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에서 생존자로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2026-08-24 22:08:2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았다. 영화 속 여러 장면과 대사 가운데서 내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았던 것은 거대한 바다 위 폭풍 장면도,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 장면도, 피와 살이 튀는 전쟁 장면도 아니었다. 오디세우스를 떠나보내며 칼립소가 건넸던 짧은 말, "싸우려 하지 마세요. 통제하려 하지 마세요. 그저 살아남으세요. (Don't try to fight, don't try to control. Just survive.)"였다.

이 말은 내게 있어 오디세우스의 지난 삶 전체에 대한 쓸쓸한 평가처럼 느껴졌다. 싸워서 승리하고, 자신의 지혜로 상황을 멋지게 통제하고, 그렇게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키면서 성공만 하고 살아왔던 한 인간 영웅에게 이보다 더 역설적인 충고가 있을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영웅이라기보다 영웅으로 살아남은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한 인간으로 보였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오디세우스에게서는 전설적인 영웅의 당당함보다 피로와 회한이 더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는 누구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며 위기의 순간마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에 책임을 지게 된다.

그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 누구와 싸울 것인지, 누구를 버리고 누구를 구할 것인지, 언제 도망치고 언제 맞설 것인지. 그리고 그는 때로는 올바르게, 때로는 잘못 판단하며 자기 앞길을 헤쳐나갔다.

하지만 그의 가장 올바른 결정조차 누군가를 반드시 죽게 만들었다. 이 영화가 내게 유난히 슬프게 다가온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뿐 아니라 어쩌면 최선이었을 선택 때문에도 평생 괴로워할 수 있다는 사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Ὀδύσσεια)』는 흔히 귀환(νόστος)의 이야기로 읽힌다. 트로이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가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고대의 독자에게 그의 생환은 무엇보다 그의 비범한 지략과 인내를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놀란 감독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다. 그와 함께 이타카를 떠난 부하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으며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 부하들에게도 기다리는 아내와 기다리는 아들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났을 때 그들 가운데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에게 귀환은 완전한 승리가 될 수 없었다. 이타카에 혼자 발을 디딘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남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영화의 출발점인 트로이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인 신화에서 트로이 목마는 오디세우스의 지략, 즉 mētis의 절정이다. 십 년 동안 함락하지 못했던 도시를 인간의 지혜로 무너뜨린 위대한 계략인 것이다.

그런데 놀란의 영화에서 트로이 목마는 오히려 오디세우스가 평생 짊어져야 할 원죄(原罪)에 가까워 보인다. 트로이 목마는 바로 상대방의 신뢰를 이용하여 만든 무기이다. 선물인 것처럼 가장하고, 상대가 그것을 자기 성벽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다음, 바로 그 신뢰를 이용하여 상대를 파괴한 무기였다.

여기에서 이 영화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제우스의 법, 즉 xenia의 의미가 드러난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고 먹이고 재우며 보호하는 환대의 규범은 그 시대에 단순한 예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인간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트로이 목마는 바로 그 규칙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파괴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트로이의 함락은 단순히 하나의 도시가 멸망한 사건이 아니었다. 신뢰라는 문명의 규범 자체가 붕괴됨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여기서 나는 자연스럽게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를 떠올렸다. 트로이 목마와 원자폭탄은 전혀 다른 시대의 산물이지만 기묘하게 닮아 있다. 둘 다 인간 지성의 놀라운 승리이다.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비범한 인간의 지성이 해결해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성의 승리가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파괴를 가능하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일을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일단 그 선을 넘어선 뒤에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데 말이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단순한 개인의 귀환 이야기라기보다 문명의 발전과 쇠퇴, 그리고 그 밑바탕에 자리한 그 문명 자체의 태생적 모순과 한계에 관한 영화로 보게 되었다.

영화 곳곳에는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불안이 깔려 있다. 오랜 전쟁은 사람들을 지치게 했고, 공동체를 유지하던 규칙은 더 이상 예전처럼 존중받지 않게 되었다. 환대는 점점 위험한 행위가 되어가며, 약속과 신뢰보다는 힘과 기만이 더 유용한 시대가 되어간다.

여기서 놀란은 역사적 청동기시대의 붕괴를 현대 서구문명의 몰락과 은근히 겹쳐놓는다. 어쩌면 문명은 외부에서 야만인이 쳐들어오는 순간 비로소 무너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문명은 이미 그 내부에 무너질 원인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그때문에 무너지는 건지도 모른다.

내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이 영화가 xenia의 붕괴를 단순하게 선악의 문제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디세우스 자신이 xenia의 규범을 파괴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규범의 파괴로 고통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타카에 돌아왔을 때 그의 집을 점령하고 있는 구혼자들도 환대의 규범을 악용한다. 손님으로 들어와 주인의 재산을 축내고 그의 아내와 왕국까지 차지하려 한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규칙을 지키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가 승리한다. 그러나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면 자신 역시 그동안 자신이 증오해왔던 비도덕적 세계의 일부가 된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생의 딜레마, 아니 문명 자체의 딜레마라고 느꼈다.

이런 시선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키클롭스와 세이렌과 키르케 같은 존재들도 다르게 보인다.

놀란은 신화의 초자연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세계 속에 배치하여 생생하게 느끼게 만든다. 바다는 실제 바다처럼 무섭고, 바위는 실제처럼 거칠며, 인간의 몸은 쉽게 지치고 상처 입고 더러워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신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 아주 오래전에 실제로 일어난 어떤 사건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분명해 보였던 인간과 괴물 간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어쩌면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과제는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게 아니라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선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겠구나 싶어졌다. 물론 영화는 그것조차 과연 가능한 일인지 쉽게 대답하지 않는 듯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PTSD를 앓는 늙은 군인처럼 보였다.

그의 육체는 전쟁터에서 빠져나왔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고향은 존재하지만 그는 아직 그곳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였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서 칼립소의 섬은 흔히 귀환을 방해하는 유혹과 정체의 공간으로 읽힌다. 그러나 놀란의 영화에서 나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느꼈다. 오디세우스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왕일 필요도, 장군일 필요도 없었다. 부하들의 생사를 결정할 필요도 없었다. 칼립소의 섬은 오디세우스에게 유혹과 정체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와 깨달음의 공간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일으킨 가장 큰 변화가 오디세우스를 영웅에서 생존자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 오디세우스에게 삶은 승리하는 것이었다. 왕 오디세우스에게 삶은 책임지는 것이었다. 장군 오디세우스에게 삶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경험한 뒤 최후에 오디세우스에게 남은 것은 훨씬 초라한 목표였다: 살아남는 것.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현대인의 삶과 닮은 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우리 역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계획을 세우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만들려고 한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 노력하고, 가족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지키려 노력하며, 때로는 만만한 상대에게 싸움을 걸고 승리하고 파괴하고 쟁취하는 일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 적어도 삶의 중요한 부분은 자신의 뜻대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세상 일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리 신중하게 결정해도 잘못된 결과는 반드시 생기게 돼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누군가를 구하려고 한 선택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이미 내린 결정은 되돌릴 수 없고, 지나간 시간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성공한 일보다 실패한 일, 어쩌면 다르게 할 수도 있었던 일들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들이 우리를 덮친다. 그럴 때 싸우라는 말은 공허해진다. 모든 것을 통제하라는 말은 더욱 잔인해진다.

그래서 결국 남는 말이 이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남으라는 것(Just survive).

그럼에도 이 영화는 완전한 절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돌아온다. 하지만 처음 떠났던 사람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귀환은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아니다. 전쟁 전의 오디세우스, 트로이 목마를 생각해내기 전의 오디세우스, 부하들이 모두 살아 있던 시절의 오디세우스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 역시 그가 떠나던 날의 사람들이 아니다.

따라서 nostos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를 복원하는 게 아닐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은 사람이 그 모든 기억을 가지고도 다시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갈 자리를 찾는 것. 그게 귀환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살아남는다는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죄책감을 가지고도 살아남는 것.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도 살아남는 것. 자신의 선택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도 살아남는 것. 더 이상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살아남는 것...

사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영웅이 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인생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 있고, 사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 상처가 있으며, 아무리 애써도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도 있다. 그리고 때로 우리가 가장 옳다고 믿었던 선택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가장 아픈 기억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칼립소의 말이 그렇게 슬프게 들렸던 것 같다.

“싸우려 하지 마세요. 통제하려 하지 마세요. 그저 살아남으세요.”

호메로스에게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 똑똑한 영웅이었다. 놀란은 그 오래된 이야기를 뒤집어 묻는다.

왜 당신만 살아남았는가.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어떤 희생을 치렀는가.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당신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신화 속의 영웅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들을 후회하고,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애쓰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어느 평범한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그간의 고전적 해석처럼 한 영웅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관한 영화라고 더 이상 볼 수 없을 듯하다.

그보다 《오디세이》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가진 한 인간이, 그래도 자신에게 남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영화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