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에 대해서
김구에 관해서 며칠 전 벌어진 논란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답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내가 뭐 역사학 전공자도 아니면서
이 문제에 대해 장황히 말할만한 처지도 못되는 것 같으므로,
아래에서 항목별로 간단간단하게
그저 내 아는 요점만 밝히도록 하겠다.
1. 첫째는, 김구의 민족주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 김구는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주의자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나는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김구는 자유주의자이지만 동시에, 아니 그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다.
그런데 그 민족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김구가 택했던 것은 폭력투쟁론이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독립하지 않겠는가'라는,
위험한 사고를 김구는 그의 정치인생 전반에 걸쳐서 표출하고 있었다.
김구는 1920년대에 이미 '반민족칠가살(反民族七可殺)'을 선포하였다.
'그냥 죽여도 되는(可殺)' 대상에 수천만의 일본인, 친일부호, 그리고 일본의 관리가 된 자 등을 포함시킨 것인데,
실제로 김구는 1896년에 국모시해(國母弑害)의 원수를 갚는답시고
우연히 만난 일본인행상 쓰치다를
동행 3명과 함께 돌과 몽둥이, 칼로 죽여버린 바가 있었다.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 육군중위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김구의 주장일 뿐이다.)
이렇듯 처음부터 편협하고 막무가내적이며 폭력적인 면이 매우 강했던 김구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약간 완화가 되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김구는 세상만사의 기본이 '저들(彼)'과 '우리들(我)' 간의 끊임없는 싸움이며,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핏줄이 다른 자끼리는 서로 돕지 않는 법이니
저들을 믿지 말고 우리 핏줄끼리 뭉쳐서
저들과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김구의 머릿 속에는 혈통과 국경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굴레로서
뚜렷하게 남아 있었으며,
혈통과 국경을 넘어선 인간애라든가, 보편적 인간이성이라든가,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든가 그런 것은 김구에게 있어 그렇게 많이 고려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김구의 케케묵은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이
당시에도 그렇지만 특히 오늘날에 여전히 통할 수가 있겠는가?
최근 들어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숫자가 백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중국, 동남아, 인도 등에서 취업을 위해 입국한 이들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자민족우선주의와 외국인차별의식으로 인해
오만하고 거친 한국인들의 가차 없는 경멸과 폭력, 배제, 소외 앞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이제 저항적 민족주의 운운하며 우리의 민족주의를 계속 정당화하기에는
우리가 이미 쌓아올린 국력의 크기를 무시할 수 없고
우리의 민족주의로 인한 피해자들의 문제를
간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국내 체류 외국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고국은 과거 세계 전체에 제국주의적 패악질을 저질렀고,
특히 미국은 지금도 그런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들의 생활과 관습이 마치 세계적 표준인 것처럼 오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점도 있다.
하지만 그 선진국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알고 보면 나름대로 우리와 똑같은 문제들을 고민하고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인류사회 구성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앞에서 암암리에 잘난체를 하건 뭐를 하건
그들 역시 인간인 이상 우리보다 특별히 잘난 것은 없고
여성이라면 임신, 출산, 육아,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똑같이 허덕여야 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고용불안, 정규직과의 차별 등으로 고통받아야 하고
그 외에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비인간화, 자기착취, 긍정과잉, 관료제에의 종속 등등 많은 고통에 시달린다는 등의 사정은 우리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이라는 색안경으로 그들과 우리를 그저 다른 존재로만 바라볼 경우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들과 함께 공동의 해결책을 구할 수도 없게 된다.
더구나 민족주의는 이른바 '국익 이데올로기'에 개인의 양심과 사생활이 희생되도록 함으로써
인권의식의 함양에도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로운 의사의 표명이라든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등의 진보적 과제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도움이 되긴커녕
방해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민족은 허구에 불과하다.
이미 유전학적으로 볼 때
민족혈통의 순수성이 허구로 밝혀진지는 오래이다.
이 세상에 잡종 아닌 민족은 하나도 없다.
타 인종 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가장 순수하게 살아왔다는 우크라이나 사마리아인들의 경우,
그 숫자는 매년 급감해 현재는 701명만 남아 있고,
그 인원의 80%가 출생결함(birth defect)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우리 한민족도 북방계와 남방계, 백인종과 흑인종,
기타 수많은 핏줄들의 혼합으로써 구성된 민족이다.
그냥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들 생김새만 대충 훑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어떤 이는 혈통적 민족개념 대신에 언어적 민족개념이나 문화적 민족개념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지만,
혈통은 물론이고 언어나 문화의 고유성, 순수성 같은 것도
이제는 민족개념을 정당화할 수 없다.
순수한 한국어로 치부되고 있는 것의 상당수는
중국어(예를 들면 山行이라는 한자어에서 사냥, 衆生에서 짐승, 艱難에서 가난, 盜賊에서 도둑, 廉恥에서 얌체, 霹靂에서 벼락, 舌盒에서 서랍, 雪馬에서 썰매, 熟冷에서 숭늉이 나온 것 등)나 몽고어(예를 들면 장사치, 벼슬아치, 마마, 마누라, 무수리, 보라매, 송골매 등의 말이 몽골어의 영향을 받음)에서 온 것이며,
순수한 한국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것의 대부분 역시(예를 들면 김치, 태권도 등등)
일본문화를 비롯한 외국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것을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다.
원래 언어이든 문화이든 혈통이든
섞이고 스미고 다시 갈라지고 하나 되는 것은 진화와 발전의 피할 수 없는 요건이며,
타자의 것을 배척하고 순수한 자기 것만을 고집하다가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상실하여 정체, 퇴보를 면치 못하는 것이 당연함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민족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이거나
근대 이후에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사이비종교에 가깝고,
설령 현실 속에서 그것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능력이나 상상력에 오히려 굴레가 되거나 장애가 되는 수밖에 없음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의 고약한 점은
인간으로서의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보다
유전자나 환경에 의해 본질적, 결정적으로 더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고,
전체주의적이고, 안티휴머니즘적이고, 파시즘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를 유포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질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 사람들을 순수한 인간성으로, 열린 마음으로써 바라보지 않고
그 사람을 구성하는 유전적 요소나 문화적 요소 같은 것으로 재단(裁斷)하고, 한계를 짓고,
결국은 무슨 기계나 동물과 같이 판에 박힌 존재로 다루게끔 편견을 조장하면서,
급기야 자기 자신 역시 판에 박힌 존재로 경화(硬化)되게끔 만들어버리는 게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무슨 전체구조의 부속품처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니,
이러한 사고방식이 아무리 순화된 형태로 뇌리에 자리잡는다 하더라도 한 인간의 건전한 사고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칠 리는 만무하다.
이제는 민족주의가 사회구성원들을 통합하는 효과를 갖는다든가
세계문화 다양성에 기여하는 효과를 갖는다든가
미제국주의를 제어하는 정치적 효과를 갖는다든가 하는 여러가지 변명들이
더 이상 유효성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 초등학교 교실엔
동남아나 러시아에서 온 어머니를 둔 아이들이 득시글하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어느 면에 있어서든
민족의 틀을 넘어선 섞임과 스밈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고,
무엇보다 우리가 자율적이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각자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서로에게 완전한 인간성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민족'이라는 개념을 청산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반민족칠가살' '친일부역자처단' 등을 외치는 김구식의 민족주의가
아직도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설령 김구의 민족주의가 후기에는 평화적 민족주의, 문화적 민족주의로 많이 순화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타민족이나 타문화에 대한 집단적 우월감이나 정신승리를 위한 것이라면,
김구의 정치이념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민족주의는 결론적으로
우리 또는 세계의 정신문화발전에 오히려 아주 좋지 못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2. 둘째는 김구가 해방 이후 저지른 정치적 실책들이
정말로 거의 없는가, 하는 것이다.
김동렬은, 김구가 밑바닥 서민출신으로서
현실의 경험이 없이 책상머리에서 나온 지식만을 믿는 먹물들의 지적 편협에 빠지지 않아
정치적 실책을 줄이고 결단의 타이밍을 안 놓칠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 반대이다.
김구는 밑바닥에서부터 고생하며 올라왔다는 자부심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지식이나 정보보다 자기가 몸소 고생하며 겪은 현실에서의 경험이나
오랜 시간을 통해 다져온 인간관계 등에 너무 의존하였고
해외에서 전개되는 여러가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정황에는 어두웠거나
그러한 과학적 지식과 신선한 정보를 체계화해서 가공하고
그에 대해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데는 심히 무능하거나 소홀했다.
이는 당연히 여러가지 정치적 실책으로 이어졌으며,
그러한 실책들은 대부분의 경우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성질들의 것이 많았다.
김구는 일단 경제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해방후 물가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분석할 능력도 없었고,
여기저기서 물자난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나, 전력의 70% 가까이를 북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나,
각종 생활필수품을 일본에서 여전히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나,
심지어는 남북한 모두 식량조차 자급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 현상이나 이유를 전혀 꿰뚫어보지 못했다.
자유주의자라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주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였고
자유로운 거래를 어디까지나 국내시장에만 한정해서 적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결국 북한은 소련의 원조를,
남한은 미국의 원조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우리 한국인의 경제적, 기술적 능력과 우수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하여
그저 '민족자주'만을 공허하게 외치는 우매함과 편협함으로 일관했다.
당시의 한국에는 숙련된 고급노동력이 태부족한 상태였다.
관공서와 은행과 학교와 공장을 계속해서 돌리려면
그러한 근대적 관념을 갖춘 지식인과 기술자가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할 상황이었고,
그러한 노동력의 대부분은 결국 식민시대 동안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로 채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 기간 동안 해외에서 고생하며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투쟁하였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김구는
이러한 친일부역자들에 대해 단지 처단하고 징치할 것만을 일관되게 주장함으로써,
화해와 포용의 리더십을 구현하는 데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와 반대로, 악질만 아니면 이런저런 친일파들을 너그럽게 포용하여
북한의 초기 경제발전에 이들을 요긴하게 활용했다.)
물론 친일파와 완전히 절연한 대신에 온건좌파들과 연합했다면,
그런 부분에서라도 자기 운신의 폭을 넓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구에게는 1945년에 귀국한 이후에 여운형, 김규식과 합작할 기회가 있었고,
여운형과 김규식을 굉장히 좋게 보고 있던 미군정도 김구, 여운형, 김규식의 합작을 원했으나,
김구는 여운형, 김규식과의 합작을 짐짓 거부하여 미군정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해방공간 속에서 자기 정치력의 부재 및 편협성을 노출함으로써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이승만과 김성수,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완전히 넘겨줘버리고 말았다.
(물론 조정래의 '태백산맥' 제5권 209면에는
김구와 여운형이 뜻을 같이 하려 했으나 둘 다 암살당함으로써 뜻을 못 이뤘다고 씌어있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구는 자기를 애써 찾아온 여운형을 박대하였고 그냥 돌려보냈을 뿐이었다.)
그 대신 김구는
자기와 격이 그래도 맞는다고 생각한 (실제로는 가장 믿을 수 없는 라이벌인) 이승만과 손잡고
美蘇의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서면서 전국을 테러리즘의 광풍에 몰아넣었는데,
그 당시 찬탁에 동조했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안재홍, 김규식, 김원봉, 박헌영 등은
김구와 그 휘하의 대한애국청년들이 무서워 벌벌 떨면서 항상 피신하면서 다녀야 했고,
실제로 김구가 암살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미군정은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를 암살한 것이 김구 측 인사였을 것이라고 믿었을 정도였다.
(지금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278면에 보면, 김구가 송진우의 암살을 공작했다고 씌어있다.)
어쨌든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가 한현우에 의해 암살된 직후,
12월 31일 김구는 미군정을 임시정부가 접수하겠다며 사실상 미군정에 대해 쿠데타 선언을 하였는데,
이것이 얼마나 경솔하며 준비 없는 행동이었는지 밝혀지는 데는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김구는 다음날인 1946년 1월 1일 하지 장군이 자기를 소환하자 거기에 굴욕적으로 응했으며
그 자리에서 "만약 당신이 나를 다시 배반한다면 죽이겠소"라는 하지의 질책을 받고
자기 결백을 믿어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미군정 접수명령이 겨우 하루만에 흐지부지된 것에 대해
그 어떤 변명도 사과도 수습도 후속조치도 없이 그냥 '잠수'를 타버리고 말았는데,
이것으로 김구는 회복할 수 없는 이미지 타격을 입었으며,
실제로 이때 상당수의 김구 지지자들과 임정요인들이 김구 진영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그 후 김구는 자기가 아닌 이승만, 김일성, 박헌영에게로
점점 더 많은 인재들이 몰려드는 것을 바라보며 점점 위축되다가,
끝내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던 당시의 국제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며,
수많은 청년단체, 학생단체들이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이미 어마어마한 권력을 쌓아놓고 있던 김일성과 제휴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구가 왜 이럴 바에는
1945년에 귀국했을 때 여운형, 김규식 등과 진작 제휴하지 못했던가,
이런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게 된다. 만약 이념보다 민족을 우선했다면
1945년에 여운형, 김규식과 일찍 합작했어야 했고,
민족보다 이념을 우선했다면,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당연히 참여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해방 이후 김구의 처신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구는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서는 돌아와
남한만의 총선 및 단독정부 수립에 (마치 '삐진 늙은이'처럼) 불참하여
남한의 정부와 국회가 거의 이승만, 김성수 세력으로 다 채워지도록 방치하였고,
그 후 친일파들이 국가공권력을 거의 다 장악하고 있음을 뻔히 보면서도 반민족특위를 통해
친일파들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는 무모하고도 비현실적인 행보를 시작하려다
결국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물론 김구의 암살을 사주한 사람이 (이승만이었든 김창룡이었든)
얼마나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긴 하지만,
김구 역시도 당시의 살벌한 정치적 상황에서
조심성 없이 움직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김구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현실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정치적 이념이나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에 충실하지도 않은 채
장기표나 김지하처럼 외곬의 비주류로 겉돌고
돈키호테처럼 좌충우돌하다가 마침내는 삐져서 돌아앉아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 역사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도면 해방 이후 김구의 정치적 실책이
나름대로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3. 물론 김구에게 부정적인 말만 할 작정은 아니다.
셋째는, 김구의 자유주의에 관해서인데,
나는 김구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가졌을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김구가 일평생 테러리스트로 살았기 때문에
용감하기는 했어도 이념적인 것에는 무식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가 옥중에 Robert Mackenzie의 '태서신사(泰西新史)'란 책을 읽고,
서양의 자유주의 계몽사상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태서신사'에서 되풀이 강조되는 것은 시민의 자유확보와 교육제도 완비의 필요성임.)
"泰西新史라는 冊 한 권만 보아도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선 원숭이에서 멀지 않은 오랑캐들로 여겼던 西洋人들이 도리어 나라를 세우고 百姓을 다스리는 좋은 法規가 사람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에 높은 갓을 쓰고 넓은 허리띠를 두른 仙風道骨의 우리 貪官汚吏들은 오히려 그와 같은 오랑캐의 稱號조차 받을 수 없다는 事實을 깨닫게 되었다." (白凡逸志, 너머북스, 184면 참조)
이렇게 서양의 계몽사상에 지적으로 매료된 김구는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도 친미성향의 안창호 계열에 편입되고,
그 후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이동휘, 한형권, 김립 등의 쟁쟁한 공산주의자들을 만나 의견을 교류하게 되는데,
그 당시 이승만 같은 자유주의자들이나 이동휘, 여운형 같은 사회주의자들이나
파렴치하고 비도덕적인 행태를 저지르고 다닌 것은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자기와 성향이 비슷한 이승만에 대해서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으면서
이동휘,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 등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갖다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김구는 1921년 자유시참변 당시 소련과 그를 따르는 좌파 독립운동가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동지들을 배신하고 독립운동가 대부분을 학살해버린 것,
1930년대 중후반에 소련의 스탈린정권이 독재를 하면서 약 천육백만의 인민을 학살해버린 것과
소련의 집단농장제가 여러가지 관료제적 시행착오로 인해 수백만의 농민들을 굶겨 죽인 일 등을 전해 들으면서
점차 자신만의 자유주의, 반공주의 정치철학을 확립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김구는 공산주의자들이 경험적으로 겪어본 바
인간적으로 전혀 신의가 없고 믿을 수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으며,
모름지기 자유로운 인간들의 자발성을 기반으로 한 민주정치가 아니라
철학,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독재정치는 인민에게 생지옥만을 약속할 뿐이니,
'泰西新史'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상의 자유경쟁을 보장하고 경제 역시 자연스럽게 얽혀 돌아가게끔 맡겨두는 세상이
공산주의적 평등세상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며 인간적인 세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 실제로 '백범일지(白凡逸志)' 가운데 '나의 조국'이란 부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는 老子의 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거니와, 政治에 있어서 너무 人工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全知全能할 수가 없고 學說이란 完全無缺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學說의 原理로 國民을 統制하는 것은 一時 速한 進步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病痛이 생겨서 그야말로 辨證法的인 暴力의 革命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生物에는 다 環境에 順應하여 저를 保存하는 本能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利益보다도 害가 많다. 個人生活에 너무 잘게 干涉하는 것은 결코 좋은 政治가 아니다. 國民은 軍隊의 兵丁도 아니요, 監獄의 罪囚도 아니다."
물론 김구는 1939년경에 공산주의자 김원봉과 회담하고 좌우합작을 시도한 바도 있었다.
하지만 원칙론자였던 김구는 김원봉에게 토지국유제까지는 양보했어도
기업국유화까지는 끝내 양보하지 않아, 결국 좌우합작을 결렬시키고 말았으며,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 김규식과 좌우합작을 할만한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반공의 신념 등에 의해서 그들과의 합작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설령 김구의 자유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에 기반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만하면 김구의 자유주의적 신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며,
김구를 사실상 자유주의자라 부르지 못할 바도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4. 그리고 나는 김구가 어쨌거나
역사적으로 존경 받을만한 인물인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김구는 개인적으로 숱한 고초와 희생을 무릅쓰고
임정 창립멤버 중 명망가들은 이미 다 도망가버린,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겐 사지(死地)나 다름 없었던 중국땅에서 끝까지 버티면서
(이승만이 위험의 무풍지대인 미국에서 노닥거렸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묵묵히 계속 이어갔는데,
이 세상에 끈기를 요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이게 말이 쉽지,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며,
어떤 신념이든 간에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는 김구의 이런 점을 본받아야 한다고 본다.
모두가 기회주의적으로 약삭빠르게 눈치만 보며
자기의 이익과 편안만을 추구하고
오랜 원칙과 신념을 버리는 데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요즘 시대에
김구 같이 - 비록 약간 어설프긴 하지만 - 강직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의 존재는 분명히 소중하고
의미가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 건국 당시의 아비규환 같은 혼란상황에서
이렇게 강직하게 살아온, 큰 지도자가 그래도 한 사람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고,
그런 점에서 김구만큼 존경받을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5. 하지만 이렇게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실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도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구는 어쨌든 일제시대에 그 누구보다도 더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합당한 보상 없이 비극적으로 죽었으며
반골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해방이후 민족주의에 심히 경도된 우리 진보진영에서
거의 초월적인 존재,
'민족의 성자(聖者)'로까지 추앙될만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명백한 정치적 실책도 간과되거나
자유주의적 성향 같은 것도 은폐되는 일이 간혹 있었지만,
실제로는 지적으로 그렇게 완전하지는 않았으며
실수도 은근히 많았고, 자유주의적 정치이념에 있어서
이승만과 별 차이도 없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반미 민중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한 사람의 자연인에 불과하고 자유주의적 성향도 매우 강했던 김구를
지나치게 눈부시게 조명하고 거기에 비친 큰 그림자를
우리가 멋대로 상정한, 반미 민중 민족주의라는 하나의 통일성으로서
매끄럽게 다듬고 미화하려 노력해왔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더 큰 오류를 만들어낸 측면이 있다.
우리가 그림자로서 투사하고 싶은,
반미 민중 민족주의라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초월적이고 완전무결한 대상으로서의 김구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유한성을 가진,
그리고 의외로 자유주의적 성향도 매우 강한 인물로서의 김구를 다시 새롭게 조명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며,
그런 관점에서 김구에 대한 비판 역시 어느 정도는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이 자리에서 김구에 대한 몇 가지 얘기를 조금 더 해보게 되었다.
내 전공분야도 아닌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아는 척한 것 같아
지금은 그저 부끄러운 마음이 들 뿐이다.
[윗글에 대한 답글들]
Re: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죠. by eccentricer
Re: 김구의 족보, 잡종국가의 미래 by 松下道人
Re: 가진 것 없는 자의 한계 by Gar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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