 너님 글 읽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불쾌했네요. ㅎ
2020-11-25
18:50:23



다음글
없음
  

이전글
  2020/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