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0-13 21:44:42
독일에 들어오기 직전에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하는 것은 흔히 독일유학을 가는 데 있어서의 가치관 확립이라고 하지만, 이런 문제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므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독일에 와서 별로 확고한 가치관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한국유학생들을 많이 보았고, 괜히 가치관 어쩌구 하며 내 앞에서 설교하려 드는 사람들은 솔직히 지겨웠기 때문이다(어련히 알아서 할까봐... 애국심, 겸손함, 공동체정신, 어쩌고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소리다. 그냥 착하게만 살면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대학교와 전공, 논문주제(박사과정 진학인 경우)를 확정하고,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하다. 대학교와 전공이 정해지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어떤 어학시험을 필요로 하는가(예를 들면 DSH시험을 봐야 하는가, 해당 대학의 어학시험을 봐야 하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봐도 되는가)를 알아봐야 하고, 그 다음에 어학과정(현지 독일문화원, 사설학원 아니면 해당 대학의 어학강좌)을 고르도록 한다.
재정문제가 해결이 안되면(부모님께서 돈 없다고 하시면) 장학금을 알아봐야 한다. 장학금으로는 데아아데와 아데나워 장학금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데아아데(독일 연구교류처)의 경우 1년에 한국에서 많이 뽑아야 12명 뽑는 게 고작이지만, 일단 거기 뽑히기만 하면 유학생활이 풀린다고들 한다(결혼 안 하고 가도 한달에 900 EUR 정도 받고, 결혼하고 가면 훨씬 더 많이 받는다).
데아아데 장학금에 지원하려면 매년 늦여름쯤 독일대사관에서 각대학에 게시하는 안내문건을 잘 읽어봐야 한다. 그 안내문에서 알려주는 대로 대사관에서 배부하는 지원서에다 연구계획서, 이력서를 작성하고, 독일 지도교수 승락서, 한국교수추천서 2부를 첨부해서 마감날까지 대사관에 제출해야 한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이상의 졸업 및 성적증명서(영문)와 어학증명서 등도 내야 하지만 그건 별 게 아니고(그래도 빠뜨리면 안 됨), 연구계획서와 독일 지도교수 승락서가 중요하다. 이걸 갖다 내면 서류심사를 거쳐 전공별로 4명 정도를 추려서 구술시험을 보고(대개 늦가을쯤 치른다), 거기서 선발된 한두명 안에 들면 건강진단서, 여권, 비자 준비해 독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데아아데 장학금에는 낙방의 고배를 들게 되고, 괜히 그거 준비한다고 시간 낭비하다 유학 가는 적기를 놓치는 수가 많다. 따라서 부모님 지원만 확실하다면 과감히 자비로 유학 가는 것도 좋으며, 그래서 빨리 마치고 돌아오면 그게 더 돈 버는 것일 수도 있다. 유학비용은 동독지역이나 시골지역의 경우 한달에 80만원 정도 든다고 하며(고시 본다고 신림동 고시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싸다), 대도시지역도 한달에 120만원 정도가 든다지만 그 대신 아르바이트의 기회가 많다고 하니,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
재정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는 대학입학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대학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는 데아아데 장학금 지원서류와 거의 비슷하다. 입학신청서 양식 역시 대사관에 가서 얻어야 하며, 그 양식과 함께 첨부해야 할 서류를 해당대학의 외국인학생부에 보내면 대학입학 허가가 한국으로 날아온다 (물론 안 날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실패의 원인을 잘 알아본 후 다른 대학에 다시 신청한다). 입학허가를 받으면 독일 대사관으로 가서 비자발급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게 또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선 독일 현지 어학원에 3개월치 수업료를 지불하고 등록확인서를 받아야 하고, 부모님 또는 4촌 이내의 친척으로부터 재정증명을 받아야 한다.
재정증명은 한달에 생활비로 500 EUR 이상을 지원하겠다는 보호자의 확인서이다. 월수입 200만원 이상임을 증명하는 급여/수입증명서, 재산세 납세증명서를 첨부하고, 주민등록증을 지참한 보증인이 독일 대사관에 직접 나와서 서명 날인해야 된다(장학생인 경우는 이런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비자신청은 출국 최소한 6주 전에는 해야 하며, 출국 비행기표도 가급적 미리 예약을 해두어야 여행비를 절약할 수 있다.
비자를 받고 비행기표까지 손에 쥐면 그때는 "아, 이제 유학을 가게 됐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친척 친지들에게 줄줄이 인사 다니고 여기저기 환송회를 치른 후 환송객들과 함께 김포공항에 나가 무료하게 비행기 출발시간을 기다리다가 출발시간 약 30분 전쯤 해서 환송객들에게 손 흔들고 탑승구내로 들어가면 그들과는 이제 몇년, 아니 몇십년이 될지도 모를 이별을 하게 된다(난 환송객 없이 그냥 떠났음).
무거운 짐 낑낑 메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라타 약 12시간의 비행기 여행을 한 뒤 독일에 도착해보면 시간이 네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에 놀라게 된다(14:55 비행기를 탔다면 19:30경에 도착). 한국과 독일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자기 공부할 도시로 가야 하는데, 이때 우왕좌왕하지 말고 용감하게 길을 물어서 늦지 않게 마지막 차나 비행기를 잡아타야 한다. 안 그러면 그 넓고 황량한(좀도둑이 들끓는)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무거운 짐보따리 잔뜩 들고 공포에 떨면서 잠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 독일인에게 길 묻는 방법 같은 것을 출국전에 확실히 숙지해놓아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면, 거기서 어디 호텔 같은 데라도 잡아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나서 어학기관으로 가서 등록확인하거나 의료보험 신청하고 대학에 등록하고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때부터 독일유학생신분이 된다. 등록도 안했는데 언제 독일에 유학 왔고 전공이 뭐고 어쩌고 하면, 현지 고참 유학생들에게 시건방 떤다고 혼난다. 겨우 어학과정이나 다니게 될 주제에 감히 유학생 행세를 했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독일대학에 등록했다고 해서 바로 전공에 들어가는 건 아니고, 인문사회계의 경우 대개 한두 해 정도 어학과정을 다녀야 한다. 우선 DSH를 비롯한 어학시험에 합격해야 하며, 거기에 합격해야만 등록도 가능하고 전공공부에도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DSH에 합격했다 해도 어떤 대학에서는 인정을 안 해주는 경우가 있고, 인정을 받아 등록을 하고 전공공부에 들어간다 해도 추가로 어학과정의 병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 어학과정(외국어로서의 독일어과정)을 완전히 끝내기 위한 시험까지 합격해야 실질적으로 전공에 몰입할 수가 있게 되니, 독일 가서 처음 몇년은 어학만 하다 날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유학 전에 미리 한국에서 어학실력을 충분히 쌓아두는 것이 독일에서 헤매는 기간을 단축시키는 데 유리하다.
독일에 비행기 타고 갈 때 준비해야 할 물건은 우선 여권과 비자가 가장 중요하고, 그밖에 여권용 사진 여러 장과 고교, 대학, 대학원의 졸업 및 성적증명서(영문) 두어 통, 그리고 운전면허증과 병역증명서의 독일어번역공증본도 가져가는 것이 좋다. 이하는 꼭 필요하지는 않아도 이왕이면 가져가라고 추천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다.
사전과 어학교재(특히 문법), 세면도구와 수건(여러 장), 면도기와 손톱깎이, 내복과 양말(여러 켤레), 남방과 청바지(두어 벌), 비옷을 겸한 잠바, 운동화와 신발주걱, 자명종시계, 젓가락, 전기밥통, 각종 문구용품, 한국친지들의 전화 및 주소록(이거 없으니까 정말 황당하데?), 한국의 컴퓨터 프로그램 등...
양복과 바바리코트 등은 괜히 무겁게 가져왔다가 여태껏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것들이며 앞으로도 입을 기회가 거의 없을 것 같다. 인삼차나 녹차 같은 것도 괜히 가져왔다는 생각이다. 음악 듣기를 좋아해 테이프와 씨디 등을 왕창 들고 왔는데, 독일에 오면 독일음악이나 독일어회화테이프 외에는 도무지 뭘 듣기가 싫어진다. 차라리 외국인 장기자랑 같은 거 참가할 때 필요한 한국가요 반주테이프나 한개 가져가는 게 실용적이다.
책도 자기 세부적인 전공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한국책 몇권만 들고 가면 되며, 독일책들은 도서관에 가면 다 있으니 갖고 갈 필요가 없다. 돈은 잘 보관할 자신만 있다면 한번 바꿔갖고 올 때 많이 갖고 가는 것이 현명할 거다(단, 장학금 받아갖고 가는 경우라면 개인돈은 1,000 EUR 정도만 갖고가도 충분).
1999.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