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10월 30일) 저녁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음악극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을 관람했다.
사실 공연장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공연 전에 어느 선배 교수님의 모친상을 조문하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들렀는데, 도중에 안경테가 분리되는 바람에 급히 안경점을 찾아다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하철까지 반대 방향으로 잘못 타는 소동을 겪었다. 결국 택시까지 동원해 겨우 공연 시작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동을 모두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 훌륭한 공연이었다.
젊은 시절 독일 함부르크에서 여러 차례 바그너의 음악극을 감상하면서 얻었던 예술적 감동은 지금까지도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함부르크 국립오페라의 압도적인 관현악과 화려하고 환상적인 무대미술은 내게 잊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이번에 서울에서도 그런 수준의 공연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번 서울 공연은 나의 그러한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무엇보다 성악가들의 가창력과 연기력이 놀라웠다. 보탄 역의 이상민, 로게 역의 김요한, 알베리히 역의 양준모 모두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상민의 보탄은 그야말로 보탄이었고, 김요한의 로게는 정말 로게 그 자체였다.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서 인물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이해가 느껴졌으며, 풍부한 성량과 안정적인 발성, 독일어의 표현력까지 모든 것이 매우 훌륭했다.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성악가들이 아니라, 각자가 맡은 인물의 성격과 내면을 완벽하게 체화한 음악극 배우들처럼 느껴졌다.
특히 양준모의 알베리히는 단순히 어둡고 육중한 신화적 악인이 아니었다. 보다 인간적이고 지적이며 기민하고 감정적으로도 복잡한 인물이었다. 날카로운 음색과 섬세한 연기가 인물의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첫날 공연의 사무엘 윤이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고 하지만, 양준모의 알베리히 역시 부족함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라인강의 세 처녀를 맡은 마리아나 홍, 김동연, 임은경의 아름답고 풍부한 가창도 빼놓을 수 없다. 공연의 첫 장면부터 성악의 완성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약 2시간 반 동안 가수들의 노래와 연기에 거의 전적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함부르크에서 관람했던 그 어느 바그너 공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고, 성악가들의 가창과 연기에서는 오히려 이번 공연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로타 쾨닉스가 지휘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바그너 특유의 장대하고 풍부한 관현악적 표현이 훌륭하게 살아 있었다. 독일의 유서 깊은 오페라극장이 지닌 오랜 연주 전통과 축적된 경험을 과연 우리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에게도 기대할 수 있을까 의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때로는 성악가의 노래보다도 오케스트라의 연주 자체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오려 할 정도였다.
로렌조 피오로니의 연출은 상당히 현대적이었다. 북유럽 신화의 환상적 세계를 전통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욕망을 무대 위에 옮겨놓았다. 황금은 현대의 화폐로 바뀌었고, 신들의 세계는 거대도시의 권력 공간처럼 표현되었다. 이동식 카메라와 스크린까지 활용하는 연출이라 처음에는 다소 걱정스러웠는데, 실제로는 대단히 풍부하고 역동적이며 재치 있는 무대였다. 시각적으로도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았고, 화려하고 다채로운 의상은 무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처럼 현대적인 무대에서도 바그너 음악극 특유의 고풍스럽고 장엄한 분위기가 그리 퇴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그너의 음악극이 주는 감동은 성악가의 아름다운 노래나 관현악의 웅장함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 특유의 화려하고도 철학적인 독일어 대사들이 음악과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만들어 내는 극적 긴장감 역시 대단한 매력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러한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즐거움도 컸다. 가수들이 워낙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노래하고 연기한 덕분인지, 때로는 과도하게 현대적이었던 무대장치들이 작품에 대한 몰입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았다. 신화적 세계의 외형은 현대적으로 바뀌었지만, 음악과 언어가 만들어 내는 바그너의 세계만큼은 굳건하게 살아 있었다.
특히 보탄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어떤 순간에는 뉴욕의 거대 마피아 조직 두목처럼, 또 어떤 순간에는 세계적인 거대 기업의 총수처럼, 또 어떤 때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의 유명한 정치 권력자처럼 보였다.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온갖 편법과 기만을 동원하는 모습이 오늘날의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바그너가 신화의 언어로 표현한 권력의 속성이 현대사회의 모습과 겹쳐 보이면서, 이 작품이 단순히 먼 옛날의 신들과 난쟁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베리히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신화적 악의 형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소외되었던 인물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엄청난 권력을 획득하고, 그 권력으로 자신을 억압했던 세계에 복수하려는 듯한 현대적 모습으로 보였다. 라인강의 처녀들에게 철저하게 조롱당하고 모욕당했던 그가 사랑을 저주하고 권력을 선택하는 모습에서는, 사회적 모멸감이 어떻게 복수심과 지배욕으로 변질되는가 하는 비극적 과정도 읽을 수 있었다.
니벨하임에 등장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집단적 움직임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정교하고 역동적인 군무는 무대에 생명력을 부여했고, 동시에 알베리히의 권력이 지닌 폭력성과 강제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존재와 움직임 덕분에 알베리히의 카리스마와 권력의 크기가 더욱 생생하게 드러났다.
물론 법학자인 내게는 보탄의 권력과 계약 간의 관계가 특별히 흥미로웠다.
보탄의 권력은 단순한 무력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의 창에는 신성한 계약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고, 그는 법과 계약을 통해 신들의 세계를 지배한다. 그런데 그는 정작 자신의 권력 기반인 계약에 대해 전혀 진지하거나 성실하지 않다.
거인들이 발할라를 건설한 대가로 프라이아를 요구하자, 보탄은 처음부터 계약을 지킬 의사가 없었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Wie schlau für Ernst du achtest, was wir zum Scherz nur beschlossen! (우리가 그저 농담 삼아 정한 것을 자네는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군!)"
이에 거인 파졸트는 보탄에게 이러한 말을 던진다: "Was du bist, bist du nur durch Verträge. (네가 지금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계약 덕분이다.)"
물론 보탄에게 전혀 항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프라이아는 인격적 존재이지 매각하거나 담보로 제공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보탄 자신도 "Freia ist mir nicht feil! (프라이아는 내게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이라며 그녀가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민법으로 생각해 본다면, 애초에 프라이아를 대가로 약속한 계약은 공서양속에 반하는 법률행위로서 무효라고 볼 여지가 크다.
하지만 보탄의 진정한 문제는 계약의 법적 유효성에 있지 않다. 그는 이미 거인들이 완성한 발할라를 차지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이 약속한 대가의 지급은 피하려 한다. 법과 계약이 지닌 규범적 권위는 단순히 그 형식적 구속력에만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정당한 신뢰에 대한 존중, 자신의 약속과 행위에 대한 책임, 그리고 사회적 협력에서 발생하는 이익과 부담의 공정한 조정이야말로 계약질서를 지탱하는 윤리적 토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유리할 때에는 계약의 신성함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불리한 계약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보탄의 태도는, 법을 규범으로 보지 않고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도구화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후 보탄이 아직 손에 넣지도 못한 알베리히의 황금을 거인들에게 대신 지급하기로 하는 장면에서도 민법학적 의문은 계속된다. 아직 자기 소유도 아닌 황금을 가지고 대체급부를 약속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물론 독일법과 한국법에서는 타인 소유의 물건이나 장래에 취득할 물건을 급부의 대상으로 약정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된다. 다만 도난당한 장물을 다시 빼앗고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은 또 다른 법률문제다.
어쩌면 바그너가 보여주려 한 것은 양지의 계약법질서와 음지의 폭력적 지배가 반드시 서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법과 계약의 이름으로 주류적 세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보탄과 야만적 폭력으로 비주류적 세계에서 니벨룽들을 지배하는 알베리히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권력을 향한 탐욕에서는 놀랄 만큼 닮아 있다. 보탄의 권력이 법과 계약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다면, 알베리히의 권력은 그러한 외피를 벗어던진 노골적 지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피오로니의 현대적 연출은 《라인의 황금》에 담긴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상당히 잘 드러낸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가장 문제적이었던 것은 에르다의 등장 장면이다. 대지의 여신 에르다를 한국의 전통 무속이나 단군신화의 웅녀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나름 신선했다. 거대한 머리 장식과 한국적 의상도 기발한 발상으로 느껴졌다. 보탄이 파졸트 형제에게 반지를 주지 않으려고 버틸 때 갑자기 나타난 에르다가 "Weiche, Wotan, weiche! (피하라, 보탄, 피하라!)"하고 외치는 장면은 이단비의 풍부한 성량 및 가창력과 어우러져 전율을 일으킬 만큼 잘 구성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촛불 시위대를 연상시키는 인물들과 유치한 곰 인형 탈까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연출가의 상상력이 다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절제했더라면 에르다 본연의 신비롭고 초월적인 존재감이 더 잘 살아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특히 무대 스크린에 표현된, 에르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시위 팻말 속의 '탐욕은 그만!'이라는 구호는 실소를 자아내게 했는데, 어쩌면 '탐욕은 그만!'이라는 구호는 연출가 자신의 상상력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지막 발할라 입성 장면도 흥미로웠다. 전통적인 궁전과 무지개다리를 직접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화려하고 장엄한 마무리를 보여주었다. 라인강 처녀들이 죽음을 맞은 듯한 장례식 장면과 로게가 무대에 홀로 남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신들의 찬란한 승리 뒤에 이미 몰락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연출로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로게가 마지막에 보여준 냉소적이고 고독한 모습은 상당히 두드러졌다. 신들은 발할라에 입성하면서 영원한 영광을 꿈꾸지만, 그들의 세계가 결국 파멸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찬란한 피날레의 음악은 단순한 승리의 찬가가 아니라 장차 다가올 비극의 서곡이기도 하다는 게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잘 표현되었다.
한편 라인강 처녀들이 죽음을 맞은 듯이 표현된 장면은 또 다른 궁금증을 남겼다. 원작에서는 그들이 마지막 《신들의 황혼》에 다시 등장하여 반지를 회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이번 장례식이 문자 그대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황금의 약탈로 훼손된 자연과 순수성의 상실을 상징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어질 작품들에서 피오로니가 이 장면과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어 낼지도 흥미로운 요소가 될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이번 공연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전통적인 북유럽 신화의 환상적 세계를 충실하게 표현한 무대라면 개인적으로 더 좋았겠지만, 피오로니의 과감한 연출도 상당한 예술적 상상력과 극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일부 장면에서는 다소 지나친 상징과 해석이 눈에 띄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바그너의 음악극이 지닌 본질적 갈등을 현대의 관객에게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성악가들의 놀라운 역량과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가 무대 전체를 굳건하게 지탱했다.
국립오페라단이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2029년까지 '니벨룽엔의 반지' 4부작을 완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이번 공연의 수준이라면 앞으로의 작품들도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함부르크에서 경험했던 바그너 음악극의 감동을 수십 년 뒤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쁘게 받아들여졌다. 그때는 주로 음악과 무대의 황홀하고도 장엄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면, 이제는 그 음악과 대사 속에 담긴 권력과 법, 계약과 배신, 욕망과 파멸의 문제까지 더욱 깊이 음미하게 되었다. 내년의 '발퀴레'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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