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은 남고 인간은 사라졌다 - 나홍진 감독의 《호프》 개봉일 감상 -
2026-07-15 14:11:39

※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늘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를 개봉일 첫 회차로 보았다. 《곡성》 이후 무려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영화이고, 한국영화 사상 손꼽히는 제작비가 들어간 대작이며,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작품이니 기대가 작을 수 없었다. 실제로 영화의 첫 한 시간은 그 기대에 상당 부분 부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시골 마을을 초토화하는 동안, 카메라는 괴물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고 파괴된 건물과 찢긴 시체, 총성과 비명, 사람들이 달아나는 모습만을 집요하게 쫓았다. 무엇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안과 엄청난 속도감이 결합되어, 적어도 전반부만큼은 나홍진 감독의 연출력이 여전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카메라가 총격과 자동차 추격, 골목길의 혼란을 놀라울 만큼 부드럽게 연결한다는 점도 인상깊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상의 뭔가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범석과 성기는 시종일관 달리고, 총을 쏘고, 외계인에게 얻어맞으며 사투를 벌이지만, 그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간절히 바라게 만드는 어떤 이유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 《황해》에서 주인공 구남은 빚에 몰려 살인을 청부받은 인물이지만, 아내에게 버림받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조선족 노동자라는 점에서 나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추격자》에서 주인공 엄중호는 인신매매를 알선하는 포주이고 결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억울하게 경찰직을 떠난 과거가 있었고, 실종된 여성과 그 어린 딸에 대한 책임감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의 여지가 있었다. 《곡성》에서 주인공 종구는 무능하고 무식한 경찰이지만, 딸 효진을 구하려는 그의 절박한 사랑만큼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간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모든 주인공은 언제나 결함투성이의 인간이었지만, 관객은 그들에게서 상처와 욕망, 감성, 그리고 지켜야 할 무엇인가, 사랑받을 만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반면 《호프》에서 주인공 범석과 성기에게는 가족도, 과거의 상처도, 특별한 신념도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친척 관계도 몇 마디 대사로만 제시될 뿐 감정적 실체를 갖지 못한다. 성애와 성기의 갑작스러운 감정은 충분한 축적 없이 액션의 틈에 삽입된다. 인물들은 행동하지만 변화하지 않고,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이 내면의 드라마로 이어지지 않는다.

E. M. 포스터의 구분을 빌리자면 이들은 전형적인 ‘평면적 인물’이다. 그러나 문제는 평면적인 인물 자체가 아니다. 장르영화에는 단순하고 유형적인 인물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서사 속에서 어떤 욕망을 지니며, 관객이 무엇 때문에 그의 행동을 따라가게 되는가이다. 머리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면 관객은 범석과 성기를 계속 ‘보고’ 그들의 위치에 ‘정렬’되지만, 그들에게 도덕적·감정적으로 동조할 만한 근거는 얻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인물의 빈약함을 결함이 아니라 의도적인 장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홍진 감독이 처음에는 범석을 선글라스를 쓴 서부극 영웅처럼 보여준 뒤, 후반부에는 겁 많고 편협하며 폭력적인 인간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액션 영웅상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영웅을 해체하려면 그 자리에 다른 윤리적 시선이 들어와야 한다. 인간의 폭력성과 편견을 비판하려면, 적어도 외계 생명체의 고통이나 처지를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접근시켜야 한다. 그러나 영화 《호프》는 인간 주인공에게서 감정을 빼앗는 동시에 외계인에게도 충분한 사연을 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인간에게서 멀어지지만 외계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 결과 이 영화에서는 인간 중심적 영웅주의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쪽에도 감정을 이입하기 어려운 정서적 진공 상태가 발생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게 되는 윤리적 요구를 얻는다고 한다. 《호프》에도 분명 그런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과 외계인의 관점을 뒤집는 영화도 아니고, 관객 앞에 하나의 ‘얼굴’을 가진 타자로서 외계인을 형상화하는 영화도 아니다. 외계인들은 영화 대부분에서 찢고, 던지고, 물어뜯는 괴물로 소비된다. 마지막 몇 분 동안 이들에게 가족과 언어와 고도의 지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서, 앞선 두 시간 동안 형성된 이미지가 곧바로 뒤집히지는 않는다.

영화는 목수로 나오는 청년이 외계의 어린 존재를 납치하거나 죽였고, 그것이 모든 참사의 발단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나홍진 감독도 인터뷰에서 한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얼마나 거대한 비극으로 확대될 수 있는지를 그린 영화이며, 작품의 의미는 엔딩에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감독의 설명과 영화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외계의 아이가 인간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외계인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왜 마을 전체 주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이어지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나타난 외계인들은 언어와 기술, 가족적 애정과 생명 복구 능력까지 갖춘 고등 생명체처럼 묘사된다. 그런 존재들이 가해자를 찾거나 사태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아무 관련도 없는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한다는 설정은 매우 기이하기 짝이 없다.

SF 이론가 다르코 수빈은 과학소설의 핵심을 ‘인지적 낯설게 하기’에서 찾았다. 낯선 존재와 세계는 현실과 달라야 하지만, 그 낯섦을 이해할 수 있는 내부적 논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호프》에서 외계인은 낯설지만 인지 가능하지 않다. 그들의 행동원리와 목적이 거의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은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다르다. 미스터리는 단서가 존재하지만 아직 해답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고, 공백은 애초에 추론할 자료가 부족한 상태다. 《호프》는 후자로 기울어져 있다.

영화의 구성도 갈수록 느슨해진다. 물론 전반부의 추격과 총격은 괴물의 정체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반부에 괴물의 모습이 공개된 뒤에도 유사한 추격과 난투가 장시간 반복되니 긴장감은 풀리고 영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액션은 계속되지만 새로운 정보도, 인물의 변화도, 윤리적 선택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호프》에는 엄청난 운동이 있지만 충분한 전개가 없다. 자동차는 달리고 인간과 외계인은 끊임없이 충돌하지만, 이야기는 그만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주인공 보정도 몰입을 크게 방해한다. 이름 없는 주민들과 조연들은 외계인의 공격을 한 번만 받아도 몸이 찢기거나 목이 날아가며 간단히 죽는다. 반면 범석과 성기는 자동차가 뒤집히고 외계인에게 내던져지며 엄청난 충격을 받아도 곧 다시 일어나 총을 쏘고 추격을 계속한다.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현실의 인간보다 강한 것은 흔한 일이지만, 똑같은 공격이 조연에게는 즉사이고 주연에게는 가벼운 타박상에 불과하다면, 관객은 인물의 생명보다 배우의 출연료와 서열을 의식하게 된다.

종반부 자동차 추격 역시 비슷하다. 외계인은 땅을 박차고 거의 폭발하듯 질주하며 자동차보다 더 빠른 속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는 좀처럼 자동차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개별 숏에서 표현되는 속도와 전체 공간에서 유지되는 거리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카메라는 엄청난 속도를 강조하지만, 서사는 주인공이 계속 도망칠 수 있도록 외계인의 실제 속도를 자의적으로 조정한다. 이처럼 시각적 에너지와 공간적 논리가 충돌하면, 추격 장면이 길어질수록 긴장감보다는 조작된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결말은 명백히 속편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나홍진 감독은 이미 속편의 이야기를 써두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열린 결말과 미완성된 결말은 다르다. 좋은 열린 결말은 앞에서 충분히 형성된 질문을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한다. 반면 《호프》는 중요한 정보를 유보한 채 우주적 배경을 갑자기 펼쳐 보이고 끝난다. 외계인들의 사연을 더 알고 싶게 만드는 구체적인 단서도 충분히 남기지 않는다.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궁금증에는 먼저 관심이 필요하다.

《호프》는 결코 무능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첫 한 시간의 공간 설계, 카메라의 움직임, 음향, 자동차 액션과 군중의 동선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다. 어떤 순간에는 나홍진 감독이 현재 한국에서 가장 힘 있고 집요하게 액션을 연출하는 감독이 역시 맞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이 강렬했던 것은 단순히 사람이 잔혹하게 죽고 미친 듯이 달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추격자》에는 늦게 도착한 죄책감이 있었고, 《황해》에는 버림받은 사람의 절망이 있었으며, 《곡성》에는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이 있었다. 그 감정들이 폭력과 추격을 인간의 비극으로 바꾸어놓았다.

《호프》에서는 스펙터클이 인물을 압도하고, 인물이 사라진 자리에서 액션만이 계속된다. 영화의 제목은 ‘희망’이지만, 누가 무엇을 희망하는지조차 선명하지 않다.🐳





















청계천8가
교수님께서 《호프》의 전반부 액션과 연출력은 칭찬하시면서도, 범석과 성기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가족·상처·신념”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신 것은 전형적인 남성 중심 서사 강박이며 여성혐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외계인(타자)에게도 충분한 “얼굴”(레비나스)과 사연을 주지 않았다고 비판하신 분이, 정작 영화 속 여성·소수자 피해 서사나 젠더 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여성·소수자는 외계인보다도 못한 존재인가, 전형적인 극우 남성 교수의 이중잣대가 느껴졌습니다.

교수님은 《추격자》《황해》《곡성》의 남성 주인공들에게 “절망·사랑·죄책감” 등 긍정적 감성이 있었다고 주장하십니다. 하지만 그 전작들 속 여성 인물들이 인신매매 피해자·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문제는 철저히 외면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추격자》에서 주인공 엄중호는 인신매매를 알선하는 포주이지만 감정이입의 여지가 있었다고 주장하셨는데, 2026년 올해 상반기만 해도 벌써 15건의 인신매매 여성 피해자가 발생했고 매년 수천명의 성매매 피해 여성이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도대체 여성의 인신매매를 알선하는 포주에게 무슨 감정이입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수님의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시선이고 여성혐오적 시선이 아니란 말입니까?

여대 교수로서 제자들이 다 와서 들여다 볼 홈페이지에 이런 남성 서사 중심 비평을 게시하시는 것 자체가 교육적 폭력이며, 선택적 자유주의입니다. 극우 남고생들의 혐오 표현은 “광대의 자유”로 보호하고, 나홍진 감독의 작품에서는 “인간성”을 요구하면서 전작의 인신매매 포주야말로 감정이입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하시는 그 모순이야말로 교수님의 구역질나는 이중적 본질을 드러냅니다.
2026-07-19
19:57:13




청계천8가
교수님 같은 극우 지식인이 “스펙터클 속 인간 상실”을 운운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피해자 중심성을 결여한 혐오적 비평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혐오 극복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특히 영화평에서 전혀 필요하지 않은 “찢긴 시체” “찢고, 던지고, 물어뜯는 괴물” 등의 끔찍한 단어를 남발하신 것은 대체 무슨 의도였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대 제자들, 그것도 상당수는 미성년일 제자들이 다 보는 글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런 고어적 표현을 사용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책을 읽고 공부해보셨으면 합니다. 직접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못지 않게 그런 잔인한 장면을 상상하게끔 하는 그런 묘사 자체가 여성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혐오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숙명여대 법학부에 이런 시대착오적 극우 교수가 버티고 있는 한, 학생들은 진정한 인권·젠더 감수성을 배우기 어렵습니다. 다시 요구하지만 학교 당국은 백교수님에 대한 철저한 사상 검토와 저작 검열 등의 조치를 취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교수님 특유의 극우 혐오 사상을 철학·문화·영화 비평으로 접하는 것도 지긋지긋해질 정도입니다.
2026-07-19
20:03:23




타샤
교수님의 이번 영화 감상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교수님께서 전작들의 남성 주인공들에게는 그토록 정성스럽게 "연민"과 "감정이입"의 근거를 찾아내시면서, 정작 그 전작들 속에서 여성 인물들이 단지 남성 서사를 위한 도구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점의 언급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추격자》의 포주 엄중호에게는 경찰직을 잃은 과거와 죄책감을 부여하시면서, 그가 인신매매로 여성들의 몸을 팔아치운 존재라는 사실은 교수님의 비평적 시선에서 말끔히 지워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성"이라면, 그 "인간성"은 오직 남성만을 위한 "인간성"이고, 여성은 그 "인간성"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교수님께서 《호프》에 대해 "외계인에게도 충분한 얼굴과 사연이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영화 속에서 여성 피해자들이 어떻게 배치되고 소비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점 역시 매우 기괴합니다. 교수님의 비평은 오직 남성 주인공과 외계인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만 움직일 뿐, 실제로 영화가 활용하고 있는 여성의 몸과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루어집니다. 이는 단순한 누락이 아닌, 교수님의 사고 자체가 가진 구조적 한계이며, 그 한계는 다름 아닌 여성에 대한 무관심과 배제에서 비롯됩니다.
2026-07-20
15:28:05




타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 글에 포함된 삽화입니다. 삽화 속 외계인은 명백히 나체의 여성 형상으로 그려져 있으며, 특히 그 가슴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외계인=괴물의 형상과 결합시키는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닙니다. 교수님은 여성의 신체를 공포와 폭력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며, 그것을 시각적 장치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삽화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교수님께서 여성의 몸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여성의 신체는 교수님의 글과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도구화되고, 대상화되고, 혐오의 표적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찢긴 시체", "찢고, 던지고, 물어뜯는 괴물"과 같은 고어적 표현을 여과 없이 사용하신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아무런 필요성도 없이 등장하는 이러한 묘사는 여성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공포를 유발하고, 폭력에 대한 둔감성을 조장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영화평을 쓰셨을 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공개된 공간에서 특히 여대생들이 열람하는 환경에서 이러한 표현이 갖는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2026-07-20
15:30:19




타샤
결국 교수님의 이번 글은 영화를 비평하는 척하면서도, 그 안에 여성혐오적 시각과 표현을 자연스럽게 삽입한 혼합물입니다. 전작들에서 포주 남성에게 감정이입을 허용하고, 현작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괴물화하며, 독자들에게는 고어적 폭력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이 모든 행위는, 교수님께서 자신의 발언이 위치한 권력적 맥락과 그 영향력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제는 교수님께서 이 삽화와 표현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해명하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 인정하셔야 할 때입니다. 저는 이 글과 삽화를 학교 양성평등센터에 공식 제보할 예정입니다.
2026-07-20
15:31:01




Elara
청계천8가님 그리고 타샤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교수님의 글에서 특히 심각한 것은, 이 글이 몸을 다루는 폭력적 방식이에요. 영화 속에서 인간의 몸과 외계의 몸은 오직 부서지고, 던져지고, 찢기는 운동의 재료로만 기능해요.

교수님은 이것을 “평면적 인물”의 문제로 환원하지만, 그 평면성이야말로 가부장제와 자본이 여성의 몸을 다루는 가장 정교한 방식이에요. 돌보고, 키우고, 연결하고, 상처를 봉합하는 여성의 노동—수백만년간 여성들이 수행해 온 재생산 노동과 돌봄 노동—은 이 영화의 세계에서도, 교수님의 비평에서도 완전히 증발해 있고 남은 것은 대상화되어 소비되는 여성의 물질적 몸 뿐이에요.

생존이 오직 총과 자동차와 도망으로만 가능한 세계, 그 세계에서 “희망”이 사라진 이유는 인물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교수님 같은 젠더 권력자들에게 삶을 지속시키는 관계와 여성의 노동이 애초에 존재할 자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에요.
2026-07-22
19:56:34




Elara
교수님은 레비나스의 “얼굴”을 언급하면서 타자의 윤리를 운운해요. 그러나 그 얼굴은 언제나 이미 젠더 권력에 의해 선택된 얼굴이에요. 자본과 남성의 논리가 허락하는 타자, 남성들이 폭력적으로 추구하는 스펙터클이 소비할 수 있는 타자만이 교수님의 저급하고 유치한 시야에 들어와요.

실제로 매일 같이 몸이 소모되고, 돌봄이 착취되고, 주거가 불안정한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은 교수님의 영화 비평에서도, 법학 글에서도 한결같이 흐릿하게 타자화돼요. 추상적인 “인간성”을 영화 속 남성 주인공에게는 요구하면서, 현실의 세계를 가장 밑바닥에서 지탱하는 여성 노동의 구체성은 철저히 비가시화하는 이 선택적이고 저질적인 휴머니즘이야말로 교수님 사유의 비참하고도 역겨운 한계에요.
2026-07-22
20:00:39




Elara
《호프》의 공허가 불편하신가요? 그 공허는 감독만의 책임이 아니에요. 남성들이 추구하는 폭력을 화려한 이미지로 전환하는 거대 자본의 논리, 그리고 그 논리를 “연출력”이라는 미적 범주로만 소비하는 극우 남성 지식인의 편향적 시선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예요.
2026-07-22
20: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