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Verweilen beim Negativen)
2008-05-30 17:15:37

1. Slavoj Žižek의 저서 가운데
"Verweilen beim Negativen"
이라는 책이 있다.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정도가 되겠는데,
(그 번역서가 이미 작년에
도서출판b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에 보면
Hegel이 옛날에
"Phänomenologie des Geistes(정신현상학)"라는 책에서 썼던
아래와 같은 서문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Die kraftlose Schönheit haßt den Verstand, weil er ihr dies zumutet, was sie nicht vermag. Aber nicht das Leben, das sich vor dem Tode scheut und von der Verwüstung rein bewahrt, sondern das ihn erträgt und in ihm sich erhält, ist das Leben des Geistes. Er gewinnt seine Wahrheit nur, indem er in der absoluten Zerrissenheit sich selbst findet. Diese Macht ist er nicht als das Positive, welches von dem Negativen wegsieht, wie wenn wir von etwas sagen, dies ist nichts oder falsch, und nun, damit fertig, davon weg zu irgend etwas anderem übergehen; sondern er ist diese Macht nur, indem er dem Negativen ins Angesicht schaut, bei ihm verweilt. - Sie ist dasselbe, was oben das Subjekt genannt worden [...]"

(무기력한 아름다움은 지성을 증오하는데, 그것은 지성이 아름다움에게 아름다움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생이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파멸로부터 완전하게 보호되어있는 생이 아니다.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안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생이 바로 정신의 생이다. 정신은, 오직 절대적으로 찢겨있는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때에만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이 이러한 힘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것에 관해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는 이것은 거짓이다, 이제 이것은 끝났다, 하고 말하고 나서 거기서부터 손을 떼고 다른 어떤 것으로 이행해버리듯이, 부정적인 것을 외면해버리는 긍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힘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 때문에 정신은 진리를 획득하는 힘을 갖는 것이다. - 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 -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6, S. 36에서 인용하고 직접 번역함



이를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그것이다.
소위 지성 내지 오성(Verstand)을 갖고 있는,
학자라는 사람이라면,
자기 입맛에 맞고 자기 생각과 일치되고
자기를 긍정하는 것만 졸졸 따라갈 것이 아니라,
설령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포함해 이 세상 모든 것의 이치를 궁구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이며,
(über alles Vorkommende philosophieren)
자기를 부정하고 파괴하려 하는 것이라 해서  
그것을 쉽게 배제하거나 외면해버리려 해서는 안되고,
대신 그것을 끝까지 마주보면서
그것과 함께 목숨을 걸고 외줄을 타며 먼길을 가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2.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런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인간은 굳이
피곤하게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만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에도
매사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자기 주위에 부정적인 것이 나타나면
그것과 함께 머무르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위협해서 무릎을 꿇리든가
그것을 죽이든가,
그것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든가,
무엇이든간에 확실한 결단을 빨리 내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부정적인 것이
조만간에 나를 찍어누르든가
나를 박살내든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 능력에
확실한 자신감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관용(clementia)의 오만에 사로잡혀
자기 주변에 위험인자를 내버려두고 있으면,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처음에는 백인들을 보살펴주었다가
나중에는 그 백인들의 배신에 몰살된 것처럼,
처음에는 내가 얼마든지 관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화근덩어리가
언젠가는 힘을 키워 내 것을 빼앗고
나를 죽이고
나를 자기 노예로 만들게 돼있다.

敵(hostis=異)은 단지 敵(hostis)일 뿐,
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모두 가짜이며 허망하다는 것이다.
모든 이질적인 것은 본디
오래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은 어느 한쪽이 죽어 없어질 때까지
그들 간에는 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3.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
모든 이질적이고 부정적인 것들 간에
이렇듯 상호적대와 상호배제만이 계속되어왔다면,
이 세계에 새로운 문명이나 문화가
탄생될 수 있었을까?
Aege문명과 Orient문명을 통합한 Hellenism문명,
Greece, Orient, Hebrew, Africa, Galia문화를 모두 통합한 Roma문명,
그리고 오늘날의 cosmopolitan한 세계문명은
탄생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성생식(heterogamy)을 통한 인류의 진화는
과연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어찌하여 대중과의 번잡한 부대낌을 멀리하고 자기만의 순수성을 고수하고자
평안한 은둔의 삶을 선택했던 그 수많은 천재들은 다 고독 속에 퇴락하였고,
쇄국주의와 순혈주의를 강조하며 고립을 자초한
모든 민족, 국가는 쇠망의 길을 걸었는가?

그것은 지성의 위력이 배제된,
무기력한 아름다움(kraftlose Schönheit),
너무나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부정(negantia)을 배제(exclusio)의 동력으로만 활용하려 했을 뿐,
창조(creatio)의 동력으로 활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우리가 부정적인 것(Das Negative)을 외면하고 배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함께 머무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성숙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생각해볼 수가 있게 된다.

인간은 절대로
완전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 세상에는 나와 맞지 않고,
나를 완전히 부정하며 파괴하려 하는 것이
무수히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세상에서 친구를 선택하듯
세상사 모든 일을 자기 맘대로 선택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나를 부정하는 것들과 부대끼는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질 수도 있는 것이며,
어차피 우리 인간들이 태생적으로 다들 불완전한 이상
그러한 상호비판과 성숙의 과정들을
우리 모두는 일생토록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말이다.

더구나 모든 창조는 결국
이질적인 것들의 융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단성생식이 아닌 이성생식(heterogamy)을 만들어낸
대자연의 오랜 지혜이며,
수천년 인류역사 동안 인문, 사회, 자연과학 모든 분야에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 국제적으로 교류하며
인류의 삶을 지혜롭게, 그리고 풍요롭게 만들어왔던
우리 수많은 학자들의 전통적인 학문방식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만 옳다고 강변하며,
나를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배제해버려서야 되겠는가?
그것이 모름지기
학자(homo literatus)로서의 할 일이겠는가?






4. 요즘들어 나에 대한
비난과 부정의 강도가 여기저기서 부쩍 높아지고 있지만,
사실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도 나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무작정 그들을 무시하거나 추방하려 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고
오히려 나 자신과 그들 간에
상호성숙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음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들의 확신에 찬 비난이나 인신공격이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은 나라는 타자(Das Andere) 안에서
자기들을 동일화하려 하는, 미지의 위험한 성분을 발견했을 것이고,
거기에 흡수되려 하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성벽 가장자리에 구멍들을 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구멍의 자리를 계속 점유하고,
나를 그로써 완전히 파괴해버리겠다고 내게 계속 을러대는 것은
어쨌든 그들의 정당한 권리(생존권)이며,
나는 그것을 인용해야 한다.

다만 나는 그들의 비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
그것이 출발점에서부터 어떻게 추상화될 수 있는지를 사유하며,
그 다음에는 그들의 도전적 문제제기 그 자체를 근본화함으로써
그들을 극복함과 동시에
나 자신도 새롭게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성곽 안에서 극복되어야 할 방해물 내지는
내 성곽 바깥에서 일종의 공성부대(攻城部隊)로서 기능하려 하는 그들을
오히려 내 사유체계에 있어서 내재적 지속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활용하는
지성(Verstand)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5. 이번에 문제제기된
역사공부와 철학공부, 법제사와 비교법의
존재의의 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법률가는 단지 현시대에서만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는 왜 역사(법제사=Rechtsgeschichte)를 공부해야 하는가?
법률가는 단지 우리 국내의 현실문제에만 천착해야 하는 사람인데,
나는 왜 외국이론(비교법=Rechtsvergleichung)을 공부해야 하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나는 그저 한 사람의 학자로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Verweilen beim Negativen)"를 해야 할 사람이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동력을 얻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과거의 것은 항상 낯설기만 하다.
외국의 것도 항상 낯설기만 하다.
특히 그것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것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당장 손을 떼고,
그것을 외면해버리거나 무시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완전히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거부감과 충격과 슬픔과 혼돈을 다 무릅쓰고
그 부정적인 것 속으로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고 있던 과거의 기억에,
우리가 모르고 있던 저 머나먼 외부의 세상에,
우리가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해왔던 이 세상 수수께끼의 실마리와
우리의 왜곡되고 전복된 정체성의 본모습이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Memento'에서의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은 모든 기억과 역사를 일관된 Narrative로 조직화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또한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에서의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머나먼 미지의 세계로 나가보려 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가 그동안 영위해왔던 우물 안 개구리로서의 삶이 혹시 왜곡된 것은 아니었는지,
자기는 혹시 실체 없는 주체성(substanzlose Subjektivität)만을
갖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확인해보려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을 다 숨기고 막으려 하는 시도는
그 어떤 명분을 갖다붙이든지 결국 다 분쇄되고 말 뿐이다.
실천법학이든 민족법학이든 그 어떤 것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렇다.
인간의 정신은 그것이 부정적인 것일수록
그것과 융합되려 하는,
그로써 진리에 도달하려 하는 - Hegel식으로 말하자면 개념을 실현(Verwirklichung des Begriffs)하려 하는 -
성향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로 인해 제 아무리 죽음과 파멸의 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한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삶, 그러니까 이른바
精神의 生(Das Leben des Geistes)을
추구하며 나아가게 돼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길,
사랑의 길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 인간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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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