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이익의 손해와 신뢰이익의 손해
2021-02-25 13:13:07
2021-02-25 13:13:07
채무불이행(제390조)에 있어서 채무가 제대로 이행되었을 경우에 채권자가 얻게 되었을 이익을 이행이익(履行利益)이라고 한다. 반면에, 계약무효의 사안(예를 들면 계약이 방식의 흠결로 무효가 되거나 내용상의 착오로 취소가 된 경우; 불능인 채무를 잘못 약정하였다가 계약을 해제하는 경우)에서 그 계약이 유효일 것으로 믿었던 것 때문에 일방이 상실하게 된 이익을 신뢰이익(信賴利益)이라고 일컫는다. 다시 말해 이행이익은 ‘이행이 이루어졌더라면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적극적으로 만들어줬을 상태’라 설명할 수 있고, 신뢰이익은 ‘계약교섭이 아예 없었더라면 그나마 소극적으로 지켰을 채권자의 상태’라 설명할 수 있다. 독일어로는 이행이익을 ‘Erfüllungsinteresse’라 하고, 신뢰이익을 ‘Vertrauensinteresse’라 한다. 영어로는 이행이익을 ‘expectation interest’라 하고, 신뢰이익을 ‘reliance interest’라 한다(물론 개념상 독일법과 약간의 차이가 있음). 이 두 개념의 구별은 우리 민법상 과거회복과 미래지향이라는 두 가치의 대립과 조화를 반영한다고도 한다.
채무불이행, 특히 이행불능의 경우 이행이익의 손해는 예를 들어 채권자에게 인도되지 못한 목적물의 현재 시가가 된다. 만약 채권자가 그 목적물을 제3자에게 다시 매각하여 전매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 전매이익 역시 이행이익이 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이행이익은 채권의 목적인 급부의 가치에 상응하며(이러한 점에서 급부손해의 배상도 ‘이행이익의 배상’과 개념이 크게 다르지 않음), 목적물의 전매이익(엄밀히 말해 이러한 전매이익은 급부손해의 배상이 아니라 파생손해의 배상에 해당할 것임)까지 포함할 수 있으므로, 꽤 많은 금액으로 계산되곤 한다. 반면에 신뢰이익은 그 채무가 유효할 것을 믿고서 체결한 계약의 체결비용(종이값, 교통비, 중개료, 조사비용, 감정·공증 및 견적비용, 대금차용비용, 운송수단 및 인력의 확보비용)이나 위약금 정도로서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인 신뢰이익손해(예를 들어 다른 물건을 살 수 있었던 가능성의 포기나 치명적인 신용상실 등등)은 특별손해로 취급되기 때문에, 가해자의 예견가능성을 결여하여 그 배상책임이 인정되지 않을 때가 많다(제393조 2항).
우리 민법에서 이행이익배상이 아닌 신뢰이익의 배상이 법률효과로서 규정된 예로는 계약체결상의 과실(제535조) 정도를 들 수 있고, 이 경우 신뢰이익(신뢰손해액)은 이행이익(불이행손해액)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제535조 1항 후단). 그 밖에도 신뢰이익이 배상청구될 수 있는 예로는 ‘계속적 채권계약(繼續的 債權契約)’의 이행이 착수되기 전에 양 당사자가 계약을 해제하는 때(제601조 등)를 들 수 있다. 반면에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 이후 채무자의 귀책사유 있는 채무불이행을 전제로 하여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제390조)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이행이익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 일방의 계약준비·이행비용 지출과 상대방의 채무불이행 : 상대방의 채무이행을 믿고 일방이 계약의 준비 또는 계약상 채무의 이행을 위하여 비용을 지출했으나 상대방의 채무불이행으로 인하여 일방의 그러한 비용지출이 무용하게 되었을 수 있다. 이러한 비용지출은 상대방의 신뢰배반에 따른 일방의 재산상실이라는 외형을 띠고 있는 만큼, 이행이익의 손해라기보다는 신뢰이익의 손해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는데, 계약무효사안이 아닌 채무불이행사안에서 채권자가 이러한 지출비용손해를 채무자에게 배상청구할 수 있을지 문제된다. 이에 대하여 우리 법원은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계약해제와 아울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에 그 계약이행으로 인하여 채권자가 얻을 이익, 즉 이행이익의 배상을 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에 갈음하여 그 계약이 이행되리라고 믿고 채권자가 지출한 비용 즉 신뢰이익의 배상을 구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다만 그 신뢰이익은 과잉배상금지(過剩賠償禁止)의 원칙에 비추어 이행이익의 범위를 초과할 수 없다고 하였다( 大判 2002.6.11, 2002다2539). 통설도 비슷한 입장이지만(金奎完, 손해배상과 비용배상, 재산법연구 제21권 제1호, 2004.08, 171면; 박영목, 계약채무의 불이행으로 인한 비용배상, 비교사법 제15권 제3호, 2008.09, 47면), 사견으로는 계약의 유효에 대한 신뢰의 좌절과 달리, 계약의 이행에 대한 신뢰의 좌절은 이행이익의 손해로 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채무자의 불이행으로 인하여 채권자가 추가적으로 지출한 비용을 채무자가 배상하는 것은, 결국 채무자가 제대로 이행했다면 채권자가 있었을 상태로 채무자가 만들어주는 것(“so zu stellen, wie er stünde, wenn ordnungsgemäß erfüllt worden wäre”)인 이상, 이는 이행이익의 배상이라는 것이다(비슷한 견해: 鄭震明, 헛되이 지출한 비용의 배상, 민사법학 제70호, 2015.03, 211면 이하).
* 채무불이행으로 인해 이행이익의 손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신뢰이익의 손해는 발생한 경우 : 광고대행업체 乙에게 주택조합원 모집 및 아파트분양업무 대행을 맡겼던 건축회사 甲이 정당한 근거 없이 乙에 대해 계약해지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乙이 이미 지출한 전단광고비용 4억여원을 날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안에서 우리 법원은, 어차피 甲의 이행거절로 실현되지 못한 乙의 이행이익을 증명하기는 어렵고, 오직 乙이 억울하게 지출한 이행비용인 전단광고비용 4억여원의 증명만이 용이하다면, 乙은 그 지출비용을 甲에게 손해로서 배상청구할 수 있는 게 원칙이라고 하였다. 대개의 경우 계약일방의 이행이익은 그의 이행비용에 순이익을 더한 금액으로 계산될 수 있는 만큼, 계약일방이 무용하게 지출한 이행비용은 이행이익 손해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 사안에서는, 어차피 甲이 이행거절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乙은 책임분양률 만큼의 조합원모집을 하지 못한 이상, 甲한테서 분양대행수수료를 받을 수 없게 돼있었다. 다시 말해 甲의 부당한 이행거절이 없었으면 乙이 얻었을 이행이익 같은 것은 위 사안에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위의 경우 乙은 甲에 대해 이른바 신뢰이익의 손해, 즉 지출비용의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大判 2017.2.15, 2015다235766). 물론 乙은 계약이행비용을 지출하였지만, 본디 채무이행비용, 즉 변제비용은 채무자가 당연히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다. 그러므로 계약일방의 반대급부이익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에까지 그 일방이 지출한 이행비용을 상대방이 보전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게 마땅하다 할 것이다.
* 지출비용이 기대이익의 손해로 인정된 경우 : 채무자의 이행지체 또는 불량이행으로 말미암아 채권자가 손해를 입었는데, 그 손해가 채권자의 예기치 않은 비용지출 또는 재산가치하락 형태로 나타난 경우, 이를 항상 신뢰이익으로만 볼 수 있을지 문제된다. 대체로 이행이익은 미래에 달성될 이익의 실현 좌절, 신뢰이익은 과거부터 계속 지켜져야 했던 재산상태의 감소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 경우 채권자의 비용지출은 후자로 보이는 게 맞긴 하지만, 본디 계약이 유효하여 채무가 이행되어야 하는 경우 채권자에게 이행이익의 손해는 인정될지언정 신뢰이익의 손해, 즉 계약의 유효를 믿었음으로 인한 손해는 인정될 수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항만관리회사 乙의 과실 때문에 항만의 크레인 붐대가 추락하여 해상운송사 甲의 선박이 파손되었으나, 甲이 자기 소유의 대체선박에 화물을 환적하여 운송하는 데 성공한 결과, 乙의 항만관리채무이행으로 甲이 얻었을 이행이익, 즉 운임수령이익은 甲에게 일응 충족되었고, 단지 甲이 선체 수리비, 수리기간 중 추가연료비, 선원들 초과수당비용, 환적비, 화물폐기비용, 본선 청소비 등을 지출해야 했던 사안을 보도록 하자. 이 사안에서 우리 법원은 이렇게 ‘낭비된 비용 wasted expenditure’을 甲이 乙에 대해 ‘기대이익 expectation interest’의 손해로서 배상청구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大判 2016.5.27, 2014다67614). 어차피 이 사안에서 甲의 적극적 이행이익, 즉 ‘기대이익’의 감소를 증명하기는 어려운 반면, 甲의 비용지출로 인한 신뢰이익의 감소를 증명하기는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사견을 덧붙이자면, 그 예기치 않은 비용지출로 인한 甲의 재산감소는 사실상 甲의 신뢰이익 손해가 아니라 甲의 이행이익 미충족분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차피 乙의 채무불이행이 없었더라면 甲은 그러한 비용지출을 하지 않아 더 많은 재산을 보유했을 것인 이상, 이행시에 예상되는 재산상태와 불이행 후의 재산상태 사이 차액을 이행이익의 손해로 봐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235 |
354 |
2,905,82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