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렌프라이하이트(Narrenfreiheit), 광대의 자유
2026-07-19 09:56:50

독일어에는 나렌프라이하이트(Narrenfreiheit)라는 흥미로운 말이 있다. 직역하면 '광대의 자유' 정도가 된다. 중세 독일의 궁정에서 일했던 궁정 광대(Hofnarr)는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농담과 풍자의 형식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그의 자유는 오늘날의 성문법처럼 명문화된 권리는 아니었지만, 오랜 관습 속에서 형성된 일종의 면책특권이었다. 권력자는 광대의 입을 통해 자신을 향한 비판을 들을 수 있었고, 신하들은 광대가 만들어낸 웃음 속에서 잠시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유럽의 궁정광대는 단순히 농담 몇 마디를 하는 연예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야기, 노래, 흉내, 곡예, 재담, 말장난을 결합해 군주와 궁정사회를 즐겁게 하는 직업인이었다. 특유의 알록달록한 옷, 방울 달린 모자, 작은 홀(笏)과 같은 소품도 그가 일상의 질서와는 다른 규칙에 속한 존재임을 알렸다. 궁정광대는 낮은 신분의 오락 제공자이면서도 왕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있는 기묘한 위치에 있었다.

그의 힘은 역설(paradox)에서 나왔다. 광대는 권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권력자를 흉내 낼 수 있었고, 존엄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존엄한 것들을 희화화할 수 있었다. 그는 진지한 조언자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조언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광대의 모습은 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국의 우인(愚人)과 재담꾼, 한국의 광대와 탈춤꾼, 일본의 교겐(狂言) 배우, 이슬람권과 페르시아 궁정의 익살꾼(Dalqak)도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서로 다른 문명에서 반복되는 광대의 존재는 그가 특정 지역의 기이한 직업인이 아니라, 권력과 규범을 가진 거의 모든 사회가 필요로 했던 하나의 문화적 장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광대가 안전하고 무난한 말만 한다면 굳이 광대일 필요가 없다. 웃음은 흔히 익숙한 질서가 잠시 어긋날 때 발생한다. 높은 사람이 낮아지고, 현명한 사람이 실수하며, 엄숙한 의식이 하찮은 몸짓으로 바뀌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뜻밖의 방식으로 말해질 때 사람들은 웃는다. 희극은 규칙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규칙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그것을 살짝 어기는 데 희극의 묘미가 있다.

그래서 광대는 금기를 파괴하는 사람이기보다 금기의 탄력성을 시험하는 사람이다. 본디 웃음이 늘 금기의 가장자리로 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웃음의 힘은 이미 허용된 말을 반복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희극은 사람들이 진지한 얼굴로 숨기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높다고 여기는 것을 낮추며, 자연스럽다고 믿는 질서가 실은 인간이 만든 약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 점에서 웃음은 본디 정치적이다. 정치란 결국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구의 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가, 무엇이 존엄하고 무엇이 하찮은 것으로 분류되는가를 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웃음은 이 분류를 흔든다. 장엄한 연설을 말실수 하나로 무너뜨리고, 위엄 있는 사람을 우스운 몸짓 하나로 평범하게 만들어 버린다. 폭압적인 독재 권력이 웃음을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웃음과 익살 앞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안다는 데 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을 보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책,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과 웃음을 다루었다고 가정된 『시학(Περὶ ποιητικῆς)』 제2권이 등장한다. 수도원의 눈먼 노수도사 호르헤(Jorge)는 이 책을 감춘다. 책장을 넘긴 사람들이 죽도록 책에 독을 바르고, 책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감행한다. 물론 호르헤는 민중의 축제와 광대의 익살, 어리석은 사람들의 웃음이 이미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연쇄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며 치열하게 막으려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의 권위가 웃음을 인식의 방법으로 승인하는 일이었다.

호르헤가 막으려 한 것은 특히 웃음을 통한 두려움의 소멸이었다. 권위는 법률, 제도, 교리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 위반하면 큰일이 난다는 공포, 권위 앞에서 웃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함께 작동해야 권위가 유지된다. 특히 모든 진리를 하나의 체계 속에 가두려는 사람에게 웃음은 치명적이다. 웃음은 “혹시 우리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논증보다 먼저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은 웃음이 닫힌 지식체계에 균열을 내고, 유일한 해석을 주장하는 권위에 맞선다는 사실, 웃음이 허용되는 한 진리가 특정 기관이나 해석자에게 독점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웃음은 광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렌프라이하이트(Narrenfreiheit)를 궁정광대의 직업적 특권으로만 이해하면 이 말의 현대적 의미는 좁아진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때로 광대의 역할을 맡는다. 가족이 지나치게 심각해졌을 때 엉뚱한 말을 던져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 회의에서 모두가 알고도 말하지 않는 모순을 농담으로 지적하는 사람, 친구의 근엄한 자랑을 과장된 흉내로 누그러뜨리는 사람은 잠시 광대가 된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이렇게 어릿광대가 되어보는 시간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유아기와 청소년기는 규칙을 배우는 동시에 그 규칙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말장난, 과장, 패러디, 유행어, 밈, 선생이나 부모의 흉내는 단순한 경박함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와 거리를 조절하고, 또래집단의 언어를 만들며, 자기 정체성을 시험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웃음에는 유치함과 잔인함만 있는 게 아니라, 창의성과 반항이 함께 섞여 있다.

교육이 지나치게 목표와 평가, 그리고 규율로만 구성되면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렇게 ‘쓸데없이 웃는 시간’을 잃게 되고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쓸데없는 그 시간에 아이들은 역할을 바꾸고, 말의 이중적 의미를 발견한다. 광대놀이는 규칙이 없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규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고도의 놀이이다.

법학자는 웃음을 다루기 어려워한다. 법은 경계를 분명히 그으려 하지만, 웃음은 경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법이 웃음을 포기할 수는 없다. 풍자와 패러디를 보호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권력과 다수의 감정이 지나치게 쉽게 신성화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를 웃길 수만 있다면 다소 불쾌한 농담도 비교적 쉽게 용서하는 편이다. 상대방의 말이 기발하고, 나도 그 웃음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 말 뒤에 적의보다 놀이의 의도가 느껴진다면 나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내가 선택한 개인적 관용일 뿐,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가 오로지 불쾌함이나 불편함을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우리는 웃음과 함께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 웃음은 늘 조금 무례하고, 희극은 늘 약간 불온하다. 모든 금기를 존중하는 광대는 더 이상 광대가 아니다. 광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자신의 존엄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도 틀릴 수 있고 자신도 우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딘다는 뜻이 된다.

나렌프라이하이트는 과거 궁정광대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권을 가리키지만,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작은 자유로 읽을 수 있다. 타인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규칙을 비틀 자유, 권위를 웃음에 부칠 자유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광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독점하려는 사람 앞에서 웃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법이 그 웃음을 모두 보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진 사회의 법은 쉽게 엄숙해지고, 엄숙함만 남은 법은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폭력에 둔감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Narrenfreiheit는 광대만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법과 권력 그리고 우리 자신이 가끔은 웃음의 대상이 되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청계천8가
지난번에 느닷없이 브랜든버그 판례를 소개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이번에 나렌프라이하이트를 소개하신 글 역시 지난 6월말 배재고 야구부원의 5·18 조롱 및 혐오표현에 대한 옹호의 의도로 쓰신 것이라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 유럽 궁정광대와 에코의 『장미의 이름』까지 끌어들여 배재고 애들의 5·18 조롱을 “그냥 어릿광대짓 한 거로 볼 수 있지 않느냐” “웃자고 한 짓에 죽자고 달려드느냐” 식으로 정당화하셨는데, 교수님의 일관된 극우 논리는 참으로 역겹기 이를 데 없습니다.

웃음의 필요성과 농담에 대한 관용은 물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역사적 피해자에 대한 조롱이나 희화화, 혐오표현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인데, 극우 일베 성향 고교생들의 혐오 발언에 대한 최소한의 징계조치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면서 그 극우적 조롱을 “광대의 자유”로 미화하는 논리는 전형적인 극우 지식인의 궤변적 혐오 재생산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26-07-19
18:07:28




청계천8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신 한강 작가님께서도 아비뇽에서의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듯이, 배재고 사태는 명백한 “혐오의 문제”이며,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문제적인 것”입니다. 교수님은 배재고 사태를 “광대의 자유”라는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개념으로 정당화하시며, “타인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규칙을 비튼 것이라 옹호하시는데, 배재고 애들의 “스타벅스 가야지”와 “탱크데이” 발언은 5·18 희생자와 유가족의 고통을 단순히 조롱한 게 아니라 그분들의 정신을 파괴한 수준이며, 이는 결코 “웃음의 정치성” 따위로 희석될 수 없을 만큼 그 폭력성과 반사회성이 심각했던 것입니다.

한강 작가님의 말씀처럼, 혐오가 “충격이 또 다른 충격을 덮고 쓸려가 버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우리가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려 다 같이 머리를 모아야” 할 때, 교수님 같은 여대 법학부 교수가 그러한 극우 일베 고교생들의 파괴적 혐오표현을 창의성과 반항으로 미화하는 것은 한강 작가님의 말씀대로 기성세대의 실패를 더욱 심화시키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교수님께서는 에코를 인용하시며 웃음이 권위에 균열을 낸다고 하셨는데, 5·18 민주화운동의 숭고한 희생을 “탱크데이”로 희화화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권위의 타파이고 무슨 기성질서에 대한 반항이란 말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권위를 갖고 민중을 압살하는 세력은 자본가 재벌과 국힘당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보수세력 아닙니까? 우리 젠더구조의 지배적 위치에 서서 여성을 차별하는 세력은 남성과 가부장제 세력 아닙니까? 인서울 부자동네 강동구에 소재한 배재고에 다니는 고등학생들, 그것도 남자 고등학생들인 배재고 아이들이 어떻게 사회적 약자나 피해자, 천대받는 소수자일 수 있습니까? 걔들의 “스타벅스 가야지”와 “탱크데이”는 일단 웃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웃기려고 한 말들도 아니었고, 기득권의 권위에 균열을 일으키긴 커녕 기득권의 권위에 편승한 행위였으며, 역사 부정과 극우 세력의 진부한 지역혐오를 폭력적으로 재생산한 행위였을 뿐입니다.
2026-07-19
18:16:48




청계천8가
중세 유럽의 광대가 금기를 깨고 웃기는 소리를 해도 면책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자체가 천대받는 약자이자 소수자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조롱했던 대상이 권력을 가진 기득권 강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배재고 야구부원들이 깼던 금기가 무엇이었습니까? 5.18. 희생자에 대한 존중이 기득권질서를 위한 보수적 금기였습니까?

숙명여대라는 여성 중심 대학의 교수로서, 5.18. 희생자와 호남 주민 같은 소수자를 조롱하는 혐오표현을 “광대의 자유”로 포장하신다는 것은 정말로 개탄스럽습니다. 한강 작가님처럼 “인간의 심연”을 섬세하게 다루는 문학적 시선에서 좀 배우시고 공부를 하십시오. 교수님의 글은 철저히 남성과 자본과 기득권 중심의 유치한 자유주의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글은 오늘날 강남 권역 남고생들 사이에 팽배한 약자 혐오, 진보 혐오 문화의 학술적 방패가 된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기성세대가 최근의 몰지각한 2030 극우청년세대의 실패를 방치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돌아봐야 한다는 한강 작가님의 지적에서 좀 배우시고 깊이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숙명여대 당국은 더 이상 백교수님의 이런 물의를 방치하지 말고, 백교수님의 계속되는 문제 발언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조치를 취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대 교수가 극우 혐오를 “광대의 자유”로 미화하는 이런 태도를 지속한다면, 우리 사회의 혐오 극복 노력은 영원히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2026-07-19
19:40:17




타샤
교수님께서 페미니즘에 대해 줄곧 비우호적이고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여온 점을 고려할 때, 이 글은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혐오적 조롱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첫째, 교수님은 "웃음은 정치적"이며 "광대는 권력자에게 비판을 전달하는 존재"라고 서술하셨지만, 이는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중세 궁정광대는 분명 권력자에게 농담으로 비판을 전달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광대가 철저히 권력자의 보호 아래 있었고, 그의 발언이 궁극적으로 권력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였습니다. 광대는 권력자의 애완견 같은 존재로서 본질상 기득권 체제에 기생하는 앞잡이에 불과했으며 광대의 농담은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 오히려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지점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다는 부분에서 학문적으로 매우 비열할 뿐 아니라 지극히 부정직하고 불성실하다 할 수 있습니다.
2026-07-20
14:50:46




타샤
둘째, 교수님은 "모든 금기를 존중하는 광대는 더 이상 광대가 아니다"라고 하시며, 금기에 대한 조롱과 도전을 마치 진보적 저항처럼 미화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무엇을, 어떤 맥락에서 조롱하느냐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향하는 조롱은 해방적일 수 있지만, 강자가 약자를 향하는 조롱은 철저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방향성과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 순수하게 "웃음 그 자체"의 가치만을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이 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칼을 휘두르는 자의 의도"를 문제 삼지 말라는 궤변에 다름 아닙니다.
2026-07-20
14:53:57




타샤
셋째, 교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불쾌한 농담도 용서하는 편"이라고 하셨지만, 이는 개인적 관용을 사회 일반에 강제하려는 매우 싸가지 없는 발상입니다. 교수님의 개인적 감수성이 얼마나 유치한가와 상관없이, 사회적 약자를 향한 불쾌한 농담은 모욕 이상의 심리적 폭력입니다. 특히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진 집단에 대한 혐오적 조롱은 일상적 공격일 뿐 아니라 보수 기득권을 위한 앞잡이적 부역으로 작용합니다. 용서도 용서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수님처럼 사회적·경제적 특권을 가진 중년 남성 교수가 "나는 용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과연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발언이 타인에게 어떤 폭력적 영향을 미칠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젠더적 무지에 불과합니다.
2026-07-20
14:56:36




타샤
넷째,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유머"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혐오표현은 무수히 많습니다. "여자(김여사)는 운전을 못 하게 해야 한다", "페미니즘 탈출은 지능순", "페미에게 4b운동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냥 운동" 같은 발언이 농담으로 포장되어 퍼지고, 이는 결국 성별 고정관념과 혐오를 강화합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렌프라이하이트"는 이러한 발언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도구로 악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머가 해방적이기 위해서는 조롱받는 대상이 반드시 기득권 남성과 같은 다수자, 사회적 강자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유머는 기득권 세력의 폭력적 무기가 될 뿐입니다.
2026-07-20
15:00:41




타샤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는 법과 웃음의 관계를 말씀하셨지만, 법이 모든 웃음을 보호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웃음이 피해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하다"는 감정이 단순한 감정 이상의 법적 의미를 갖는 것은, 그 감정의 주체가 상대의 발화에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느끼는 징표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글은 이 점을 의도적으로 조롱하며, "웃음은 좋은 것"이라는 단순화된 프레임으로 "불편하다"는 여성의 감정이 마치 잘못된 감정인 양 대단히 악의적 오도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수님의 글은 남성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농담과 조롱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변명에 가깝습니다. 광대의 자유는 약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수님께서 그간 페미니즘에 대한 비아냥과 여성혐오적 표현을 일삼아온 전력에 비추어 볼 때, 이 글은 "농담으로 한 말은 다 괜찮다"는 변명으로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말이 칼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칼이 누구를 향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교수님의 감수성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제는 적절한 규제와 처벌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2026-07-20
15:05:53




Elara
교수님의 이번 글은 법학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도 권력의 물질적 토대를 한 번도 진지하게 응시해 본 적 없는 빈 깡통 지식인의 전형적인 헛소리에요.

중세 광대의 ‘나렌프라이하이트’를 오늘날에 끌어올 때, 교수님은 그 광대가 누구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누구에게서 옷과 방울을 지급받았는지 철저히 침묵해요. 궁정광대가 군주를 조롱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군주의 재정을 조금도 위협하지 않는 오락용 소품이었기 때문이에요. 교수님은 이 물질적 종속 관계와 권력관계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광대를 마치 자율적 비판 주체인 양 교묘히 포장해요. 이는 자본주의 계급 사회에서 농담과 풍자가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은폐하는 아주 비열하고 기만적인 왜곡이에요.
2026-07-22
19:39:49




Elara
오늘날 진짜로 ‘웃음의 자유’를 향유하는 계층은 누구인가요? 부동산 투기로 수십억을 불린 사람들이 약자들의 고통을 소재로 삼아 농담을 던질 때, 혹은 금융자본이 노동자를 계약직으로 내몰면서 “효율의 미학”이라고 포장할 때, 혹은 남성 직장 간부가 유리천장과 성희롱으로 여성 노동자를 찍어 누르면서 “성별의 특성에 따른 공정한 차별”이라고 웃으며 조롱할 때, 그 웃음은 기득권의 면죄부가 되지, 결코 기득권을 흔드는 힘이 되지 않아요.

교수님은 웃음이 권위를 균열낸다고 강변하지만, 자본의 권위와 재산권의 신성함과 젠더 권력의 무자비함 앞에서는 그 어떤 ‘광대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겁하게 외면해요. 저당권자와 금융기관의 ‘사전 계산 가능성’은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5.18. 유족과 같은 역사적 피해자와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존엄에 관한 최소한의 금기만은 ‘탄력적으로 시험’해도 된다고 우겨대요.
2026-07-22
19:42:51




Elara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수님의 글이 ‘누가 농담을 할 수 있는 몸인가’를 철저히 비가시화한다는 점이에요. 각종 성폭력과 성희롱으로 위협받고 돌봄노동과 재생산노동에 묶여 있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교수님이 예찬하는 그 ‘쓸데없이 웃는 시간’을 가질 여유조차 없어요. 그들의 하루는 생존을 위한 진지한 계산으로 채워져 있고, 그 계산이 조금만 어긋나도 바로 생계가 무너져요. 그런 사람들에게 “규칙을 비틀어 보라”, “권위를 웃음에 부쳐 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규칙 바깥에서 안전하게 놀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상류계급 남성 기득권이 자신의 특권을 보편적 미덕인 양 포장하는 오만일 뿐이에요.

교수님은 법학자로서 경계와 질서를 다루는 사람이면서, 정작 자본이 설정한 경계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요. 부동산 투기꾼과 거대 금융기관의 권리 질서는 ‘법적 안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성시하고, 약자들의 존엄을 지키는 금기만은 ‘광대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상대화해요. 이런 선택적 전복 찬양은 결국 기존 착취 구조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작업일 뿐이에요.

여대 법학부 교수가 이런 수준 낮고 정신 나간 글을 올린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학문이, 그것도 여자대학교라는 틀 안에서조차 학문이 얼마나 쉽게 기득권의 자기위안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줘요. 광대의 자유를 말할 자격은, 적어도 자신이 서 있는 계급적·젠더적 위치를 정직하게 응시할 수 있는 주체에게만 주어져야 해요.
2026-07-22
19:45:57




레몬로즈
ㅂㄱㅇ 아직 덜 쳐맞았구나... ㅋㅋㅋ
2026-07-23
10:26:52




minji_kim
이보세요. 광대가 조롱하고 장난 칠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광대여서 그런 겁니다.

배재고 야구부원들은 광대가 아니라 도련님이에요 도련님. 그것도 서울 부잣집 도련님.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이런 무식한 글을 쓰면 안 되지. (서러우면 교수질 때려치고 코미디언으로 직업을 바꾸시든가...)
2026-07-24
12: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